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시우스 황제
“어서 오게. 이리 앉지.”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스틸리코의 가족들에게 앉기를 권했다. 커다란 대리석 식탁에는 이미 새콤한 과일과 음료 등 입맛을 돋우는 전채들이 차려져 있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스틸리코는 황제의 두 아들들에게 인사를 했다. 첫째 아르카디우스는 16살, 둘째 호노리우스는 8살이었다. 아르카디우스는 고개만 까딱했고, 호노리우스는 부끄러운 듯이 외면했다.
“셀레나, 오랜만이구나. 내가 바빠서 통 볼 시간이 없구나.”
황제는 양녀로 삼은 조카딸 셀레나를 보고 반가워했다. 셀레나도 활짝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를 포옹했다.
“건강은 좀 어떠세요? 이젠 연세도 있으시니 무리하지 마세요.”
친딸이 없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와 혈연을 맺으려면 조카딸 셀레나와 혼인을 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었다. 어여쁘고 지적이고 성품마저 훌륭한 셀레나를 신부로 얻기 위해서 많은 로마의 유력 가문이 혼인을 제의했지만, 황제는 이를 물리쳐왔다.
그런데, 황제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셀레나의 남편감으로 선택한 것은 아무런 배경도 없는 야만족 스틸리코였다. 파격적인 혼사에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 게다가 혼인을 시키기 전에 조카였던 셀레나를 자신의 양녀로 입적해서 셀레나와 스틸리코의 신분을 상승시켜주었다. 스틸리코는 그렇게 갑작스럽게 야만족 병사에서 황제의 사위이자, 황자 2명에 이어서 황제 계승 서열 3위로 신분이 수직상승하게 되었다.
셀레나는 신앙심이 깊은 조신한 여인이었기 때문에 결혼 전이나 후나 결혼에 대해서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스틸리코도 과묵한 남자였기 때문에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스틸리코가 멀리 자주 원정을 다니면서도 그들 사이에서 차례로 태어난 3명이 자녀는 그들이 금슬이 좋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들 에우케리우스와 딸 마리아와 테르만티아가 그들이었다.
모두가 자리에 앉자 다시 새로운 요리가 나왔다. 이번에는 포도주에 절인 송로버섯과 송아지고기였다.
“아르카디우스, 내가 없는 동안 동로마제국을 다스려보니 어떻더냐?”
황제는 전쟁을 하러 다니는 동안 큰아들 아르카디우스에게 동로마를 다스리도록 맡겨놓았다.
“루피누스가 알아서 잘 하니까 별 어려움은 없었어요.”
아르카디우스는 아버지의 질문에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고기 토막을 큼지막하게 잘라서 입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시종에게 투덜거렸다.
“고기가 너무 식었어. 스프는 너무 뜨겁고.”
아직 어린데다 황궁에서 곱게 황자로 커 온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는 아버지의 기대에는 한참 부족한 아들들이었다.
황제는 한숨을 쉬며 천방지축인 큰아들을 타일렀다.
“루피누스에게만 일을 맡겨놓으면 사람들이 너보다 루피누스를 따르게 된다. 네가 직접 정무를 돌봐야 해.”
아르카디우스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루피누스가 워낙 잘하니까 내가 손대면 오히려 일이 꼬여요. 전에도 내가 뭘 하려고 했더니 그러면 밀값이 올라서 폭동이 일어날 거라느니 뭐라 해서 귀찮아서 알아서 하라고 했어요.”
루피누스는 교묘하게 아르카디우스가 국정에 손대지 못하도록 밀어내고 있었다.
“솔직히 무슨 말인지도 못 알아듣겠어요. 세무가 워낙 계산이 복잡해서 숫자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머리가 빠개질 것 같아요.”
황제는 쯧쯧 혀를 찼다.
“그러면 차라리 나와 함께 전장에 나가겠느냐? 너도 이젠 전쟁에 참여할 나이가 됐어. 전쟁을 겪어봐야 장군들을 다스릴 수 있다.”
아르카디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황궁을 떠나기 싫어요. 저는 그냥 여기에 있을래요.”
순전히 능력 하나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테오도시우스는 자신의 가신들 역시 무조건 실력위주로 선발했다. 사람들의 재산을 갈취한다고 욕을 먹는 루피누스나 야만족출신인 스틸리코를 중용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자신의 아들들에게만은 그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는 둘째아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호노리우스, 너는 황제가 되면 제국을 어떻게 다스릴 생각이냐?”
자유분방한 형과 달리 둘째인 호노리우스는 겁이 많고 소심했다. 그는 대답 없이 난처한 듯이 접시에 코를 박을 듯이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그래, 아직 어리니 잘 모르겠지.”
자신이 죽는다면 철없는 두 형제들은 스틸리코의 경쟁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었다. 30대 중반 한창 나이에 로마군 최고 사령관 자리에 앉아있는 스틸리코가 마음만 먹는다면 두 황자를 없애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테오도시우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황제는 가족간의 화목과 우애를 강조하며 그들을 한 가족으로 묶어두려고 애썼다. 다행히도 스틸리코는 자신을 최고의 자리에 발탁해준 황제의 은혜에 감사하며, 지금까지는 다른 마음을 먹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먼저 일어날게요.”
식사를 마치자 아르카디우스는 무심하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휙 나가버렸다. 호노리우스도 졸리다 핑계를 대며 자리를 떠났다.
테오도시우스는 다른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발코니로 자리를 옮겨서 사위와 단 둘이 술잔을 기울였다. 밤이 깊어가며 풀벌레가 울었다. 유리잔에서 풍기는 그윽한 포도주 향과 정원에서 불어오는 꽃향기에 마시지 않아도 취할 것 같았다.
“내가 동로마 황제가 된 건 31살 때였지.”
테오도시우스는 먼 옛날을 회고하며 눈을 감았다.
“내 아버지는 아프리카의 반란을 토벌한 공을 세운 기병장관이었어. 그런데 내가 29살 때, 아버지에게 앙심을 품은 정적이 아버지에게 누명을 씌웠지. 아버지가 적과 내통했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였어.”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황족과는 관련이 없는 평범한 로마군 집안 출신이었다.
“당시 막 즉위해서 16살에 불과했던 그라티아누스 황제는 무슨 일이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했어. 몰랐을 수도 있고 어쩌면 알면서도 내 아버지가 반란을 일으킬까봐 두려워서 그랬을 수도 있지. 어쨌든 아버지에게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곧바로 사형에 처했어. 그러니 나도 까딱했으면 반역죄로 얽혀서 죽다 살아난 거였어.”
황제는 눈을 뜨고 포도주로 입술을 축였다.
“난 살아남기 위해서 그림자처럼 몸을 낮추고 숨어서 죽은 듯이 2년간을 지냈어. 남들 눈에 띄지 않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게 조심했지. 그런데, 어느 날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보낸 사람들이 나를 찾아 온 거야. 내가 무슨 생각을 했겠나?”
스틸리코는 황제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 했다.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셨겠죠.”
“그래, 맞아. 난 이제 사형에 처해지는 건가 각오하고 황제의 사신을 따라갔지. 황제에게 데려간다는 건 핑계고, 어디 외진 곳으로 데려가서 목을 치겠지 생각했는데, 정말로 황궁으로 마차가 들어가더군.”
황제는 파란만장한 예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방에서 기다리는데 갑자기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들어오더니, 나보고 뭐라는지 아나?”
“뭐라고 했는데요?”
“동로마의 황제가 되라고 하는 거야.”
“완전히 인생 역전이셨군요.“
황제는 뭔가가 생각났는지 껄껄 웃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내가 뭐라고 했는지 아나?”
“뭐라고 하셨는데요?”
“싫다고 했어.”
“네?”
“반역죄로 처형된 내 아버지의 명예를 복원해주지 않으면 황제가 되지 않겠다고 했어.”
스틸리코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풉 웃음을 터뜨렸다. 반역자의 아들인 주제에 동로마황제가 되라는 서로마황제의 명을 거역하다니, 과연 배짱있는 테오도시우스 황제다운 태도였다.
“그건 아버지에 대한 억울한 감정만으로 요구한 건 아니야. 반역자의 아들이 황제가 될 수는 없지. 누가 반역자 아들의 명령을 듣겠나. 나 자신을 위해서 한 것이기도 했어.”
그제야 스틸리코는 테오도시우스의 태도가 이해가 갔다. 단순히 자존심만으로 아버지의 반역죄를 철회해달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명예와 권위를 복권시키는 것은 황제의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조치였다.
“내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키려면 그라티아누스 황제는 자신이 내렸던 반역죄의 판결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해야만 했어. 황제로서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 잘못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동로마 황제로 임명할 수도 있었어.”
“황제께서도 고민스러우셨겠군요.”
“그래. 그런데 황제는 잠시 생각하더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아버지의 명예를 복원시켜주겠다고 했어. 그리고 나서 나를 황제로 임명했지.”
신앙에 깊이 빠진 그라티아누스 황제는 정치에는 무관심했지만, 사람 보는 눈은 정확했다. 그가 임명한 테오도시우스는 동로마 황제가 되어서 로마제국을 쳐들어온 외적과 내란을 이겨내고 든든하게 지켜냈다.
“나는 동로마 황제가 된 이후에도 최선을 다해서 서로마 황제들을 보필했어. 막시무스가 반란을 일으켜서 서로마를 공격했을 때 동로마군을 이끌고 가서 그를 죽이고 서로마 영토를 회복했지. 하지만, 그 영토를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고스란히 발렌티니아누스 2세에게 돌려줬어. 서로마의 영토에 욕심내지 않았지.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인정하고 반역자의 아들이었던 나를 황제로 만들어준 그라티아누스 황제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스틸리코는 황제가 그런 말을 자신에게 하는 의도를 짐작했다. 황제의 자리나 영토에 욕심내기 보다는 선황제의 아들들을 잘 보필하고 로마제국을 위해 일하라는 말이었다. 스틸리코가 황제의 자리를 탐해서 자신의 아들들을 몰아내거나 죽이지 않도록 하려는 뜻이었다.
“그리고는 자네가 아는 바대로 그라티아누스 황제와 발렌티니아누스 2세 모두 후사가 없이 죽었고, 지금은 내가 동서로마를 모두 다스리고 있지.”
그렇게 하다보면 뜻하지 않은 행운이 따라올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하지만, 스틸리코는 전혀 황제의 자리에 욕심내지 않고 있었다. 그는 지금 누리고 있는 지위도 과분하다고 생각했다. 황제의 아들들을 보필해서 로마제국의 영광을 지속시켜나가는 것만이 그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경우처럼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가 그보다 일찍 죽는 경우가 생긴다면, 자연스럽게 그에게 황제의 자리가 돌아올 것이었다. 그러나, 스틸리코는 그런 마음은 전혀 품지 않았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는 신의 뜻이고 인간은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일생을 돌아보면 가끔은 후회되는 일도 있지만, 결국은 내 뜻대로 모든 일들을 매듭지어왔네. 그런데 뜻대로 안 되는 유일한 것이 자식들이더군. 내 마음 같지 않아.”
스틸리코는 황제의 탄식에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부모에게는 어떤 자식이든 부족함이 먼저 눈에 띄지요. 저도 제 아들 에우케리우스를 보면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에우케리우스는 착한 아들이었지만, 스틸리코의 눈에는 그저 평범해보였다. 로마제국 전역에서 내노라 하는 능력있는 젊은이들이 황제의 눈에 띄기 위해 황궁 위해서 몰려드니 더욱 비교가 되곤 했다. 아마 황제도 같은 마음일 것이었다.
“그래도 에우케리우스는 성실하잖아. 아르카디우스는 끈기가 없어.”
황제는 시름이 깊은 얼굴로 혼잣말을 했다.
“아르카디우스도 이제 16살이야. 철이 들 때도 됐는데.”
고개를 돌려 스틸리코를 쳐다보았다.
“내가 자네를 처음 봤을 때 나이와 비슷하지. 그때 자네는 벌써 웬만한 장군 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는데 말이야.”
스틸리코는 청소년을 장교로 양성하는 군사학교를 나와서 16살부터 황제의 기병대장이었던 아버지를 따라서 전투에 출전했다. 아버지의 경험과 로마제국의 역사에 녹아있는 전술들을 흡수해서 어린 나이에도 늠름하게 기병대에 참여해서 지휘를 하고 있었다. 황제는 앳된 소년병사였던 그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인데도 페르시아의 샤푸르 3세와 당당하게 협상도 해냈지.”
스틸리코는 겸손하게 대답했다.
“그건 좀 더 나이가 들었을 때입니다. 21살 때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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