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적
서고트족이 무사히 탈출했다는 소식을 들은 에우트로피우스는 다음 단계의 작전으로 넘어갔다.
그는 아르카디우스 황제에게 스틸리코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제는 얼떨떨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죄목으로?”
에우트로피우스는 낮은 목소리로 큰 비밀을 폭로하듯이 말했다.
“스틸리코는 수만 명의 서고트족을 포위하고 한 명도 잡지 못하고 다 놓쳤습니다. 그것은 스틸리코가 서고트족과 내통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황제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스틸리코가 서고트족과 내통했다? 무엇 때문에?”
에우트로피우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뻔하지 않습니까. 스틸리코는 야만족 출신입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는 황제가 되고자 하는 야망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 서고트족과 손을 잡고 제국을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을 겁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음험하게 말했다.
“스틸리코를 공공의 적으로 선포해야 합니다.”
공공의 적은 말 그대로 적이기 때문에 죽여서 없애야 하는 상대였다. 스틸리코를 죽이도록 사형선고를 내려달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스틸리코는 서고트족을 퇴치하러 먼 서로마에서부터 왔는데 설마 서고트족과 손을 잡았을까? 그가 내통했다는 증거가 있소?”
“서고트족을 한 명도 잡지 못하고 놓쳤다는 것이 바로 증거입니다. 어떻게 사방을 포위하고도 어린아이 한 명 잡지 못하고 모두 놓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일부러 놓아준 게 분명합니다.”
“그건 정말 이상하군.”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마군이 민간인 수만 명을 포위하고 하나도 못 잡았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상황이기는 했다.
에우트로피우스는 황제의 허락을 얻어서 동로마 원로원에 스틸리코를 공공의 적으로 선포하도록 설득하고 다녔다.
원칙적으로 원로원이 동의해야 공공의 적으로 선포할 수 있었다. 황제 혼자만의 의견만으로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없었다.
가이나스는 황당한 소식을 듣고 황제를 알현했다. 서고트족과의 전투중인 스틸리코를 ‘공공의 적’, 즉 반역자로 규정하고 벌한다는 것이었다. 최근에는 스틸리코와 거리를 두기는 했지만, 적과 싸우는 로마군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는 것은 같은 로마군으로서 불쾌한 일이었다. 스틸리코가 최선을 다해서 잘 싸우고 있다는 것은 같은 장군인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폐하, 스틸리코장군을 로마의 적으로 규정하자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가이나스가 화난 목소리를 억누르며 묻자, 황제를 대신해서 에우트로피우스가 대답했다.
“스틸리코 장군이 알라리크를 잡는다고 목책까지 설치하고 완벽하게 포위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를 놓쳤잖습니까. 정황상 일부러 놓아준 게 아닌가 의심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르카디아에서 승전을 했지 않습니까.”
“스틸리코의 승전은 별것 아닙니다. 야만족 몇 명을 죽인 것 뿐이지요. 적장인 알라리크를 놓쳐서 결과적으로 그가 에피루스를 약탈하게 만들었으니, 그게 다 스틸리코의 책임입니다.”
“뭐라고요?”
가이나스는 다시 분기를 참고 말했다.
“동로마군이 출정했으면 완벽하게 알라리크를 포위해서 잡을 수 있었겠지요. 그런데 동로마군이 출정을 못해서 퇴로가 뚫렸잖습니까. 알라리크를 놓친 것은 스틸리코 장군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은 우리 탓도 있는데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요?”
에우트로피우스는 그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일부 의견이니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정확한 전장의 사정을 모르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자세히 모르지요. 다만, 스틸리코 장군이 반달족 출신이다 보니 야만족에게 동정적이어서 일부러 놓아줬다 뭐 그런 말이 떠도는 모양입니다.”
로마에서 태어나서 죽 로마인으로 산 스틸리코의 혈통까지 물고 늘어지는 비열한 험담에 가이나스는 이를 악물었다. 혼혈인 스틸리코를 야만족이라고 한다면 가이나스는 당연히 야만족이라는 말이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스틸리코 장군은 내가 아는 한 가장 로마인다운 로마군인입니다. 그분의 출신을 문제 삼는 자가 있다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오.”
에우트로피우스는 가이나스의 말에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물론 가이나스 장군도 서고트족 출신이지만 훌륭한 로마군인이시죠. 야민족 출신이라고 해서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가이나스는 자신의 아픈 곳을 찌르는 에우트로피우스를 노려보고 황제에게 인사를 하고 홱 돌아서서 나갔다.
“에우트로피우스 녀석! 나를 모욕해? 가만 두지 않겠다.”
그는 입속으로 잘근잘근 곱씹으며 주먹을 쥐었다. 자신을 야만족이라고 무시하는 자들에게 언젠가는 본때를 보여주고 말겠다는 결심을 했다.
스틸리코를 공공의 적으로 선언하려는 동로마 궁정에서의 움직임은 스틸리코에게도 전해졌다. 그는 에피루스로 간 서고트족을 추격하기 위해서 준비를 하던 참이었다.
“알라리크를 일부러 놓아줬다고요? 아니, 어떻게 그런 개소리가 입에서 나올 수 있습니까?”
스틸리코의 부하들은 억울해서 펄펄 뛰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몇 달 동안 서고트족을 쫓아다니며 싸우느라 고생한 서로마군에게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적을 일부러 놓아준 반역자라고 누명을 씌우다니 눈이 돌아버릴 정도였다. 루피누스도 이정도로 대놓고 극악무도한 짓을 하지는 않았다.
다른 부하 장군들도 저마다 화를 냈다.
“이게 뭡니까. 기껏 싸워서 서고트족을 쫒아내 줬더니 사령관님을 공공의 적으로 선포한답니다. 대체 우리가 뭣 때문에 저들을 위해서 싸운 겁니까?”
“이건 동로마제국의 일에는 간섭하지 말라는 겁니다. 군대를 이끌고 동로마에 들어와서 기분 나쁘다는 뜻 아닙니까?”
“서로마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기 있어봐야 좋은 소리 못 듣습니다.”
스틸리코도 씁쓸하게 입맛을 다실 뿐 부하 장수들에게 해 줄 말이 없었다. 서고트족을 몰아내줘서 고맙다는 감사인사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자신을 반역자로 몰아갈 줄은 몰랐다.
“아프리카 정보원에게서 온 전갈입니다.”
전령이 와서 편지를 전달하고 물러갔다. 아프리카 사령관 길도가 동로마 황궁과 접촉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길도의 특사가 아르카디우스 황제를 만나서 서로마가 아니라 동로마 황제를 섬기고 싶다고 했답니다.]
‘길도가 움직이는 구나.’
스틸리코는 그의 속셈을 파악하기 위해서 생각에 잠겼다.
‘동로마의 속주가 되겠다?’
말로는 동로마의 속주가 되겠다고 하지만, 코앞의 로마를 두고 멀리 떨어져서 가는 데만도 열흘이 넘게 걸리는 콘스탄티노플의 명령을 들을 리가 없었다. 동로마 핑계를 대고 서로마와 관계를 끊은 후에 독립할 속셈일 것이다.
동로마를 섬기겠다는 것은 서로마에 내고 있는 속주세를 내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아프리카의 밀에 식량 공급을 의지하는 로마로서는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길도의 움직임을 매일 보고해.”
그는 곧 아프리카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을 직감했다. 에우트로피우스와 알라리크가 협력하는 것도 골치 아픈데 길도까지 그들에게 가세하면 더 심각한 문제였다.
더군다가 길도가 있는 아프리카에서 수도 로마까지는 배로 하루이틀 거리였다. 시칠리아섬에 상륙이라도 한다면 일이 복잡해졌다. 매일같이 로마로 밀을 실어나르는 배에 밀 대신 군사를 실어서 내려놓는다면 큰일이었다. 일단 알라리크의 기세를 꺾어놨으니 길도를 대비하기 위해 서로마로 돌아가야 했다.
“이탈리아로 돌아간다.”
스틸리코는 더 이상의 서고트족 추격을 포기하고 군대를 이끌고 서로마로 돌아갔다.
길도에 대한 대비도 해야 했고, 이대로 동로마에 머물러 있다가 그가 공공의 적으로 선포되면 결국 동로마군과 서로마군의 내전을 피할 수 없었다.
에우트로피우스는 황제로 하여금 동로마제국 내에 있는 스틸리코의 재산을 몰수하도록 했다.
“서로마군이 그리스에서 약탈을 했으니 우리도 동로마에 있는 스틸리코의 재산을 몰수해서 그들에게 피해를 보상해줘야 합니다.”
동로마에 있는 스틸리코의 재산은 몰수되었지만, 그리스 사람들이 보상을 받지는 못했다. 그 재산이 어디로 갔는지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서로마 수도 로마로 돌아온 스틸리코는 원로원에 전쟁 경과를 보고하기 위해서 출석했다. 원로원에는 무기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었다. 그는 무기를 지니지 않은 채 갑옷 대신 원로원 예복인 하얀 토가를 입고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로마 시내를 지나서 원로원 앞에 멈췄다.
스틸리코는 마차에서 내려서 원로원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 야채 바구니를 어깨에 짊어진 사람이 다가왔다. 바구니에 가려서 앞이 안 보이는지 부딪칠 것처럼 다가왔다. 그가 먼저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잠시 서 있는데, 갑자기 그가 바구니에서 칼을 꺼내더니 스틸리코에게 돌진했다.
날카로운 칼이 스틸리코의 복부를 향해 날아왔다. 스틸리코는 재빨리 옆으로 몸을 틀어 칼날을 피했다. 칼은 스틸리코의 팔과 몸 사이의 빈 공간에 늘어진 천을 찌르며 지나갔다. 토가가 찢어지며 갈라져 펄럭였다. 스틸리코는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칼을 잡은 손목을 잡아채서 꽉 비틀었다.
“악!”
자객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칼을 떨어뜨리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대낮에 길거리에서 일어난 칼부림에 주위의 사람들이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마차에 있던 스틸리코의 호위병이 달려왔다.
“누가 시킨 짓이냐?”
스틸리코는 그가 대답하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동로마 황궁에서 보낸 자객이 틀림없었다. 자객은 대답 없이 끙끙거리기만 했다.
스틸리코는 자객을 호위병에게 데려가라고 넘겼다.
“누가 시켰는지 자백하도록 고문할까요?”
호위대장의 물음에 스틸리코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
동로마에서 꼬리를 밟히도록 허술하게 일을 꾸몄을 리가 없었다. 설령 밝힐 수 있다 해도 서로마에서 동로마에게 주모자를 처벌하라고 요구할 수도 없었다. 만약 동로마 황실이 관련되어 있다고 드러나면 그로 인해서 동서로마의 갈등이 격화될 수도 있었다. 스틸리코는 그런 상황을 원치 않았다.
에우트로피우스는 몇 번이나 더 자객을 보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스틸리코의 주위에는 항상 호위병들이 붙어다녔고, 스틸리코 자신도 뛰어난 무관이어서 소용이 없었다.
“동로마로 자객을 보내서 에우트로피우스를 없애십시오.”
반복되는 암살시도에 스틸리코의 부하들은 그들도 자객을 보내고 제의했다. 스틸리코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행동의 기준은 이것이 로마제국에 이익이 되는가였다. 그가 에우트로피우스를 암살한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루피누스가 죽자 에우트로피우스가 정권을 잡은 것처럼, 에우트로피우스가 죽으면 또 다른 자가 나타나서 정권을 잡고 그처럼 휘두를 것이다. 에우트로피우스를 암살하면 동로마와 서로마의 갈등만 격화시킬 것이다.
동로마에는 원로원도 있고 가이나스도 있으니, 아르카디우스 황제가 좀 더 철이 들면 상황이 나아질 거라고 믿었다.
길도가 동로마 황궁과 접촉하며 동서로마를 갈라놓는 이때에, 가능하면 황제와 황궁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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