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리크
사루스는 호락호락 협상 대표자 지위를 내놓을 사람이 아니었다. 하물며 그에게 알라리크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에 불과했다. 그는 허리에 찬 칼을 뽑았다.
“목을 내놓겠다고? 그럼 지금 내놔.”
그는 알라리크의 가슴에 칼을 들이댔다.
“발티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고 다 만만해 보여? 나도 로마제국도? 어디 다시 한 번 지껄여 봐라.”
몇몇 족장들이 일어서서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말렸다.
“칼은 치우고 얘기해.”
“알라리크의 말을 더 들어봐.”
“우리한테 좋은 얘기잖아.”
족장들이 자신의 편을 들자 알라리크는 오히려 사루스를 위협하듯이 다가섰다.
“협상이 실패하면 내 목을 치고 다시 대표자가 되면 그만 아닙니까? 협상을 할 자신이 없으면 대표자 자리를 내놓는 게 맞죠.”
로마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혹은 사루스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족장들이 거칠게 야유를 했다.
“알라리크의 말이 옳소. 협상을 해 봅시다.”
“협상하라고 대표자를 뽑아 놨는데 협상을 못하면 내려와야지.”
“알라리크를 서고트족 대표로!”
아말리 가문을 따르던 족장들도 용병료를 2배로 올려 받자는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이미 그 돈이 수중에 들어온 것처럼 희망으로 얼굴이 밝아졌다.
“알라리크에게도 협상 기회를 줘 보자.”
“그래. 밑져야 본전이지.”
사루스는 분노를 참을 수 없는 듯 이마에 핏줄이 솟아올랐지만, 그들 전체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대표자로서 급료를 2배로 올리는 협상을 해낼 자신도 없었다. 천천히 칼을 든 손이 내려갔다.
“한 달이다. 한 달 내로 용병료 인상 협상을 해내지 못하면 이 칼이 네 목 맛을 보고야 말거다.”
“그럼,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군요. 지금 바로 떠나겠습니다. 위임장을 써주십시오.”
알라리크는 내친 김에 족장들에게 위임장을 받았다. 족장들은 일어나서 각자 서명을 했다. 사루스는 그들을 막지는 못하고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험악하게 노려보았다.
알라리크는 족장들에게 당부했다.
“로마가 개별적으로 협상을 하자고 찾아올 겁니다. 그때 하나로 뭉쳐서 거부해야 협상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족장들은 그에게 신의를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그야 당연하지.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해도 거절할 거야.”
“배신하는 부족은 서고트족 전체를 뒤통수치는 거야.”
알라리크는 위임장을 품에 넣고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그는 아타울프에게 뒷일을 맡겼다.
“황제와 협상을 하러 로마에 다녀오겠다. 각 부족의 동향을 잘 살피고 있어.”
아타울프는 한숨을 쉬었다.
“꼭 목을 걸어야 했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루스가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을 걸.”
“로마군이 우리의 요구를 들어줄까요?”
알라리크는 그를 다독였다.
“로마 쪽 일은 걱정하지 마. 들어줄 수밖에 없을 거야. 이탈하는 부족이 나오지 않게 우리 쪽이나 잘 설득하고 있어.”
알라리크는 로마군과 협상을 하는 것은 물론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자신의 목숨까지 건 마당에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할 수 있어.”
그는 아타울프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 자기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확신이 없어도 일단 부딪쳐 봐야 직성이 풀렸다.
“해보지도 않고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아?”
그가 위험한 일을 할 때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바스타르네이 전투 때에도 로마군과 싸운 것은 처음이었고 확신을 가지고 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로마군 장수를 죽일 수 있었다.
그는 도전해야 행운도 따르는 거라고 믿었다.
마을을 벗어나 달려간 알라리크는 벌판에 진을 친 로마군 진영에 도착했다. 말에서 내려 다가가자 보초병이 창을 겨누며 다가왔다. 비싼 갑옷에 긴 창과 칼로 중무장을 한 로마군 한가운데로 들어가려니 으스스했다. 알라리크는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서 서고트족 족장들이 서명한 위임장을 로마군에게 내밀었다.
“황제폐하의 서고트족 출전명령에 대한 답을 가지고 왔습니다.”
위임장을 살펴본 호위대장이 알라리크에게 말했다.
“따라와.”
그는 알라리크를 스틸리코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서고트족 협상대표가 왔습니다.”
스틸리코는 서고트족 협상대표가 도착했다는 보고에 당연히 사루스가 왔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방안에 들어온 것은 낯선 젊은이였다. 스틸리코는 그를 보고 눈썹을 치켜들었다.
“서고트족 대표자는 사루스가 아니었나?”
놀란 것은 알라리크도 마찬가지였다. 가이나스를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가 마주친 것은 몇 번이나 악몽에 시달렸던 바스타르네이 전투의 저승사자 스틸리코였다. 가뜩이나 긴장하고 있는데 뜻하지 않은 만남에 등줄기가 서늘했다.
진땀이 났지만 초조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며칠 전에 바뀌었습니다.”
“바뀌었다고 통보를 받지 못했는데?”
“막 통보를 해드리려던 참입니다.”
서고트족 족장들의 서명이 들어간 위임장을 내밀었다. 스틸리코는 그것을 받아들고 살펴보았다. 이상한 점은 없었다.
야만족 내부에서 권력다툼으로 지도자가 바뀌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서고트족 지도자가 된 자는 20대 초반의 젊은이였다. 나이 많은 노련한 족장들도 많은데, 그가 대표자가 되었다는 것은 뭔가 서고트족 내부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었다. 스틸리코는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손을 내밀었다.
“나는 동로마제국의 총사령관 스틸리코이네.”
알라리크는 억지로 미소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서고트족 협상대표 알라리크입니다.”
이번에는 스틸리코가 순간 멈칫 했다. 알라리크라면 프로모투스를 죽이고 로마제국에 반기를 들고 있는 맹랑한 발티 가문의 후계자였다. 그가 어느새 사루스를 몰아내고 서고트족의 대표가 된 것이었다.
스틸리코는 냉정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말했다.
“자네가 발티 가문의 계승자인 알라리크인가.”
“그렇습니다. 알고 계셨군요.”
마음을 가라앉힌 알라리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스틸리코에 대한 의례적이라고 볼 수 있는 칭찬을 늘어놓았다.
“저도 스틸리코 장군에 대해서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반달족 출신이며, 황제의 사위이고, 바스타르네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셨죠.“
그러나, 스틸리코는 그가 치른 수많은 전투중에도 굳이 고트족과의 전투였던 바스타르네이 전투를 끄집어 낸 것에서 숨겨진 의도를 느꼈다. 게다가 반달족이라는 그의 출신까지 물고 늘어진 것은 대화에서 주도권을 쥐려는 것이 분명했다. 스틸리코는 알라리크의 생각을 더 알아낼 겸 모른척하며 물어보았다.
“자네도 바스타르네이 전투에 참전했나?”
바스타르네이 전투는 겨우 2년 전의 일이었다. 서로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싸웠던 로마인과 서고트족이 다시 한 편이 되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지난 수십년간 너무도 많이 반복되어 와서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로마군은 서고트족 뿐 아니라, 반달족, 프랑크족 등 수많은 이민족과 싸우고 화해하고를 반복했다. 그리고, 로마군의 숫자가 현저하게 줄어든 지금은 야만족과 손잡고 야만족을 토벌하지 않는 이상은 버텨낼 방법이 없었다. 그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었다.
서고트족 역시 로마제국의 용병이 되어서 돈과 식량을 벌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었다. 그들은 이해관계가 엇갈리긴 했지만 서로가 필요한 공생관계였다.
알라리크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었다.
“그렇습니다. 로마군에게 죽을 뻔 했다가 겨우 살아났죠.”
그날 유리크를 비롯해서 알라리크가 아는 사람들만 해도 수십 명이 죽었고 상당수가 포로가 되었다. 그가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이 기적이었다. 스틸리코는 알라리크의 얼굴을 스쳐가는 어두운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거 참 안됐군.”
그때 그를 죽일 수 있었다면 지금 서고트족의 반항의 주도하는 싹을 잘라버릴 수 있었을 텐데. 스틸리코는 그날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프로모투스의 원수를 갚지도, 서고트족의 반항을 억누르지도 못한 것이다.
어쨌든 지금은 서고트족의 힘을 빌려야 했다. 그는 자신의 임무와 로마제국을 위해서 개인적인 원한은 잠시 접어둘 마음이었다.
“그렇다면 로마군의 강함은 누구보다도 잘 알겠군.”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 한 말이었지만, 이번에도 알라리크는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았다.
“로마군이 강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야민족부대를 돌격대로 잘 활용하기 때문이죠.”
스틸리코는 그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왔는지 어렴풋이 눈치를 챘다. 서고트족의 몸값을 높이기 위한 거래를 하러 온 것이었다.
스틸리코는 10년전 자신을 떠올렸다. 그가 샤푸르3세를 상대로 협상을 했던 것도 저 나이 때였다. 그는 협상 상대가 페르시아제국의 황제라는 것도 상관하지 않았다. 실패라는 것을 몰랐고, 무엇이든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고 계산한 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던 나이였다.
상대가 자신이 주도해서 협상을 하려는 야심만만한 젊은이라면 쓸데없는 이야기보다는 어서 협상을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스틸리코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출정명령에 대한 대답은?”
알라리크는 정중하게 대답했다.
“지금 로마군의 급료의 50% 수준으로 올려주신다면 즉각 출정하겠습니다.”
2배를 올려달라는 말에 스틸리코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웃었다.
“설마 우리가 그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고 왔나? 거절한다면 어쩔 텐가?”
스틸리코는 자신이 단칼에 거절하면 알라리크가 40%로 낮춰주겠다거나 하는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알라리크는 꿈쩍하지 않았다.
“돌아가서 출정준비를 마치고 명령을 내리시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미 황제가 얼마나 급한 처지에 놓였는지를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저희는 급할 게 없지만, 황제께서는 시간을 끌수록 아르보가스트에게 지지기반을 단단하게 다질 시간을 주시는 것이죠. 그러니, 속히 결단하셔서 빠르게 끝내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입니다.”
“그야 그렇지. 하지만, 이미 원로원에서 예산 범위를 정해놓았기 때문에 서고트족에게 지급할 돈은 정해져 있네. 용병료 문제로 원로원의 승인을 다시 받을 수는 없어.”
스틸리코는 용병료를 올려줄 뜻이 없다는 것을 재확인했다. 알라리크는 솔깃한 제안을 했다.
”우리 서고트족 부대는 누구보다도 빨리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어차피 전쟁을 빨리 끝내면 기간이 줄어들어 지불할 돈이 줄어드니, 급료를 올려줘도 결과적으로 드는 돈의 총액은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말하자면 그와 스틸리코 둘만이 아는 일종의 이면계약을 하자는 것이었다. 급여를 인상하지만, 전쟁을 빨리 소집하고 빨리 끝내서 가능한 예산범위 안에서 맞추자는 것이었다.
로마가 지불할 돈이 비슷하다면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한 번 급여의 기준을 50%로 올려놓으면 향후에는 계속 높은 급여를 기준으로 협상을 시작해야 하니 그것은 문제였다.
알라리크는 이번에 큰 돈을 받아내려고 하기보다는, 미래의 계약을 염두에 두고 협상의 기준이 되는 액수를 크게 올려놓으려고 했다. 예산을 넘어가지 않는 범위라면 다급한 로마가 받아들일 거라는 계산으로 자신의 목을 내거는 배짱을 부린 것이었다.
또 한 가지 변수는 전쟁의 기간이었다. 빨리 끝내고 싶다고 빨리 끝내지는 것이 아니었다. 전쟁은 해봐야 아는 것이었다.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경우가 더 많으니, 빨리 끝낼 수 있을지 질질 늘어질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스틸리코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소집명령에 고분고분하게 응할 거라던 서고트족의 태도가 바뀐 것이 의아했다.
“발티 가문이 출정하지 않는다 해도 출정할 서고트족은 많이 있네.”
“제가 대표자로 온 것은 서고트족 모두 제 말을 따르기로 결의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부족도 개별적으로 이탈해서 로마와 계약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집 세고 나이많은 각 부족의 족장들이 모두 젊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니 믿을 수 없었다. 당장 아말리 가문의 사루스만 해도 불같은 성격에 만만한 자가 아니었다. 그런 그들을 휘어잡았다니, 그의 말이 사실인지 허풍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알겠네. 생각해볼 테니 일단 물러가 기다리고 있게.”
알라리크가 나가려고 할 때, 가이나스가 들어왔다. 서고트족 협상대표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온 것이었다. 가이나스는 뜻밖의 상황에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알라리크! 네가 서고트족 협상대표로 왔다고? 어떻게 된 거야?”
알라리크는 선선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가이나스! 자주 보네?”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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