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으로 뛰어들다 – 94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세상 속으로 뛰어들다 – 94
“그건 아닙니다. 사부께선 곤륜을 떠난 이후 가끔 연락을 하거나 제자들을 만나곤 하지만 그렇다고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럼 곤륜은 아니라고 봐야겠지.”
“혹시 형님이 태양장과 척을 졌느냐?”
천호상이 나진에게 고개를 돌린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몇 년 전에 모임을 하나 만들었는데 태양장이 방해한다는 말씀은 하셨습니다.”
“모임?”
“예. 전대 무림 고수들인데 대부분 태양장에 부정적인 분들입니다. 그래서 태양장이 탐탁찮게 생각한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그럼 일단 태양장을 용의선상에 올리고. 다른 건 없어?”
“사실 형님은 워낙 신출귀몰한 분이라 정확히 뭘 하고 다니시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군.”
“그게 뭡니까?”
“함정을 파고 범인을 기다리는 거지.”
“벌써 멀리 도주하지 않았을까요?”
“일단 이곳을 정리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해라.”
“형님이 살아 있는 것처럼 만들란 말씀인가요?”
“그래.”
“속아 넘어갈까요?”
“후후후, 원래 말도 안 되는 일이 더 재밌거든. 생각해 봐. 분명히 내가 목을 잘랐는데, 살아 있다면? 가던 길도 멈추고 돌아오지 않을까?”
“흐음!”
나진은 물론이고, 일행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다음 날 오후.
“대형!”
태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들어와라.”
“대형! 범인으로 추정되는 자가 살해당했습니다.”
태민 사형제에 이어 소미가 들어와 무진의 품에 안긴다. 공령은 조부와 함께 먼저 떠났다. 두 사람은 다른 핑계를 대고서 더 있고 싶었지만, 이번 사건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헤어졌다.
“야아옹!”
“그래. 수고했다. 니들도 이리와 앉아라.”
“알고 계셨습니까?”
“내가 신이냐? 그걸 알게. 다만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럼 소미는 왜 보냈습니까?”
“진범의 냄새를 맡기 위해서지.”
“진범이라면.... 아!”
그제야 태민은 무진의 의도를 깨닫는다.
“대형께선 처음부터 진범이 따로 있다는 걸 알고 계셨군요.”
“진범이라기보단 배후세력이라고 해야겠지. 놈들은 태허도장이 살아 있다는 소릴 듣는 순간 범인을 제거할 테고, 그때 놈들을 잡을 생각이었다.”
“소미가 진범을 추적할 수 있을까요?”
“야오옹!”
태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미가 고개를 내밀며 소리친다.
“봐라. 소미가 자기를 무시한다고 화내잖아?”
“아무리 영물이지만 누구 건지도 모르는 냄새로 진범을 찾을 있을까요?”
“그건 가보면 알겠지. 소미가 여기로 온 걸로 봐선 진범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모양이다.”
무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미를 따라 나선다.
“정랑! 쯧쯧, 이러다 오늘도 그냥 넘어가겠네.”
호란은 뒤따르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뭘 그냥 넘어가나요?”
“뭐긴 뭐냐? 니들도 분명히 들었지? 자기가 먼저 날 닮은 딸 낳아달라고 한 거?”
“물론이죠. 전 사실 대형이 그 말씀 하실 때 감동 먹었거든요.”
“니들이 감동 먹으면 뭐하냐? 정작 소원이라고 말한 사람은 약속을 안 지키는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사형도 참! 별을 따려면 하늘을 봐야 할 거 아니오?”
“하하하! 그런 말씀이었습니까?”
“야, 너 지금 웃는 거니? 나 지금 무지 심각하다.”
호란이 정색을 한다.
“대형도 대형이지만 제가 볼 땐 누님도 문제가 많습니다.”
“내가?”
“문제라기보다는 생각을 좀 바꾸셔야겠습니다.”
“어떻게?”
“누님은 그걸 왜 꼭 밤에만 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에잉? 듣고 보니 그러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운아! 정말 고맙다. 니 대형 닮은 아들 낳으면 내가 근사하게 한 턱 쏠 게.”
“잘들 논다. 놀아. 그게 누나란 사람이 동생들에게 할 말이오?”
무진은 호란과 동생들의 얘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왜요? 얘들도 곧 장가가면 다 할 텐데요 뭐.”
“맞습니다. 전 앞으로 누님에게 많은 걸 배울 생각입니다.”
“에라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아.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제가요?”
“그래. 속으로 삼백 살이 다 된 늙은이가 무슨 자식이냐고 욕하면서.”
무진은 강하게 나온다. 그러자 태운이 약간 당황하는 눈치다. 하지만 이번에는 태민이 나선다.
“사실 그런 생각을 안 한 건 아닙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누님을 위해서 눈을 감아 드려야죠.”
“에잉? 민이 너 이제 나랑 등지기로 한 거냐?”
“대형이랑 등진다기보다 누님 쪽에 붙었다고 봐야겠죠.”
“정말 그러기냐?”
“저도 어쩔 수가 없답니다. 안 그래도 힘이 누님 쪽으로 기울어져 가는데, 조카까지 생겨보십시오. 대형도 이제 선택하셔야 합니다.”
“선택?”
“예. 누님 쪽에 붙어서 확실한 미래를 보장받든지, 아니면 외톨이가 되시든지.”
“호호호! 우리 민이가 속세인이 다 됐네. 당신도 빨리 선택하세요. 전 많은 건 요구하지 않아요. 딱 한 가지. 당신 닮은 아들만 낳게 해줘요. 하루라도 빨리!”
“그러니까 밤낮으로 노력해라?”
“호호호! 제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바로 그거예요.”
“하하하! 우리 대형 이제 큰일 났네.”
“그러게. 밤낮 없이 노력봉사하시다가 코피 흘리는 거 아냐?”
“그건 걱정 마세요. 제가 몸에 좋은 거 많이 해드릴게요.”
“저희도 가능하면 두 분만의 시간을 많이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감동을 받아서 눈물이 다 나려고 한다.”
“하하하하!”
“호호호호!”
이렇게 일행은 그 동안 쌓였던 긴장을 푼다.
무진 일행은 벌써 같은 곳을 세 바퀴째 돌고 있다. 진범이 추적을 의식해서 은밀하게 움직인 탓이다.
“대단합니다. 또 찾아냈습니다.”
태운의 말처럼 소미는 영물답게 냄새를 잘 찾아낸다. 다시 두 바퀴를 더 돌더니 결국 새로운 길로 들어선다.
“가자!”
갑자기 무진이 소미를 앞질러 달린다.
“누님! 대형이 진범을 찾은 모양입니다.”
“아냐. 정랑의 표정이 어두운 거로 봐선 문제가 생긴 것 같다.”
호란과 태민 사형제도 무진을 따른다. 약 일각 정도 달리자 멀리 무진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주택가 골목길에 서서 생각에 잠겨 있다.
“대형!”
“정랑! 어찌 된 일이에요?”
“놓쳤소.”
“예에?”
“설마요?”
그의 말에 모두 놀란다. 사실 추적술은 무진이 소미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 다만 소미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그 동안 따라다녔을 뿐이다. 근데 놓쳤다.
“무림에 정랑의 추적을 피할 수 있는 자가 있다니 놀랍군요.”
“혹시 흔적을 지우거나 약품을 사용한 건 아닐까요?”
“그런 방법으론 정랑의 눈을 속일 순 없단다.”
태민의 문제 제기에 호란이 단호하게 말한다.
“안 그래도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뭐가요?”
“냄새는 나는데 발자국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말씀은 발자국도 남기지 않을 정도의 고수란 건가요?”
“그래. 진범은 지금까지 만나본 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실력자이다.”
“대형이 찾는 자일 가능성도 있나요?”
“후후, 그건 아니다. 놈은 이렇게 쉽게 본색을 드러낼 인간이 아니다. 그보다 민이는 개방에 연락해서 태허도장이 만들었다는 모임의 구성인자들과 구룡단의 움직임을 알아봐라. 특히 그들 중 근처에 있는 자가 있는지를 확인해라. 급한 일이다.”
“예. 대형!”
태운은 대답과 함께 급히 사라진다.
“구룡단이 한 짓이라고 생각하세요?”
“현재로선 그럴 가능성이 높소.”
“태양장일수도 있잖아요?”
“전후 사정을 아는 사람은 대부분 태양장을 지목할 거요.”
“그런데 왜 아니라는 건가요?”
“그래서 아닌 거요. 당신은 누구나 당신이 범인이라고 생각할 일을 하겠소?”
호란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물론 태양장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그보다 더한 일도 할 놈들이오. 하지만 이번은 아닌 것 같소.”
“왜요?”
“실익이 없소. 이번 일로 곤륜이 등을 돌려도 태양장은 보복할 명분이 없어질 테니까.”
“그래서 구룡단을 의심하시는 건가요?”
“그렇소. 구룡단은 태양장과 협력관계에 있지만, 실상은 경쟁자이자 장기적으론 적이나 마찬가지니까.”
“결론은 구룡단이 태양장과 정파의 균열을 노리고 태허도장을 살해했단 말이군요.”
“그렇소.”
“문제는 구룡단에 대형의 추적을 피할 수 있을 정도의 고수가 있느냐 하는 거잖아요?”
태민이 핵심의 찌르는 질문을 한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과거엔 구룡 중의 한 명이 천하제일의원이었다. 만약 그라면 가능한 일이다. 태허도장의 죽음에도 연관됐을 수도 있고.”
“천하제일의원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두 명인데.”
호란이 아는 척을 한다.
“황의(皇醫)가 그 중 한 명이란 건 알겠는데, 다른 사람은 누굽니까?”
“오래 전에 은거해서 무림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적마교에서 파악한 바로는 신분을 세탁해서 활동하고 있대.”
“혹시 개봉 빈민촌에서 제세의원을 운영하고 있다는 그분인가요?”
“너도 알고 있었구나.”
“얼마 전에 소개에게 들었습니다. 막내 말로는 무상의료와 빈민구제사업을 하면서 개방에도 도움을 많이 준다고 하던데...”
“그 자가 이룡일 가능성이 높다. 가자!”
이번에도 무진이 앞장선다. 근데 그는 문을 나서다 말고는 하늘을 쳐다본다.
“운이가 보낸 모양입니다.”
멀리서 매 한 마리가 날아와 무진의 어깨에 앉는다.
“수고했다.”
< 급전. 개봉 빈민가 제세의원이 정체불명의 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음. 운 >
“먼저 간다!”
무진은 그 말만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진다.
“개방이 있는데 큰일이야 있을까?”
“소개가 있다면 모를까 아니면 상황 판단이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럼 큰일인데... 우리도 가보자.”
“예.”
호란과 태민, 두 사람도 전력을 다해서 달린다.
잠시 후, 개봉의 빈민촌.
“왜 보고만 있니?”
“허억! 대형!”
소개는 무진이 갑자기 나타나자 깜짝 놀란다.
“저들은 누구냐?”
“태허도장이 만들었다는 해원단입니다.”
“해원단(解冤團)? 이름이 의미심장하구나. 나진이 불렀느냐?”
“형이 나타나지 않은 걸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태민은 나진을 형이라고 부른다.
“어떻게 되고 있니?”
“제세의원에 의외로 고수들이 많이 있습니다. 불은 났지만 양측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습니다.”
“제세의원이 구룡단의 개봉지부란 건 알고 있었니?”
“예에? 정말입니까?”
“쯧쯧쯧!”
“죄..죄송합니다. 아직 정보체계를 완전히 정비하지 못해서....”
“그럼 빈민의원 우전(禹電)이 이룡인 것도 모르겠구나.”
“으음!”
소개는 대답 대신 이빨을 깨문다. 자존심이 상했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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