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티 가문
서고트족의 발티 가문의 혈족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그동안 발티 가를 이끌었던 수장이 별세해서 가문의 모든 성인 남성들이 새로운 수장을 뽑기 위해서 모인 것이었다.
알라리크와 그의 친구인 아타울프, 유리크의 형제들도 모두 발티 가문이었다. 서고트족은 2년 전에 바스타르네이 전투에서 많은 남자들이 죽거나 포로로 끌려가서, 나이가 아주 젊거나 아주 많은 남자들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잘 있었어? 애가 아프다더니 좀 나았어?”
“돼지가 새끼를 낳았다면서? 잘 크고 있어?”
“우리 집에서 만든 치즈 먹어보니 어때? 맛이 괜찮지?”
그들은 매일 마을에서 마주치며 보는 사이였다. 그런데도 오랜 만에 만난 것처럼 서로 반갑게 등을 두드리고 인사를 나누며 자리에 앉았다.
모두 모이자 긴 수염을 기른 가장 나이 많은 노인이 일어나서 말했다.
“발티 가문의 수장을 뽑기 전에 먼저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발티 가문이 잘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며칠 동안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도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그는 십여 년 전 서고트족이 처음 로마제국의 영토로 들어와서 로마제국과 몇 년의 전투 끝에 정착하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아 온 노인이었다. 얼굴에 난 깊은 상처는 그가 겪은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우선 나는 수장을 맡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었습니다.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도 모두 나이가 너무 많거나 젊은 사람들 뿐입니다.”
그는 자신과 같은 노인들을 둘러보았다. 그들도 손이 한 쪽 잘려나갔거나, 화살에 맞은 상처가 있거나, 전투중에 입은 상처의 후유증으로 절룩거리는 등 수많은 전투 속에서 살아남은 노병들이 대부분이었다.
“몇 년에 한 번씩 큰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전쟁을 이끌려면 아무래도 노인보다는 젊은이가 낫습니다. 또한 로마 제국과 협상을 하려고 해도 나이든 사람들 보다는 라틴어에 능숙한 젊은이가 수장을 맡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번에 우리 가문의 수장을 아예 젊은이들 중에서 뽑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내가 이야기를 나눈 몇몇 분들은 내 의견에 동의했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들 생각합니까?”
나이가 든 사람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여서 동의를 표시했다.
“그 말이 옳습니다. 정세를 바르게 판단하려면 우리보다는 라틴어도 잘하고 제국을 잘 아는 젊은이가 수장이 되는 편이 낫지요.”
“경험은 노인들이 많지만, 요즘 젊은이들이 똑똑하고 영리하니 그들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경험이야 쌓으면 되는 것이고요.”
나이를 먹어서 로마에 정착한 사람들은 로마 공용어인 라틴어에도 서툴렀고 다신교를 버리지 못하고 서고트족의 생활습관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 영지에 정착한 이후에 태어난 서고트족 젊은이들은 고트어 뿐 아니라 라틴어에도 능숙했고, 글도 읽을 줄 알았다. 젊은이들은 로마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서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팔고 기독교 교회에 다니고 군대에도 복무하고 법규도 잘 지켰다. 로마사회에 섞여 들어가서 로마의 지식을 쉼 없이 빨아들였다. 그들은 완전히 다른 세대였다.
“그럼 젊은이들 중에서 누가 수장을 맡아야 할까요?”
젊은 사람들 가운데는 유리크의 형이 가장 나이가 많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였다. 유리크의 형은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알라리크는 바스타르네이 전투에서 로마군 장수를 유인해서 죽였습니다. 저는 발티 가문의 수장으로 알라리크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발티 가문의 가훈은 용맹입니다. 알라리크는 그 정신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알라리크는 뒷줄에 앉아있었는데 갑자기 문중의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쳐다보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는 겨우 22살이었다. 그의 주위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그의 숙부나 조부 뻘 되는 친척들이었다. 그는 자신이 발티 가문의 수장이 되기에는 아직은 어린 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양했다.
“저는 나이도 어리고 아직 경험이 부족합니다. 사람들을 앞에서 이끌어야 하는 수장이 되기에는 모자랍니다.”
그러자, 아타울프가 일어나서 말했다.
“알라리크는 우리 젊은이들 중에서 가장 로마제국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라틴어 뿐만 아니라 그리스어에도 능통하고, 책도 많이 읽었습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언제나 그의 판단이 옳았습니다. 저도 알라리크가 수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젊은이도 일어나서 말했다.
“우리 형제들도 알라리크를 좋아합니다. 알라리크는 남들이 안하는 생각을 해내서, 일이든 놀이든 뭘 해도 같이 하면 재미있고 신납니다.”
젊은이들은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알라리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그가 수장이 되는 것에 이의가 없었다. 노인들은 젊은이들의 의견이 하나로 모이자, 그것을 존중했다.
“젊은이들이 모두 그렇게 판단한다면, 그것이 옳은 방향일거라고 봅니다. 우리 노인들도 알라리크가 수장이 된다면 그의 말에 따를 겁니다.”
“잠깐 그 전에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알라리크는 얼른 손을 들어서 잠시 진행을 늦추었다. 서고트족은 말을 멈추고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쳐다보았다.
“제가 수장이 되면 할 일에 대해서 미리 말씀드려야 제대로 판단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가문의 수장이 되기 전에 그가 하려고 하는 일을 정확히 말해두어야 했다. 그것은 위험한 일일 수도 있었고, 가문 전체의 운명을 걸게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또 가문구성원의 지지와 뒷받침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는 발티 가문의 이익도 중요하지만, 서고트족에 대한 로마제국의 처우가 개선되지 않으면 발티 가문이 잘 살기 어렵다고 봅니다. 로마군은 헐값에 서고트족을 병사로 동원하고 노예로 판매합니다. 로마제국에서 서고트족의 위치를 격상하지 않으면 발티 가문도 발전이 없이, 로마에 부속품으로 사용될 노동력을 공급하는 곳 밖에 안 된다고 봅니다. 제가 수장이 되면 그 부분을 개선하기 위해 집중적으로 노력할 겁니다.”
알라리크의 말에 사람들은 서로서로 얼굴을 보며 그의 말 뜻을 이해하려고 했다. 발티 가문을 잘 이끌기도 버거운 나이의 그가 어떻게 로마제국을 상대로 서고트족의 처우를 개선하려는 것인가.
알라리크는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로마제국은 서고트족을 대표하는 아말리 가문과 협상을 하고 있습니다. 아말리 가문은 로마제국의 입장만을 전달하고, 서고트족의 이익을 대표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발티 가문의 수장이 되면, 아말리 가문 대신 서고트족의 대표자가 되어 로마제국과의 협상에 나설 것입니다.”
그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에는 미묘한 불안감이 흘렀다.
로마제국은 서고트족의 대표자와 협상을 해서 농지보조금 지급이나 용병료 등을 결정했다. 지금 서고트족 대표는 가장 크고 역사가 오래 된 아말리 가문의 수장 사루스가 맡고 있었다. 그는 친 로마파로 서고트족에 대한 로마의 요구사항을 협상도 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했다. 그는 로마의 지원을 받으며 서고트족 내에서 자신의 지위를 단단히 굳혔다.
알라리크는 그를 밀어내고 자신이 서고트족 대표자가 되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겨우 22살의 그가 발티 가문의 수장이 된 것도 파격적인데 서고트족 전체를 대표하는 대표자가 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서고트족에서 가장 큰 세력인 아말리 가문은 커가는 발티 가문을 적대하고 견제하고 있었다. 그런 아말리 가문에 도전한다는 것은 발티 가문으로서도 힘겨운 싸움이 될 것이다.
노인들은 조심스럽게 반대의견을 냈다.
“굳이 아말리 가문을 자극해서 분란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요?”
“서고트족 내부에서 주도권 다툼을 하면 로마제국만 좋은 일을 시켜주는 게 아닐까요?”
노인들은 알라리크가 젊은 혈기에 아말리 가문에 도전해서 가뜩이나 발티 가문을 꼬투리 잡으려고 드는 그들에게 트집거리를 만들어주는 것은 아닐지 걱정스러워했다.
알라리크는 그들을 안심시켰다.
“아말리 가문을 적대하지 않을 겁니다. 미래를 위한 길을 찾는다면 서고트족은 자연스럽게 발티 가문을 지지할 겁니다. 서고트족의 몫을 제대로 받자는 것이지 로마제국이나 아말리 가문과 무조건 싸우자는 게 아닙니다.”
젊은이들은 서고트족을 하나로 뭉쳐서 로마제국에게 목소리를 내자는 알라리크의 주장을 지지했다.
“맞습니다. 언제까지 우리가 로마제국이 하라는 대로 따라야 합니까? 세금도 보조금도 우리 요구안을 내고 새로 협상해야 합니다.”
노인들은 우려하는 표정으로 고민에 빠졌다. 가장 나이 많은 노인이 깊은 주름이 진 이마에 눈썹을 모으며 말했다.
“어차피 우리는 살 만큼 살았소. 알라리크가 많이 고민을 한 것 같으니, 젊은이들의 삶은 젊은이들이 개척하도록 밀어줍시다.”
그러자 다른 노인들도 차츰 동의했다.
“그럽시다. 우리가 젊은이들의 삶을 대신 살아줄 건 아니잖소. 알라리크가 알아서 잘 할 거요.”
논의 끝에 마침내 발티 가문의 남자들은 알라리크를 수장으로 추대하고 지원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알라리크는 앞으로 나오시오.”
가장 나이 많은 노인은 그를 앞으로 불러냈다.
“알라리크. 발티 가문의 새로운 수장이여. 우리는 모두 그대를 따릅니다. 선조들의 영혼이 그대를 축복하고 보살필 것이오.”
노인은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발티 가문의 인장과 반지를 알라리크에게 넘겨주었다. 혈족들은 모두 가슴에 손을 얹고 그를 따를 것을 맹세했다.
“나 알라리크는 자신의 발티 가문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행동할 것이며,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히고, 가문을 번영으로 이끌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알라리크는 반지를 낀 주먹을 가슴에 대고 맹세했다. 그의 가족, 친구, 문중의 친척들을 보살피는 막중한 책임이 그의 어깨에 얹어졌다. 그는 자신의 친족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가슴에 새기듯이 쳐다보았다.
친족들은 대견스러운 표정으로 알라리크를 쳐다보았다. 아기 때부터 함께 살아온 그가 어느덧 어른이 되어서 자신이 속한 가문의 미래를 내다보고 개척하는 수장이 되다니 말로 할 수 없이 뿌듯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원로원을 소집했다. 아르보가스트를 정벌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돈이 필요했다.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특별 세금을 걷어야 했고, 동로마 원로원의 승인이 필요했다. 원로원이 아르보가스트를 ‘공공의 적’으로 선포하도록 인준해준다면, 그를 토벌하기 위한 세금을 걷을 수 있었다.
아르보가스트를 공공의 적으로 선포하지 못한다면, 특별 세금을 걷을 수 없고, 돈이 없이는 야만족 부대를 움직일 수 없었다. 적은 숫자의 로마군 병사만으로 싸워야만 했다.
스틸리코는 일찍 원로원에 출석해서 여론과 분위기를 살펴보았다. 반드시 안건을 통과시켜야 했고, 그러려면 의원들의 기분을 살펴야 했다.
눈부시게 하얀 토가로 몸을 휘감은 원로원 의원들이 어슬렁거리며 나타나서 하나둘씩 자리를 채웠다. 그들은 삼삼오오 어울려서 눈인사를 했다.
“어제 이집트 무희들의 공연은 잘 보셨습니까? 꽤 야했다고 하던데요?”
“하하, 그게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셔서 기억도 잘 나지 않습니다.”
의원들을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여흥거리에 대해서 농담을 주고받았다.
“내일 전차 경주에는 어느 전차에 돈을 거셨습니까?”
한 의원이 목소리를 낮춰서 은밀히 물어보자 다른 의원이 큰 비밀이라도 알려주는 것처럼 대답했다.
“음, 그건 말씀드리기 곤란한데, 살짝 알려드리면, 이번에는 아프리카에서 온 말들이 우승할거라는 정보가 있더군요.”
“오, 그래요? 그런 고급 정보를 알려주시다니 감사합니다.”
또 다른 의원이 끼어들어 분위기를 바꿨다.
“돈 이야기 말고 우리 좀 더 기품 있는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원로원의원이라면 품위를 지켜야죠.”
“그럼 클라우디아누스가 새로 발표한 시에 대해서 토론해 볼까요?”
그들은 자신들의 교양을 자랑하기 위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마침내 한 의원이 진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오늘 회의 안건이 뭔가요?”
피둥피둥하게 살이 찐 원로원 의원 한 명이 옆자리에 앉은 다른 의원에게 물었다.
“아르보가스트를 공공의 적으로 선포하자고 하던데요. 그를 공공의 적으로 선포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서로마 일에 굳이 동로마가 간섭할 필요가 있나요?”
의원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동로마인인 그들에게 서로마에서 황제가 시해되건 말건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통치의 편의를 위해서 임의로 나눈 동서로마 경계였지만, 동로마와 서로마는 점점 서로를 다른 나라로 여기게 되었다.
“전쟁을 해도 우리 동로마군의 숫자가 아르보가스트 군보다 많을 걸요? 굳이 특별세금을 걷을 필요가 있을까요?”
흰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나고 주름진 얼굴의 의원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하며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내가 젊었을 때는 로마군 한 명이 야만족 열 명을 당해내고도 남았죠. 요즘 병사들은 약해 빠져가지고 말입니다.”
스틸리코는 오늘 회의가 쉽지 않을 것임을 예감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쓸며, 자신이 준비한 자료를 다시 들춰보았다. 칼을 들고 덤비는 야만족들보다 혀로 사람을 죽이는 원로원 의원들이 훨씬 어려운 상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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