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으로 뛰어들다 – 96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세상 속으로 뛰어들다 – 96
“소원대로 됐으니 영감탱이는 좋겠다. 그치?”
그는 허공을 보며 혼잣말을 한다. 순간 모든 시선이 그에게 집중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의 말 속에 영감탱이란 단어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무진이 영감탱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태허도장과 천호상, 그리고 공청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순간 그가 그렇게 부를만한 사람은 태허도장밖에 없다.
“헐헐헐! 알고 계셨소? 아니 아실 줄을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눈치 챌 줄은 몰랐소? 혹시 처음부터 아셨소?”
“미친 놈! 내가 쉰내 나는 영감탱이 몸도 하나 구분 못 할 줄 알았어?”
“무 대협!”
순간 태허도장이 무진의 앞에 무릎을 꿇고 큰 절을 올린다. 놀라운 건 모두 표정이 담담하다는 점이다.
“영감탱이! 난 널 형제로 생각해왔다. 근데 넌 나까지 속였다. 그건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무 대협! 아니, 형님! 제가 어찌 제 잘못을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절대로 형님을 속일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그것만은 억울합니다.”
태허는 엉겹결에 무진을 형님이라 부른다.
“좋다. 나도 놈들이 생각보다 일찍 널 노렸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서 내게 말할 기회를 놓쳤다는 것도 이해한다. 하지만 니가 방심해 기회를 놓치면서 네 동생이 목숨을 잃은 건 어떻게 설명할래?”
무진의 설명에 의하면 시신은 태허가 아니라 해원단의 오 장로였다. 급습을 당해 태허 대신 목숨을 잃은 것이다. 당시 방안에는 오 장로뿐이었다. 그래서 이룡과 부하들은 그가 태허인줄 알았다.
이후 태허가 오 장로를 자신으로 분장하고 복수를 한 것이다. 무진을 비롯한 사람들을 속인 건 이룡이 자신의 죽음을 믿고 방심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형님!”
쾅! 쾅! 쾅! 쾅! 쾅!
태허도장은 갑자기 머리를 바닥에 부딪친다. 그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땅이 흔들릴 정도이다. 당연히 이마에선 피가 흘러내린다.
“다..단주!”
“단주님!”
장로들이 달려가지만 그는 손을 들어 제지한다.
“흐흐흐흑! 제가 어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있겠습니까? 저의 자만심으로 인해 평생을 함께 한 의형제를 죽음에 이르게 했거늘. 그뿐입니까? 전 복수를 위해 형님뿐만 아니라 형제들을 이용했습니다. 이것 또한 죽음으로 용서를 구해야 할 일입니다. 세상에 고금제일인을 속이고 어찌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습니까?”
“예에!”
“형님! 그게 무슨 말이오?”
“고..고금제일인이라뇨? 누가 말입니까?”
해원단의 장로들은 고금제일인자란 말에 기겁한다. 물론 이 말은 모두 무진이 음파를 차단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겐 들리지 않는다.
“사실 저의 가장 큰 잘못은 무림의 정세를 오판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는 태양장의 하수인으로 만들고, 구룡단과 손을 잡으려 했습니다. 이로 인해 저와 해원단뿐만 아니라 무림 전체에 큰 해악을 끼칠 뻔했습니다. 이 또한 죽어 마땅한 중죄입니다. 흐흐흐흑!”
태허도장은 다시 울기 시작한다.
“미친놈! 그래서 죽겠다고? 그게 소원이면 죽어야지.”
이렇게 말하는 무진의 눈가에도 이슬이 맺힌다. 그뿐만 아니라 태허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린다. 이게 어찌 태허만의 잘못이고, 또 누가 있어 그에게 손가락질을 할까? 그는 평생을 무림과 중원의 평화를 위해 헌신해왔다. 오늘의 일은 그 과정에 원치 않은 실수로 인해 생긴 것이다.
대부분 무림의 거목들이 모두 죽은 듯이 지내거나 태양장을 비롯한 거대 세력과 결탁해서 부귀영화를 누릴 때 그는 홀로 무림의 정기를 세우기 위해 혼신을 힘을 다했다. 그런 그를 누가 탓할까? 그건 무진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형님! 전 이대로 죽을 순 없습니다. 그렇다고 목숨을 구걸하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저의 오제(五弟)를 비롯한 무림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목숨 바친 형제들의 뜻을 이룰 때까지 만이라도 살게 해주십시오. 그 날이 오면 흔쾌히 이 한 몸 바치겠습니다. 형님! 엉! 엉! 엉! 오..제..야!”
태허도장은 이 말을 끝으로 땅바닥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한다.
“미친 놈! 좋은 세상이 오면 그 세상을 맘껏 즐겨야지, 죽긴 왜 죽어! 일어나. 어서! 그렇게 울 힘이 있으면 한 놈이라도 더 처리해야지. 어서 일이나!”
“대형!”
태허도장은 일어나 무진의 품에 안긴다.
“그래. 내가 어찌 너의 아픔을 모르겠냐? 여기 있는 형제들을 봐라. 모두 하나같이 일신의 영달을 포기하고 무림 평화와 정의를 위해 한 목숨 바쳤다. 이들과 함께 좋은 세상을 한 번 만들어 보자. 그런 일에 네가 빠지면 되겠느냐? 안 그래?”
“대형!”
태허와 무진은 더욱 강하게 서로를 부둥켜안는다. 순간 형제들은 모두 옆자리 형제들의 손을 맞잡는다. 이렇게 무진 형제들은 또 한 번의 고비를 넘긴다.
그 사이 제세의원 내부는 모두 정리된다. 이룡은 호란의 화살이 정수리를 통과하면서 즉사했고, 구룡단의 무사들은 반은 죽고, 나머지는 모두 체포되었다.
“해원단의 장로들은 왜 피하셨습니까?”
“내가?”
“예. 태허도장님이 자리를 마련하셨는데 그냥 오셨잖아요.”
“만날까도 생각했지. 근데 만나는 순간 최소한 보름은 더 걸리겠더라고.”
“왜요?”
태운이 무진을 몰아세운다. 무진이 태허가 주선한 자리를 거절하고 도망치듯이 떠났기 때문이다.
“생각을 해봐라. 만나면 태허 그 놈이 가만있겠냐? 태상단주라도 맡아달라고 때를 써봐라. 어떻게 감당하니?”
“거절하시면 되잖아요?”
“네 말대로 거절했다고 치자. 그럼 늙은이들이 가만있을까?”
“울고불고 하겠죠. 아! 달래주려면 뭔가를 도와줘야 하고, 그럼 시간이 걸린다는 말씀이군요.”
“그래. 못 도와줄 건 없지만 지금은 아니다. 팔룡을 만나는 일이 너무 지체됐다.”
무진 일행은 팔룡인 수로왕을 찾아가기로 하고선 이러저러한 이유로 많이 늦어졌다. 그래서 해원단과의 만남을 다음으로 미루고 중원수로맹으로 향하는 중이다. 이들은 지금 작은 범선을 타고서 도도히 흐르는 장강 위를 지나고 있다.
“다른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태운에 이어 태민이 나선다.
“어려운 질문이냐?”
태민이 뜸을 들이자 무진이 쳐다본다.
“아닙니다. 최근 들어 대형께서 태양장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 같아서....”
“무관심하기보단 놈들에게 우리가 너무 많이 노출된 것 같아서 조심하는 중이다. 가장 좋은 건 태양장과 구룡단이 반목해서 자멸하는 건데, 쉽지는 않을 거다.”
“지금까진 잘해오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하지만 우리가 예상하는 것처럼 배후의 인물이 태양장과 구룡단을 모두 지배하고 있다면 그건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가 없다. 그래서 방법을 바꿀 생각이다.”
“한쪽을 먼저 약화시키기로 하셨군요.”
“그래. 아무래도 태양장보단 구룡단이 쉽지 않을까 싶다.”
“전 아직까지 잘 모르겠습니다. 드러난 것만 보면 태양장이 그렇게 강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지. 하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네가 본 태양장의 세력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태양장의 힘은 태양장 안에 있는 게 아니다.”
“그럼 어디에 있나요?”
“우리 주위에 있다.”
“주위라면 어딜 말씀하시는 겁니까?”
“태양장이 만들어진 것은 이백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시작은 훨씬 전부터 되었다. 그 초기 세력들이야 말로 핵심이라고 봐야 한다. 그들은 사회 곳곳에 점조직처럼 흩어져 있어서 핵심인물들 외엔 누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으음! 그래서 눈에 보이는 구룡단을 먼저 무력화시켜 그들이 나타나게 만들 계획이시군요.”
“그래. 그게 성공하면 배후의 인물도 알 수 있을 거야.”
“그건 그렇고, 이렇게 무작정 가기만 하면 중원수로맹에 들어갈 수 있나요?”
옆에서 지켜보던 호란이 끼어든다.
“나도 그게 고민이었는데 대신 해결할 사람들이 있구려.”
무진은 말을 하면서 옆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본다. 그들은 장사꾼들로 십여 명이 모여서 한창 얘기꽃을 피우고 있다.
“올해만 해도 벌써 열 번도 더 털렸네.”
“열 번이나?”
“나도 일곱 번이나 당했네.”
“사실 횟수가 문젠가?”
“그렇지. 과거에도 이와 유사한 일들이 꽤 많았으니까. 하지만 그때마다 적절한 금액으로 협상을 했어. 근데 최근엔 어때?”
“난 저 번 달에 걸렸는데, 홀딱 다 벗고 도망쳤어. 가리개도 없이 발가벗은 채로 말이야. 개새끼들!”
“이건 완전히 자기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심보야.”
“오늘도 걸리면 난 더 이상 장사를 할 수가 없네. 개털이 되는 거지.”
“나도 마찬가지야. 난 팔아넘길 딸도 없다고.”
“말들 조심하게. 자네들도 알잖아? 중원수로맹이 곳곳에 감시자를 붙여놓았단 소문이 있어.”
“니기미! 그래봤자 죽기밖에 더하겠어?”
“그래. 난 이번에도 털리면 그냥 강물에 뛰어들 거야. 씨발, 맞아 죽으나 굶어 죽으나 마찬가지지 뭐.”
상인들은 한 결 같이 중원수로맹(中原水路盟)을 비난한다. 이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들을 유심히 지켜보는 자가 있다.
“흐흐흐, 저런 놈들일수록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법이지.”
그는 허연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다. 상인들은 그것도 모르고 얘기꽃을 피운다.
“난 수로왕이 더 이해가 안 돼. 명색이 왕인데, 왕답게 부하들 관리를 잘 해야지. 이게 뭐야?”
“근데 자네들 그 얘기 들었나?”
“뭔 얘기?”
“중원수로맹이 구룡단 소속이라는 거 말이야.”
“정말?”
“설마?”
상인들의 얘기가 점점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간다. 이때 사람들의 외침이 들려온다.
“버..범선이다!”
“중원수로맹이다!”
중원수로맹이란 한 마디에 배는 완전히 아수라장이 된다. 일반 손님들은 물론이고, 방금 전까지 큰소리치던 상인들도 구석으로 밀려나 벌벌 떨고 있다.
“중원수로맹입니다.”
“후후후, 기다린 보람이 있군.”
“바로 나설까요?”
“아니다. 기다려 보자.”
“예!”
무진 일행은 일단 지켜보기로 한다.
“근데 일초 형님과 일이는 어디서 만나기로 했습니까?”
“배에서 만나기로 했지. 어딘가 숨어 있을 거야.”
무진의 말처럼 두 사람은 먼저 와서 준비하고 있기로 했다.
“꼼..짝..마..라!”
뱃머리에 해골깃발이 여러 개 걸려 있는 거대한 범선이 다가오더니 단숨에 여러 개의 발판을 내리며 백 명의 넘는 수적들이 작은 범선으로 넘어온다.
“모두 그 자리에 멈춰라! 지금부터 허락 없이 움직이거나 말하는 놈은 모두 강물에 처박히게 될 것이다. 제5단주님!”
먼저 말한 사람은 뒤에 서 있는 사람을 소개하고 물러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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