가이나스
가이나스는 동고트족과의 협상을 주도했다. 트리비길트가 보낸 협상안을 대신들 앞에서 직접 읽었다.
“동고트족이 트라키아에 살도록 허용해달라고 합니다.”
트라키아는 콘스탄티노플이 위치한 동로마의 중심지역이었다. 그 곳에 동고트족이 살도록 허용한다면 수도와 황궁은 언제든 동고트족의 위협에 노출되는 셈이었다.
“다른 지역은 안 되겠습니까?”
동로마 대신들은 조심스럽게 다른 지역을 권유했지만, 가이나스는 그들의 제안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최대한 동고트족이 콘스탄티노플 가까이에서 자신의 곁에 있도록 해야 했다.
“트리비길트가 트라키아를 원하는데 어쩌겠습니까. 들어줘야죠.”
가이나스의 말에 황제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다음 협상조건을 읽어 내려갔다.
“두 번째 조건은 아우렐리아누스와 사트루니누스를 처형하는 겁니다.”
그들은 가이나스의 협상에 반대하는 원로원의 정적들이었다. 아우렐리아누스와 사트루니누스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동고트족에게 잘못한 것이 없는데 어째서 처형하라는 겁니까?”
대신의 물음에 가이나스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잘못한 것이 없다니요? 협상을 반대하는 게 잘못하는 게 아니고 뭡니까?”
세 번째 조건을 읽었다.
“트리비길트와 그의 부하들을 군사령관과 군대의 장교로 임명하는 것입니다.”
황제와 대신들은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해져서 말을 하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았다. 가이나스는 그런 그들을 즐기듯이 내려다보았다. 야만족이라고 자신을 무시하던 자들이 이렇게 아무 말도 못하고 쭈그러져 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뿌듯했다.
“어서 협상안에 서명을 하시지요.”
그는 황제를 재촉했다. 대신들이 그를 말렸다.
“서두르지 말고 잠시 논의를 해 봅시다.”
대신들은 첫 번째와 세 번째 조건은 받아들인다 해도 죄 없는 아우렐리아누스와 사트루니누스를 그들의 화풀이 때문에 죽인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로마의 대신을 야만족의 요구로 처형한다는 것은 전례가 없소.”
“옳소. 이건 내정간섭이오.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굴욕적인 일이오.”
대신들의 거부감이 심하자, 가이나스는 한 발 물러났다.
“그렇다면 두 번째 조건은 내가 트리비길트를 설득해 보겠소.”
그는 큰 인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거만하게 말했다. 아우렐리아누스와 사트루니누스는 자신이 무시하던 야만족 장군에게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들은 가이나스에게 굽신거리며 몸을 낮췄다.
“트리비길트에게 잘 말씀드려주십시오.”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가이나스는 우월감에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저런 별것 아닌 자들을 지금까지 자신이 대단하게 여기고 섬겨왔다니.
“걱정하지 마시오. 나만 믿으시오. 협상을 해서 두 분의 목숨을 구명해드리겠소.”
단순한 가이나스는 그들이 허리를 굽히고 들어오자 금새 마음이 풀려서 호탕하게 웃었다.
대신들은 가이나스의 웃음에 벌레라도 씹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가이나스는 자신의 마음대로 관리들을 임명하고 해임했다. 그의 부하들과 잇달아 승진하고, 트리비길트와 동고트족이 높은 정부 관리로 부임했다.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관철되자, 그는 안일함에 빠져들었다. 루피누스도 에우트로피우스도 빠져들었던 오만함의 늪을 그 역시 건너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이렇게 쉬운 것을 지금까지 왜 안했을까. 내 말 한마디면 다들 꼼짝 못하는데.”
모두가 그를 두려워하고 그의 말이 곧 법이었다.
가이나스는 이제 동고트족을 로마인과 똑같이 생각했다. 동고트족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동로마군을 데리고 가서 군대를 재편성해서 하나로 합쳤다.
“이제는 다 같은 로마군이고 로마인이니 함께 잘 지내도록 해.”
알라리크가 서고트족을 로마군에 편성했던 행동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그러나, 알라리크의 겸손한 태도와 조심스러운 주의력은 따라하지 못했다. 서고트족을 동생이라고 생각하고 잘 가르쳐달라며 로마군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던 알라리크과 달리, 가이나스는 로마인들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을 따르는 동고트족을 로마군과 단번에 대등한 위치에 올려놓았다.
동고트족 병사들은 가이나스를 호위하고 콘스탄티노플로 들어왔다. 가이나스는 개선장군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동고트족은 황제의 병사가 아니라 자신의 병사나 마찬가지였다. 스틸리코와 알라리크처럼 그도 자신만을 따르는 병사들이 생긴 것이 가슴 설레도록 기뻤다.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며칠 전까지도 동로마인을 약탈하고 죽이고 다닌 동고트족이 자신들의 눈앞에서 활개치고 걸어다니는 것을 매일 쳐다보아야 했다. 그들의 눈빛에 참담함과 분노가 어렸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콘스탄티노플에 들어온 동고트족은 이런저런 문제를 일으켰다. 도시 생활에 익숙하지 않아서 공공시설들을 지저분하게 이용했고, 말이 통하지 않아서 싸움에 욕설에 사람을 때리는 일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그래도 처벌하기 쉽지 않았다. 재판에서 유죄를 받아도 가이나스가 도로 그들을 사면해 주었다.
“아직 이곳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서 미숙해서 그런 것이니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오.”
로마인들만 피해를 보고 동고트족은 빠져나가니, 동고트족은 잘못된 행동을 고칠 필요를 못느꼈다. 야만족에 대한 시민들의 혐오감과 거부감은 점점 심해졌다.
큰 일을 마무리하고 오랜만에 알라리크와 만난 가이나스는 자신만만했다.
“네 말대로 과감하게 행동하니까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더라.”
알라리크는 들떠있는 그에게 충고했다.
“너무 서두르지 마. 이럴 때일수록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꼬투리 잡힐 짓을 하지 마. 너무 앞으로 나서서 로마인의 감정을 건드리면 안 돼.”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알고, 밀고 당기고 하면서 차츰 전진해야 하는데, 가이나스는 너무 저돌적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알라리크는 일리리쿰 군사령관이 된 이후로 예의바르게 행동하며 로마 황실의 환심을 사고, 야만족을 거부하는 로마군과 로마인들에게 숙이고 다가가서 그들의 반감을 줄여나갔다. 서고트족에게도 법을 엄격하게 적용해서 도둑질을 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면 공정하게 처벌했다. 몰라서 그랬다는 핑계는 통하지 않았다. 야만족에게도 로마인에게도 똑같은 기준으로 엄정하게 법을 적용하니 로마인도 불만이 없었다.
그런데 가이나스는 권력을 얻고 나서 마치 자신의 힘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시험이라도 하는 것처럼 도가 넘는 행동을 했다. 동고트족이 문제를 일으키면 감싸고, 처벌을 받으면 자신의 직권으로 사면해주었다. 그러니 동고트족은 행실을 고칠 필요를 못 느꼈고 로마인의 불만이 높아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 측근들을 요직에 앉혀놨어. 이제는 난 뒤로 물러나있고 그들이 알아서 할 거야.”
알라리크는 권력에 취한 가이나스의 모습이 불안해보였다.
“로마인들의 자존심을 무시하지 마. 그들도 밟으면 꿈틀 해. 특히 원로원 의원들을 동향을 잘 감시해. 결국 로마의 여론은 그들이 주도해.”
가이나스는 알라리크의 우려에 핀잔을 주었다.
“걱정 마. 로마에는 너보다 내가 오래 살았어. 나한테는 동고트족과 동로마 군대가 있는데 누가 감히 나한테 반대를 하겠냐?”
알라리크의 조언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동안 로마인들에게 기죽어서 살았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동로마의 군대와 야만족 군대가 모두 그의 손에 있었다. 그에게 반대할 세력은 눈을 씻고 봐도 개미 한 마리 없었다.
“로마인들은 자기 목숨 보존할 생각 뿐이야. 다 겁쟁이들이야. 로마인들에게 자존심 따위가 있다면 루피누스와 에우트로피우스에게 그렇게 당하면서도 가만히 있었겠어?”
그는 이제야 비로소 자신이 소망하던 것을 손에 넣은 기분이 들었다. 야만족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동로마군 총사령관을 하면서도 다른 대신들과 황제의 눈치를 보며 조바심을 내며 지냈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되었다. 자신의 지위는 바뀐 것이 없는데,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듯 했다. 대체 무슨 조화가 일어난 것일까.
“아, 그리고 한 가지 문제가 있어.”
가이나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알라리크에게 조언을 구했다.
“뭔데?”
동고트족과 지내다보니 그들이 서고트족보다 로마화 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문명화되지 않았고, 문명화된 사회의 규칙에 익숙하지 않았다.
“동고트족이 법과 규칙을 지키도록 가르쳐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해.”
동고트족은 군대에서도 도시에서도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바꾸지 못하고 제멋대로 행동해서 적응하지 못했다. 라틴어도 그리스어도 모르는 그들은 말이 통하지 않아서 시내에서 자주 다툼이 벌어졌는데 그때마다 주먹부터 나갔다. 가게에 쌓아놓은 물건을 한두 개 슬쩍 집어가는 것에도 죄책감이 없었다. 맨살을 드러내놓기를 꺼리는 로마인과 달리 반나체로 돌아다니곤 했다. 로마인들은 뭐라고는 못하지만 눈살을 찌푸리며 피했다.
동고트족을 교육하고 정신을 로마인처럼 개조할 방법이 필요했다.
알라리크는 가이나스의 물음에 해답을 내놓았다.
“서고트족이 처음 로마영내에 거주할 때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내세운 조건 기억나?”
“종교를 기독교로 바꾸는 것이 조건이었잖아.”
“왜 그랬겠어?”
“그야 자기가 기독교를 믿으니까.”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가톨릭을 믿는데, 서고트족은 아리우스파 기독교를 믿도록 했잖아.”
“그러게. 왜 그랬지?”
이상하게 여기는 가이나스에게 알라리크가 설명을 해 주었다.
“굳이 자기가 믿는 종교를 전파하려던 게 아니야. 서고트족을 로마화 시키기 위해서 종교를 이용했던 거야. 기독교 성직자들의 설교를 매주 일요일마다 듣게 해서 마음과 정신을 로마화 시키려는 목적이었던 거지.”
기독교 계율인 십계명은 사회를 이루어 살면서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규율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살인하지 말라,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말라는 등의 규율을 종교로서 믿게 되면 규칙을 어길 때 스스로 죄책감을 갖게 될 것이다. 동고트족이 기독교를 믿으면 간단히 그들을 문명화시킬 수 있었다.
서고트족이 정착할 당시 로마에는 아리우스파 기독교가 가톨릭 기독교보다 우세하고 설교자도 더 많았다. 야만족을 교화시킬 아리우스파 성직자가 많았기 때문에 아리우스파를 믿도록 한 것이었다.
“그렇구나.”
“동고트족도 종교를 기독교로 바꾸도록 해서 교회에 가게 만들어. 기독교 설교자들의 설교를 듣다보면 로마화 될 거야.”
그것을 동고트족과의 협상조건에 걸었어야 하는데 이미 늦었다. 가이나스는 쩝 입맛을 다셨다.
“지금이라도 동고트족이 기독교를 믿도록 만들어야겠네.”
알라리크는 신중하게 생각에 잠겼다.
“지금 동로마에는 가톨릭 기독교가 대세니까, 아리우스파 기독교보다는 가톨릭 기독교를 믿어. 그 편이 로마인들과 융화하기 쉬울 거야.”
서고트족은 아리우스파 기독교를 믿어서, 알라리크와 가이나스도 아리우스파 기독교를 믿었다. 반면에 동서로마는 황실을 비롯해서 가톨릭 기독교 신자가 많았다.
“그러면 동고트족과 내가 믿는 종교가 달라지잖아.”
“네가 가톨릭으로 전향하면 되지.”
“굳이 내가 뭐 하러 전향해.”
알라리크는 옅게 한숨을 쉬었다.
“종교 문제는 진짜로 신중하게 접근해야 돼. 내가 보기에는 어차피 동고트족이 기독교로 전향할 거라면 아예 너도 동고트족도 가톨릭으로 전향하는 게 로마인들의 신뢰를 얻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야. 그러면 로마인들도 동고트족을 쉽게 받아들일 거야.”
알라리크는 스틸리코가 가톨릭 성자를 앞세워서 7만의 길도 군단을 와해시켜 버리는 것을 보았다. 로마인들에게 종교는 생각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였다.
동고트족은 동로마인들에게 혐오스런 골치덩이였다. 그런데 동고트족이 로마인과 같은 가톨릭으로 개종한다고 하면 로마인들에게 그들을 형제로서 환영해야 하는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어리석은 야만족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눈을 뜨도록 친절하게 교화시켜야 하는 책임감을 로마인들이 갖게 만드는 것이다.
“그냥 가톨릭 교회에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로마인들과 섞이는 게 좋아. 개종하는 김에 동고트족을 가톨릭 기독교를 믿게 하고 너도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콘스탄티노플의 가톨릭 주교들을 다 네 편으로 만들 수 있어.”
알라리크의 계속된 설득에도 가이나스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아리우스파 기독교를 믿으라고 한 게 로마황제인데 뭘 굳이 내가 종교를 바꿔. 기독교만 믿으면 되지. 서고트족도 일리리쿰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지는 않았잖아.”
그에게는 알라리크의 충고가 쓸데없이 예민한 잔소리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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