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각협상
스틸리코는 알라리크가 현재 병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군대를 상당수 잃었고 처자식까지 붙잡혀있으니 이쯤이면 포기하고 조용히 일리리쿰으로 돌아가서 은거할 거라고 예상했다. 어쩌면 지위를 보장받거나 가족을 돌려받기 위한 협상을 걸어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끝까지 싸우겠다는 것이었다. 반에 반도 안 남은 병력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게다가 수에비족과 알레만니족이 알려오기를, 알라리크가 또 한 번 같이 로마를 공격하자고 제안해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스틸리코와의 협정에 만족하고 있어서 그럴 생각은 없노라고 답변했다고 했다.
서고트족 첩자는 알라리크가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서 투스카니를 정복하고 로마를 공격할 것을 선언했다고 알려왔다.
가우덴티우스는 알라리크의 집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퇴로를 열어줬는데 왜 저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스틸리코는 이길 가망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끝까지 처절하게 투쟁하며 전진하는 알라리크의 행동에 입을 굳게 다물었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야만족들은 백이면 백, 협상을 통해서 퇴각할 명분을 만들고 돈을 챙겨 물러났다.
그런데 알라리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은 소수의 병력으로 로마를 공격하러 가겠다고 큰소리를 치면서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점점 치명적인 적진 깊숙이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가우덴티우스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스틸리코는 그가 어떤 기분일지, 무슨 생각인지 짐작이 갔다.
“가족을 잃었다고 해도 절대로 로마에 굴복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겠다는 걸 로마와 서고트족에게 보여주는 거야. 지금 포기하고 물러서면 절망한 서고트족이 다시 뭉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테니까, 그들에게 목표를 부여해서 붙잡아 놓으려는 게지.”
그래서 크게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서고트족이 흩어지지 않고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를 키워줘 봐야 결국 로마에 칼을 들이댈 거라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말이 지금까지는 맞은 셈이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판단처럼 알라리크는 로마제국과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는 존재일까.
스틸리코는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일면만 보았다고 생각했다. 알라리크는 공정하게 대우해주고 약속을 지키기만 하면 먼저 신뢰를 깨지 않았다. 다른 야만족처럼 약속을 해놓고도 더 큰 이익을 요구하며 변덕스럽게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협정을 맺거나 본인이 정한 목표가 있으면 스스로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했다.
일리리쿰 군사령관이 된 이후에, 정해진 권한과 급여 외에는 딱히 돈을 더 주거나 회유를 한 것도 아닌데 맡은 임무를 누구보다 성실하게 수행했다. 3년간 수만 명의 정예병을 키워냈고, 로마의 편에 서서 야만족과 싸웠다.
알라리크와 서고트족이 일리리쿰에 있는 동안 도나우 강 전선은 안전했다. 동로마황궁이 그를 해임하지만 않았더라면 지금도 여전히 도나우 강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도나우강 국경을 이전처럼 서고트족이 지켜준다면 로마군의 병력부족문제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알라리크가 일리리쿰으로 돌아가서 예전처럼 그 곳의 치안을 담당해준다면 어느 정도의 비용과 물질적 지원을 해 줄 용의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결사항전으로 배짱을 부리고 나오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가족을 붙잡고 있으면 알라리크를 조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처자식의 목숨이 위태로운데도 뒤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수도 로마를 향해서 진군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그를 멈출 수 있을까.
‘알라리크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뭐지?’
곰곰이 생각하던 스틸리코는 그것이 서고트족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서고트족 족장들을 돌려세우면 그를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서고트족 족장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뭘 해야 하지?’
알라리크는 돈에 무관심했지만, 그의 밑의 족장들은 그렇지 않았다. 족장이 자신의 부족원을 돌보고 세력을 거느리려면 상당한 액수의 돈이 필요했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돈이었고, 돈을 준다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알라리크의 주위에는 충성스러운 자들도 있었지만, 로마를 약탈해서 한 몫 챙겨보려는 심리를 가진 자들이 더 많았다. 알라리크도 결국은 족장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으니, 돈을 제시하면 이탈리아에서 물러나는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스틸리코는 재차 협상단을 파견했다. 조용히 일리리쿰으로 돌아간다면 뒤쫓지 않고 얼마의 돈도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물론 적에게 돈을 주어 돌려보내는 것은 로마제국의 명예를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직접적으로 돈을 주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폴렌티아에 내팽개치고 간 수레에 실린 무기와 전리품에 해당하는 비용을 돈으로 돌려주겠다는 뉘앙스로 말했다.
가우덴티우스는 스틸리코에게 물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좋은 조건을 제시하시는 겁니까?”
“저들이 이탈리아에서는 도적들이지만, 일리리쿰으로 돌아가면 그곳을 방어하는 병력이 될 테니까.”
일리리쿰에 알라리크와 서고트족이 버티고 있으면 다른 야만족이 쉽사리 쳐들어오지는 못할 것이다. 야만족이 쳐들어온다면 서고트족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들과 싸울 것이다. 돈을 주고 일리리쿰에 돌려보내는 것이 로마가 손해 보는 일만은 아니었다.
협상단이 말한 조건을 듣자, 서고트족 족장들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입이 헤 벌어졌다.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퇴각하면 전리품을 돌려준다니, 이것은 패배가 아니라 휴전이라고 봐도 좋았고, 심지어 서고트족이 승리한 거라고 우겨도 믿을 것이다.
스틸리코의 예상대로 병사도 잃고 돈에 쪼들리며 로마군에 쫒기고 있는 족장들은 마음이 붕 떴다. 그들은 좋아서 어쩔 줄 몰라서 표정관리가 안 됐다.
“퇴각하기만 하면 돈을 돌려받을 수 있다니, 이건 우리가 이겼다고 인정해주는 겁니다. 이런 좋은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알라리크는 돈 앞에서 무너지는 그들을 보면서 모멸감에 가슴이 쓰라렸다. 결국은 자신이 저들에게 얼마 안 되는 돈을 벌어주기 위해서 가족과 많은 부하들을 희생시킨 것인가 절망스러웠다.
족장들은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서 스틸리코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압박했다. 아타울프 마저도 그에게 이 상태로 로마를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렸다.
“이대로 싸울 수도 없잖습니까? 로마와 싸움을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고, 일단 이번 전쟁은 이정도로 합의하고 다음을 기약하십시오.”
서고트족이 배가 고프다는 것을 알고 눈앞에 군침 도는 먹음직스러운 고기를 미끼로 던진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도 상대방의 약점을 잘 찾아내는지, 그런 면에 있어서 스틸리코는 동물적인 감각을 지닌 듯 했다. 가족을 데려가서 그의 심장을 찌르더니, 이번에는 족장들을 돈으로 유혹해서 그의 손발을 잘라버리는 것이다.
알라리크는 협상을 하지 않으려고 질질 끌었지만, 결국 굶주린 병사들과 족장들의 뜻을 무시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협상을 받아들였다.
평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회담이 넓은 벌판에서 열렸다. 양측의 군대가 멀리 떨어져 있는 가운데, 스틸리코가 서너 명의 부하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알라리크도 몇몇 부하들과 함께 앞으로 걸어 나왔다.
스틸리코는 팽팽히 당겨진 활과 같은 긴장감이 서린 그의 표정을 보고 아직도 그가 로마와 싸울 마음을 버리지 않은 것을 느꼈다. 그들은 말없이 퇴각 조건을 적은 조약을 읽고 서류에 각자 서명을 했다.
“잠깐 이야기 좀 하지.”
스틸리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알라리크는 그가 인질로 잡힌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서 마음을 흔들려는 의도로 보고 거절했다.
“가족이야기나 개인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스틸리코는 어깨를 으쓱하며 앞서서 걸어갔다.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겠네.”
알라리크는 그를 따라서 걸어갔다. 그들이 걸어오자 수풀 속에 앉아있던 새떼가 놀라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수행원들에게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자, 스틸리코가 입을 열었다.
“제국에 협력하면서 서고트족이 살 길을 도모하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지 않나? 네가 로마제국을 적대하지 않으면 로마인도 서고트족도 싸우지 않고 화합할 방법이 있을 거야.”
알라리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스틸리코는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일리리쿰으로 돌아가서 그곳을 잘 방어하고 있으면 서고트족도 로마에서 잘 살 수 있는 길이 열릴 거야.”
독기가 올라서 눈이 퀭해진 알라리크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서고트족이 사는 길은 로마와 싸워 이기는 것뿐이야. 지금은 후퇴하지만, 나는 서고트족을 위해서 죽을 때까지 싸움을 멈추지 않을 거다.”
그의 투지는 아직도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로마에 승리할 때보다 패배할 때일수록 짓밟힐수록 싸우려는 갈망은 더욱 강해졌다. 담금질한 쇠는 망치로 얻어맞으면서 강해지는 것처럼 알라리크도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역경과 고난은 그의 힘을 솟아오르게 할 뿐 굴복시킬 수 없었다.
스틸리코는 멈춰 서서 그를 잠시 쳐다보더니 조용히 팔을 벌렸다.
“서고트족을 위해서 죽겠다고? 나는 너를 죽일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죽을 건데? 지난번에도 죽이지 않고 그냥 보내줬잖아.”
알라리크는 커다란 망치로 뒤통수를 후려 맞은 느낌이었다. 돌이켜보면 그가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은 강쪽에 로마군의 포위망이 비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로마군의 포위망이 그렇게 허술할 리가 없었다. 한 달 동안이나 그들의 뒤를 쫒아오며 신중하게 포위했던 스틸리코가 강 건너편에 부대를 배치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강을 건너서 도망칠 수 있는 자는 말을 탄 기병대와 헤엄을 칠 수 있는 건장한 병사들이었다. 강을 건너지 못하는 자는 어린이와 부녀자였다. 처음부터 스틸리코는 거름망으로 걸러내듯이 서고트족의 기병대는 놓아주고 서고트족의 가족과 일부 보병만 사로잡으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기병대는 기술이 필요해서 보병보다 양성하기가 훨씬 어려웠다. 서고트족이 일리리쿰으로 돌아가서 그 곳을 방어하게 되면, 그들이 일리리쿰을 수비하는 병력이 되기 때문에 기병을 그대로 보내준 것이다.
어차피 보병이 받쳐주지 않으면 기병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강을 건너지 못한 보병을 포로로 잡을 테니, 기병은 도망치게 놔줘도 힘을 쓰지 못할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온 몸에 한기가 돌았다. 자신이 아무리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봐야 스틸리코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스틸리코는 적을 단순히 이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에 따라 마음대로 적을 다루었다. 서고트족을 자기 필요대로 기병과 보병, 아녀자를 분리해서 원하는 대로 취하고 보내준 것이다.
알라리크는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스틸리코가 그를 살려줬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남아있는 그의 최후의 자존심 한 조각마저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일부러 놔준 거라고? 그 말을 믿을 것 같나?”
창백해진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며 알라리크가 되물었다. 스틸리코는 그를 잡았다 풀어주는 것쯤은 어렵지 않다는 듯이 그의 눈을 보며 말했다.
“다음번에 다시 한 번 놔주면 그때는 믿을 텐가? 그때는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인정할 텐가?”
스틸리코는 다시 걷기 시작했지만, 알라리크는 그를 따라갈 수 없었다. 현기증을 느꼈다. 하늘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 숨이 막혔다. 그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내서 말했다.
“프로모투스를 유인해서 죽인 게 나야.”
로마군과 서고트족은 절대로 같이 갈 수 없었다. 그들은 너무나 오랜 시간 긴 증오와 악연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미움과 원망과 편견은 모든 사람의 뇌리에 깊이 박혀있어서 도저히 털어낼 수는 없었다. 스틸리코도 그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스틸리코는 발걸음을 멈추고 씁쓸한 표정으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아. 가이나스에게서 들었어.”
그는 알라리크를 쳐다보며 덧붙였다.
“그날 네 친구가 로마군에게 죽은 것도 들었어.”
스틸리코는 다시 돌아서서 들꽃이 핀 벌판을 걸어갔다. 알라리크는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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