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
스틸리코는 용병료 협상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알프스의 에모나에 진을 친 알라리크를 찾아갔다.
“동로마 속주 땅을 얻어내지 못해서 실망했나?”
알라리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 솔직히 말하면 동로마에서 온갖 술수를 써서 비열하게 나올 거라고 예상했어. 그렇더라도 끝까지 밀어붙일 줄 알았는데.”
스틸리코가 알라리크에게 약간이라도 언질을 주었더라면, 그대로 콘스탄티노플은 서고트족에게 점령되었을 수도 있었다. 스틸리코는 알라리크를 이용해서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동로마 황제를 제거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스틸리코는 그런 천금 같은 기회를 활용하지 않았다.
“이 기회에 아르카디우스를 폐하고 네가 동로마 황제가 되었다면, 동서로마의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스틸리코가 동로마의 황제가 되면 동서로마를 하나로 묶는 것도 가능하고, 동로마의 세금으로 군대를 일으켜서 게르만 부족들에게 유화책과 강경책을 적절히 활용해서 정착할 땅을 주고 평화를 이끌어내는 것도 수월하게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무능한 황제를 몰아내는 것이 로마인과 야만족 모두를 위해서 좋은 길인데 왜 그것을 하지 않는지 의문이었다.
“나는 선황제께 두 아들의 후견인이 되어서, 그들을 내 아들처럼 보호하겠다고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어.”
스틸리코의 말에 알라리크는 빈정 상해서 투덜거렸다.
“아, 그렇게 독실한 분이 부활절에 우리를 공격하셨단 말이지?”
모순을 지적하는 알라리크의 말에 스틸리코는 쓴웃음을 지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오늘날의 그를 있게 해준 사람이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평범한 야만족 청년을 로마제국의 일인자로 만들어준 은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입은 은혜를 배신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알라리크는 스틸리코가 자신의 가족을 돌려보내준 순간 그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다고 느꼈던 것처럼, 스틸리코 역시 테오도시우스에게 그런 보은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었다.
“갈리아 얘기를 해볼까.”
알라리크는 라다가이수스가 쳐들어왔을 때 중립을 지키며 동고트족에 합류하지 않도록 서고트족을 붙잡고 있었다. 야만족이 갈리아로 넘어왔을 때도 동요하지 않고 스틸리코가 지시한 대로 동로마로 출정했다가 돌아왔다. 차근차근 스틸리코에게 빚진 은혜를 갚아나갔다.
그에 비해서 스틸리코는 서고트족에게 어떤 대가를 돌려주지 못했다. 이제는 로마의 편에 선 보상을 그들의 손에 확실히 쥐어줘야 할 때였다.
서고트족이 필요로 하는 것은 결국 땅과 돈이었다.
“갈리아의 콘스탄티누스를 몰아내고, 로마인이 살지 않는 곳을 서고트족의 정착지로 받는 게 어때?”
서로마에도 로마군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지역이 많이 있었다. 라에티아와 노리쿰, 갈리아에는 야만족이 휩쓸고 지나가서 아무도 살지 않고 폐허가 된 지역이 있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
알라리크는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땅을 받으려면 협상을 해야 하니 시일이 걸릴 것이다. 그보다 당장 전투를 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반년 넘게 동로마의 테살리아까지 다녀오는 동안 야만족 보조군을 고용하고 군량과 소모품을 사느라 일리리쿰 군단 예산의 상당부분을 소진했다.
“갈리아로 가려면 용병료와 출정비가 필요해.”
스틸리코는 이전에도 야만족에게 용병료를 지급하기 위해서 원로원의 의결을 이끌어 낸 경험이 있었다. 아르보가스트도, 길도도 공공의 적으로 선언해서 특별 세금을 걷었다.
“콘스탄티누스를 공공의 적으로 선언해서 재원을 마련할 거니까, 그걸로 충당하면 돼.”
그들은 서고트족에게 필요한 이런저런 비용과 용병료를 따져보고 원로원이 지출할 수 있는 자금의 여유를 고려해서 금 4천 리브라에 합의했다. 서고트족이 만족할 만한 큰 액수였고, 600명의 원로원 의원들이 조금씩 추렴하면 충분히 마련할 수 있는 액수였다.
“왜 하필 금으로 달라는 거야?”
많은 병사들에게 급여로 나눠주려면 은이 편할 텐데 굳이 금으로 달라는 이유가 궁금했다. 알라리크는 생각하는 바가 있었다.
“정착할 곳이 정해지면 금으로 땅을 살 거야. 로마법대로 돈을 주고 땅을 사면 로마인들도 뭐라고 못하겠지.”
로마인들은 야만족에게 영토를 주는 것을 굴욕적으로 여겼다. 그런 그들의 감정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땅을 얻으려면 로마인들의 방식대로 돈을 주고 정식으로 땅을 사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여겼다.
피땀 흘려서 번 용병료를 다시 로마인에게 주고 땅을 사겠다고 할 정도로 알라리크는 절실하게 땅을 원했다.
알라리크는 머뭇거리며 이마를 문질렀다.
“그런데 황제와 원로원이 내 제안을 받아들일까? 황제는 나한테 죽을 뻔해서 감정이 좋지 않을 텐데. 원로원 의원들도 나를 싫어할걸.”
알라리크도 감이 있었다. 모든 사람이 그를 좋아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저 사람과는 마음이 통해서 믿고 손을 잡을 수 있겠다, 저 사람은 믿을 수는 없어도 협력할 수는 있겠다, 저 사람은 나를 미워해서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싸우는 수밖에 없겠다는 느낌이 왔다.
스틸리코나 가이나스가 첫 번째 부류라면, 루피누스와 에우트로피우스는 두 번째이고, 사루스와 로마황궁 사람들, 원로원 의원들은 세 번째 부류였다.
자신의 이익보다는 마땅히 해야하는 일을 하려는 책임감을 가진 사람들이 첫 번째 부류, 자신의 탐욕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두 번째 부류라면, 세 번째 부류는 자신의 자존심만을 생각하고 자신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거만한 부류였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절대 인정하지 않고 상대를 짓밟고 말살하려고 했다.
자존심 센 서로마 원로원이 이탈리아를 공격한 자신을 순순히 같은 편으로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스틸리코는 자신이 서로마 황실과 원로원을 통제하기 때문에 충분히 설득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이미 서고트족은 로마의 아미쿠스야. 너는 호노리우스 황제가 임명했고.”
그렇다고는 해도 야만족으로서 차별을 뼈저리게 느껴온 알라리크는 로마인의 감정이 썩 좋지는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
“서고트족이 갈리아로 진군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걸.”
스틸리코는 그의 지나친 염려라고 여겼다.
“어째서? 네가 다키아를 영유하려고 진군할 때도 서로마 원로원은 반발이 없었어.”
“그건 동로마 땅이지. 갈리아는 서로마 영토잖아.”
그 우려는 일리 있었다. 알라리크가 동로마로 진군할 때 서로마의 여론이 나쁘지 않았던 것은, 결과적으로 서로마 영토가 넓어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경쟁자인 동로마와 위협적인 서고트족이 서로 싸우니,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흥미로워 한 것이었다. 그런데 서고트족이 서로마의 속주인 갈리아로 들어간다면 이야기가 다를 것이다.
“지금 갈리아에는 반란군과 야만족 수십 만 명이 약탈하며 돌아다니고 있어. 그들을 몰아내준다면 좋은 일이지 싫어할 이유가 있을까? 원로원도 달리 대안이 없다는 걸 깨달을 거야.”
스틸리코는 합리적으로 생각했지만, 원로원이 그처럼 합리적으로 판단할지는 의문이었다. 알라리크는 사람은 논리보다는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라리크는 황제에게 최대한 정중하게 협상을 제안하는 편지를 썼다.
[호노리우스 황제폐하께
신, 알라리크는 로마의 아미쿠스이며 호노리우스 황제를 섬기는 미천한 병사입니다.
저는 일리리쿰 군사령관으로 복무하며 황제페하의 명에 따라 서고트족과 함께 동로마의 다키아와 모에시아를 관할하기 위해서 출정했다가 돌아온 바가 있습니다.
작년에는 판노니아에 침입한 반달족을 물리쳤습니다. 그 이전에도 도나우강의 야만족이 쳐들어 올 때마다 수없이 이를 격퇴했습니다.
저와 서고트족은 수년간 로마제국과 황제폐하를 위해서 성심을 다해 노력했지만, 여전히 야만족으로서 로마제국에 정착을 허락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로마에는 공을 세운 이민족에게 로마시민권을 부여하는 전통이 있으니 마땅히 속주민으로서 영유권을 인정받아야 했음에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로마의 아미쿠스로서 열심히 노력했지만, 아직도 황제폐하와 로마인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적인 콘스탄티누스를 정벌함으로써 저희의 충성심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황제폐하, 저희로 하여금 갈리아로 출정해서 반역자 콘스탄티누스를 제거하도록 명을 내려주십시오. 금4천리브라의 비용이면 충분히 반역자와 그들의 뿌리까지 뽑고 갈리아를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를 물리친 후에는 갈리아에 로마인이 버려둔 땅에 서고트족이 정착해서 속주민으로서 황제폐하를 칭송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정착을 허락해주시지 않으면 저희는 살 곳을 찾아서 또 다시 떠돌아다니는 처지가 될 것이고, 그것은 저희뿐 아니라 로마인들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부디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지혜로운 결단을 내려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황제폐하의 충신 알라리크]
“이 정도면 원로원의 마음에 들까?”
스틸리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빨리 갈리아와 히스파니아를 회복해야 해. 콘스탄티누스에게로 돈이 몰리기 시작하면 점점 더 제거하기 어려워 질 거야.”
알라리크도 속주에서 걷히는 세금으로 유지되는 로마제국이 위기임을 알고 있었다.
“이미 갈리아에 들어온 야만족은 어쩔 거야?”
갈리아에 들어온 야만족은 곳곳에 눌러 앉아서 살고 있었다. 처음에는 약탈을 하며 이동했지만, 이제는 한 지역에 눌러앉아서 왕처럼 지역을 지배하고 다스리기도 했다. 속주민들도 체념하고 그들의 통치를 받아들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제거한다 쳐도 갈리아 곳곳에 퍼진 수십 만 명의 야만족은 몰아내는 것은 몇 년이 걸릴지 몰랐다.
“콘스탄티누스를 몰아내고 히스파니아와 갈리아가 황제에게 돌아오면 야만족을 물리치는 것은 시간문제야.”
스틸리코는 로마가 스스로 내분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야만족을 이겨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여겼다.
“한니발이 로마를 멸망시킬 것처럼 보였지만, 로마는 20년이 넘게 많은 장군과 병사들이 죽어가면서 시행착오를 거쳐서 한니발을 이겨냈어. 이번에도 로마는 이겨낼 길을 찾아낼 거야. 내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이라도 말이지.”
스틸리코는 희망을 잃지 않았지만, 알라리크는 비관적으로 중얼거렸다.
“로마는 길을 찾아내는 방법을 잊어버린 거 같아. 달라지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아. 내가 이기는 패에 돈을 걸었는지 모르겠어. 나 혼자면 모르겠지만, 서고트족 전체를 이끌어야 하는 입장에서 지는 편에 서면 안 되니까.”
“어려운 때일수록 동맹이 되어주면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지. 지금 같은 어려운 상황이 아니라면 서고트족이 로마에게서 땅을 얻어낼 수 있겠나?”
스틸리코는 흔들리는 알라리크를 안심시켰다.
“가끔은 로마도 퇴보할 때가 있어.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나라를 망친 폭군도 여럿 있었지. 하지만, 그 시기를 넘기면 항상 이전보다 더 발전해왔어.”
어두워진 하늘에 하나씩 별이 떴다. 스틸리코는 수많은 크고 작은 별들이 모여 이루어진 은하수를 올려다보았다.
“로마인들은 카이사르가 독재를 할까 두려워해서 죽였어. 로마는 퇴보하는 듯 했지만, 수십 년 후에 로마인들은 그의 방법이 옳다는 걸 깨닫고 아우구스투스를 황제로 만들었지. 로마는 한 영웅의 죽음으로 끝나는 나라가 아니라, 그 죽음을 다른 영웅을 탄생시키는 토대로 삼는 나라야. 많은 영웅들이 별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면서 이어져가는 흐름이 로마의 역사지.”
스틸리코 역시 그 별들 중 하나로 흐름을 만들고 빛을 내다 사라지려는 의지로 버티고 있었다. 그는 알라리크마저도 그 흐름 중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 끌어들이고 있었다.
스틸리코를 존경하지만 알라리크는 그 별들 중에 하나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 별무리 가운데 들어가서 역사에서 빛난다면 그것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일이겠지만, 그것은 로마의 역사였다.
알라리크는 서고트족의 역사를 만들고 싶었다. 로마보다 부족하고 미숙하겠지만, 그와 그의 동족과 그의 후손이 살아갈 길을 개척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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