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로마 포위
알라리크는 라벤나로 진군해서 황궁을 포위하고 호노리우스에게 최후통첩을 했다. 협상을 하던지 최후의 결전을 치르던지 결정을 하라고 압박했다.
호노리우스도는 협상에 임하겠다고 사자를 보냈다.
그러나, 라벤나에는 협상을 원하지 않는 자가 있었다. 사루스였다.
사루스는 알라리크에 대한 원한을 여전히 가슴에 품고 있었다. 알라리크가 땅을 얻어서 서고트 왕국을 세우고 왕이 되는 것을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알라리크가 협상을 위해서 라벤나 앞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 사루스는 기병대 300명을 이끌고 알라리크를 공격하러 나아갔다.
“협상중인데 황제폐하의 명령이 없이 교전을 벌여서는 안 됩니다.”
사루스는 말리는 부관의 멱살을 잡고 홱 밀쳤다.
“협상중이니까 싸우러 가는 거야!”
무방비상태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알라리크의 병사들은 갑작스런 기습에 무기도 들지 못하고 사루스의 칼에 쓰러졌다. 사방으로 도망치는 병사들을 말을 타고 쫒아가서 손쉽게 도륙내고 다니던 사루스는 반격하기 위해서 무장한 서고트족 군대가 달려오는 것을 보자, 말머리를 돌려 도망쳤다.
“사루스! 평화협상 중에 뭐하는 짓이냐!”
아타울프가 소리쳤다. 사루스는 자신을 쫒아오는 서고트족들에게 칼을 들어 가리키며 소리쳤다.
“내가 있는 한 알라리크는 절대로 로마와 협상할 수 없다. 알라리크에게 전해라.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네놈이 잘되는 꼴은 못 본다고.”
그리고 재빨리 도로 라벤나로 퇴각해서 성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타울프는 알라리크에게 사루스의 습격을 보고했다.
“황제가 우리의 뒤통수를 친 걸까요?”
아타울프의 물음에 알라리크는 분개하며 방안을 왔다 갔다 했다.
“황제의 뜻이던 아니던, 사루스가 라벤나에 버티고 있는 이상 협상은 안 될 거야.”
협상을 성공시키기는 어려워도 훼방 놓기는 쉬웠다. 모두를 설득해야 협상이 타결되지만, 한 사람만 반대해도 협상은 결렬되었다. 사루스가 이렇게 돌발행동으로 어깃장을 놓으면 서로 간에 신뢰가 구축되기는 어려웠다.
알라리크는 마침내 자신의 인내심이 바닥을 친 것을 느꼈다. 이탈리아로 진격한 2년 동안, 전투를 벌이지 않고 살상도 하지 않고 포위만 한 채 황제와 협상을 하고 물러가려 노력했지만, 그들은 라벤나에 틀어박혀서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로마의 원로원을 압박해서 새로운 황제를 세우기도 했지만, 변덕스러운 원로원과 로마시민들의 마음을 잡기는 어려웠고, 그들을 복종시킬 수 없었다. 그들은 약속을 지키려는 그와 달리 계속해서 기대를 배신하고 뒤통수를 쳤다.
그는 로마제국에 헛된 기대를 거는 것은 이제 그만두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자신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다고 느꼈고, 서고트족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땅을 구할 수 있을 때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을지도 몰랐다. 그는 이제 대화는 포기하고 무조건 힘으로 땅을 얻어내려고 결심했다.
“로마도 황제도 원로원도 다 필요 없어. 저런 놈들을 상대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게 아니었어.”
알라리크는 전 병력을 로마의 성벽 앞에 집결시켰다. 무기를 든 10만명의 야만족 병사들이 몰려들자, 놀란 로마시민들은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두려움에 떨었다. 포위만 하고 있던 지금까지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야만족의 눈빛은 곧 있을 전투와 약탈에 대한 기대감으로 번쩍였다. 살벌한 군기에 로마인들은 겁을 먹고 결사항전의 준비를 했다.
“로마를 점령한다.”
알라리크의 말에 병사들도 성 안의 로마인들도 놀랐다. 병사들은 기대감에, 로마인들은 공포감에 몸을 떨었다.
알라리크는 더 이상 어떤 협상도 시도하지 않았다. 로마를 약탈하고 무력으로 원하는 땅을 점령할 것이다.
로마의 성벽을 공략하려면 아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대로는 물러설 수 없었다. 로마의 모든 금을 빼앗아서 자신이 원하는 땅으로 가서 그 곳에 나라를 세울 것이다.
알라리크는 로마의 성벽 주위를 돌아보며 어디를 어떻게 공략할지 고민했다. 성벽은 튼튼하고 높았다. 게다가 성 안에는 결사적으로 항전하려는 로마군과 그들을 돕는 시민들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최소한의 피해로 로마를 점령할 수 있을까.
로데리크는 성벽 앞에 보초를 서며 성벽을 올려다보았다. 까마득한 저 성벽을 사다리를 올라가서 넘어야 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기에도 아찔한 높이였다. 올라가면서 위만 쳐다봐야지, 중간에 옆이나 아래를 보면 그대로 발이 얼어붙을 것이다. 며칠 째 보초를 서며 언제 전투가 시작될까 조마조마했다.
성 안으로 들어가도 걱정이었다. 약탈이 시작되면 동생의 가족들이 위험할 수 있었다. 먼저 동생의 집으로 달려가서 동생 가족부터 구해내야 하는데, 집이 살라리아 가도 쪽 성문 앞이라는 것밖에 몰랐다. 잘 찾아갈 수 있을지 초조했다.
“이거 너한테 온 편지 같은데? 성벽 안에서 누가 던졌어.”
동료가 돌에 묶인 편지를 가져다 주었다. 로데리크의 이름이 써 있었다.
‘비터리크가 보냈구나.’
그는 서둘러 편지를 펼쳐 읽었다.
[사흘 후 새벽에 살라리아 가도 쪽 성문을 열어 줄게. 그리로 들어와.]
그는 짧은 편지를 두 번 세 번 읽었다. 동생의 필체가 분명했다. 동생이 위험한 일을 하다가 로마군에게 붙잡히는 게 아닐까 염려되었다.
성문을 열어줄 테니 들어오라는 것은 로데리크만 들어오라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이것은 혼자만 알고 있을 내용이 아닌 듯 했다.
그는 알라리크에게 편지를 들고 달려갔다. 호위병이 그를 알라리크에게 안내했다.
“성 안으로 들어갈 방법이 있다고?”
알라리크의 물음에 그는 편지를 내밀었다.
“제 동생이 로마 성 안에 있습니다. 살라리아 가도 쪽 성문 앞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땅을 얻으면 저랑 같이 떠나기로 했거든요.”
“함정은 아니겠죠?”
아타울프가 편지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로데리크는 열심히 설명했다.
“제 동생 비터리크 입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저랑 같이 예전에 성에 깃발도 꽂았습니다. 알라리크 왕께서 저희한테 직접 상도 주셨습니다. 그게 벌써 15년 전 일이네요.”
알라리크는 그들을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성 안에 그에게 호의적인 야만족 노예들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성 안에 백 명이라도 들어갈 수만 있다면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다. 성 밖으로 도로 밀려나온다 해도, 충분히 시도해볼 만한 모험이었다.
“일단 들어가 보자.”
서고트족에게 군장을 갖추고 집결하도록 했다. 10만 명의 병사들을 나눠서 12개의 성문 앞에 배치했다.
“아피아 가도 쪽 성문 앞에 5천명을 배치해. 성문이 열리면 일부는 성벽 위의 병사들을 처리하고 나머지는 쭉 직진해서 원로원 의사당 건물을 점거한다. 플라미니아 성문 앞의 4천명은 들어가서 도시 안쪽 성채를 점령해.”
알라리크는 그들 각각에게 성문에서 가까운 주요 거점을 확보하고 구역을 장악하도록 미션을 할당했다.
“나머지는 살라리아 가도 앞에서 나하고 대기한다. 모든 광장과 성문을 봉쇄하고 임무를 완수하면 중앙 광장으로 전령을 보내서 보고하도록.”
알라리크는 병사들에게 돌아다니며 두 가지를 명심하도록 지시했다.
“저항하지 않는 자는 죽이지 말라.”
이미 서고트족과 로마군은 불문율처럼 지켜지고 있는 사항이지만, 그의 군대에는 다른 야만족도 섞여 있었다.
“교회는 성스러운 곳이니, 약탈하지 말고 존중하라.”
마찬가지로 서고트족과 로마군에게는 말할 필요 없지만, 군대에는 나중에 합류한 이교도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
병사들은 알라리크의 말에 로마의 약탈이 곧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기원전 390년, 켈트족이 로마 시내로 공격해 들어온 이래, 로마를 공격해서 침입하는 데 성공한 외적은 없었다. 그런데, 알라리크가 지금 그 일을 해내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하는 일의 역사적 의미를 잘 알지는 못했지만, 엄청난 일이 벌어질 거라는 느낌에 심장이 고동쳤다.
해가 저물고 밤이 깊어가도록 공격명령은 내려지지 않았고,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무장을 한 채 어둠 속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무언가가 일어나기를 막연하게 기다렸다.
알라리크도 아타울프도 살라리아 가도에 서서 과연 성문이 열릴까 반신반의하며 침이 마르도록 초조하게 닫혀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비터리크는 살라리아 가도 쪽 성문을 통해 지나다녀서 문지기들을 잘 알았다. 밤이 깊어 인적이 뜸해지자, 그는 포도주를 사가지고 문지기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성벽 바깥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야만족들이 또 지난번처럼 식량 공급을 막을 건가봐?”
“그러게 말이야. 포도주 먹어 본지가 까마득해.”
서고트족의 공격이 있기 전에는 시민들에게 무료로 밀가루와 포도주를 배급하고 축제기간에는 돼지고기도 나눠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것은 먼 옛날의 이야기였다. 시민들은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수입이 반으로 줄었다.
국가에서 배고픔을 구제해주기를 기대할 수 없었다. 사치스러운 음식은 고사하고 그들이 늘상 먹던 빵과 포도주만이라도 끼니를 거르지 않고 먹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들은 인기척에 대화를 멈추고 다가온 그림자에 긴장하며 소리쳤다.
“누구냐!”
비터리크는 포도주가 가득 담긴 통을 짊어지고 다가갔다.
“접니다. 잘 지내셨죠?”
그들은 얼굴을 아는 비터리크를 보고 무기를 내렸다.
“이 밤에 왠 일이야?”
“주인님께서 포도주를 가져다 드리라고 해서 왔습니다.”
“뭐? 포도주를? 왜?”
그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난번에 밤늦게 요리 재료를 들여올 때 통과시켜주신 것 때문에 감사하다고요. 그때 통과를 안 시켜주셨으면 만찬에 메인 요리를 못 낼 뻔 했습니다.”
“아, 그거야 뭐. 우리끼리 뭘 그런 거 가지고.”
그러면서도 그들은 진동하는 포도주 냄새에 군침을 흘리며 포도주통을 둘러쌌다. 희석한 포도주를 물처럼 마시는 로마인들에게 포도주가 없이 지내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아니, 이렇게 많이?”
“포위되기 전에 포도주를 구하기 어려워질 걸 알고 미리 포도주를 잔뜩 창고에 사 놓으셨거든요.”
“그래?”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맛있게들 드십시오.”
비터리크는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병사들은 포도주통을 받아들었다. 달달하고 톡 쏘는 포도주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와, 냄새 죽이는데?”
“한잔만 하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물에 희석시키지도 않고 독한 포도주를 통째로 들고 마시기 시작했다. 통이 비워질 때까지 술을 들이켰다. 누가 보기 전에, 혹시라도 상관이 순찰하러 오기 전에 빨리 마셔버리려는 것이었다.
포도주통을 다 비운 그들은 이내 바닥에 여기저기 쓰러져서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러자, 돌아간 줄 알았던 비터리크가 그늘에서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조심조심 성문으로 다가가서 성문을 막은 무거운 빗장을 어깨에 걸치고 위로 들어올렸다. 양 손으로 두꺼운 문을 밀자, 삐거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문이 열렸다. 문지기들은 여전히 잠든 채였다.
로데리크는 살라리아 가도 성문 맨 앞에 서 있었다.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귀를 쫑긋 세웠다.
새벽이 다가오도록 꼼짝 않던 성문 안에서 덜그덕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심장 소리가 그 소리만큼 크게 들렸다.
문이 끼익거리며 열리자,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동생 비터리크였다.
“형!”
“비터리크!”
그들은 달려가서 얼싸 안았다.
“고생 많았다.”
로데리크는 눈물을 글썽이며 동생과 그를 따라 나온 가족들의 등을 두드렸다.
알라리크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감사 인사를 했다.
“고맙다. 너희들의 공이 크구나.”
“이쪽으로 오십시오. 제가 길을 안내하겠습니다.”
비터리크는 다른 성문으로 가는 길도 안내하겠다고 나섰다.
“가자!”
알라리크는 병사들을 이끌고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서고트족 병사들이 조용히 줄지어 로마로 달려 들어갔다.
800년 동안 적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던 난공불락의 로마에 정복자가 발을 들여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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