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으로 뛰어들다 - 20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세상 속으로 뛰어들다 - 20
“오라버니, 전 어릴 적부터 아버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었어요. ‘과거에 묻혀 사는 사람에겐 미래가 없다.’라고요. 전 오라버니가 그렇게 사는 걸 원치 않아요. 당당하게 미래의 주인이 되는 오라버니의 모습을 보고 싶어요.”
“어째 나 들으라고 하는 말 같소.”
“호호! 들켰네요. 그런 면에선 두 분이 형제란 게 다행이에요.”
“그건 또 무슨 소리요?”
“과거형 사람들은 같은 유형의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게 그걸 극복하는 데 가장 많은 도움이 된대요.”
상대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을 반성하라는 말이다.
“아가씬 정말 무서운 분이시군요.”
“호호호! 이제 아셨어요?”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니 형수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를. 특히 밤엔 더 무섭지.”
“예에?”
“정랑! 밤이라고 하니까 오라버니가 오해하시잖아요.”
“그런가? 니 형수는 뭔 얘기든 파고들기 시작하면 반나절은 기본이다. 요즘 내가 눈이 퀭한 게 안 보이냐?”
“됐소. 지금 누구 염장 지르는 거요?”
“야, 그게 아니라니까.”
“됐다니까. 밤이니까 두 분이서 알콩달콩 재밌게 밤샘하시우. 이 과거형 인간은 산책이나 좀 해야겠소.”
“호호호! 눈치가 저리 빠른데, 어째서 여자 보는 눈은 없을까? 그나저나 추개 오라버니가 소방주직을 내놓은 이유는 뭔가요?”
양문이 방문을 열고 나가자 호란이 추개 얘기를 꺼낸다.
“당시 개방에는 후계 구도를 놓고 갈등이 많았소. 추개가 계속 소방주를 하면 개방이 두 쪽으로 나눠질 상황이었나 보오.”
“해서 오라버니가 물러나고 현 방주가 그 자리를 대신한 거군요.”
“그런 것 같소. 어린 나이에 그 정도 판단을 한 정도면 똑똑할 뿐만 아니라 현명한 거 아니오?”
“대단한 거죠. 정랑이 무림의 보석을 동생으로 삼으셨군요.”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소. 자! 그 얘긴 그만하고, 오늘은 당신과 같이 자고 싶소.”
“제 젖꼭지를 만지고 싶은 게 아니고요?”
“그야 당연하지요.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옆에 두고 그런 생각이 안 든다면 그건 고자가 분명하오. 고자!”
“호호호! 그거 칭찬이죠?”
“물론이오.”
“근데 그러다가 제가 당신 아이라도 가지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아이?”
“그건 자연의 섭리예요.”
“그런가?”
“당신은 제가 아이를 가지는 게 부담스러운가요?”
“그럴 리가 있소? 다만 이 나이에 아이를 가져도 되나 싶어서 잠시 고민했소? 난 당신을 닮은 예쁜 딸이 있으면 좋겠소.”
“전 당신을 닮은 늠름한 사내아이가 필요한데.”
“하하하! 그럼 둘 다 가지지 뭐.”
“호호호! 그럼 되겠다.”
“이리 오시오. 둘 다 가지려면 부지런을 떨어야 할 것 같소.”
“알았어요. 정랑!”
호란은 무진의 품속으로 달려가 안긴다.
팟!
순간 무진의 지풍에 의해서 방안에 있던 다섯 개의 촛불이 한꺼번에 꺼진다.
대륜장(大輪莊).
이곳은 황진에서 가장 큰 장원으로 20년 전부터 낙향한 관리가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시에 이곳은 태양장의 비밀분타이기도 하다. 지금 대전에서는 제법 큰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뭐라고? 그걸 왜 이제야 보고해?”
태양장의 둘째 공자 유호는 다소 흥분된 목소리로 부하를 다그친다. 그의 옆에는 금노가 있고, 그 앞에 부하가 무릎을 꿇고 설명을 하고 있다.
“그게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신분도 불분명했고요. 근데....”
“근데?”
“오늘 아침 소장주 측의 비표가 여러 장 발견됐습니다.”
“비표?”
“예. 은밀하게 숨겨져 있었는데, 소장주의 직할대인 태양전(太陽殿)이 사용하는 비표였습니다.”
“무슨 내용인데?”
“여기 있습니다.”
부하는 그림이 그러져 있는 손바닥만 한 종이를 금노에게 전한다.
“뭔 내용이야?”
“으음!”
금노는 그림을 보며 인상을 찌푸린다. 비표는 일종의 암호로 된 표식이다. 중요한 명령을 약속 장소에 비표로 남기면 그걸 보고 실행하는 것이다.
“뭔데 그래? 줘 봐!”
유호는 비표를 빼앗아 본다. 하지만 그는 볼 줄을 모른다. 그건 금노도 마찬가지다. 태양장의 비표라 대충은 알지만 태양전만의 표식이 섞여 있기 때문에 완전한 해석이 어렵다.
“이게 뭔 뜻이야?”
비표에는 토끼 두 마리가 그러져 있다. 한 마리는 멀쩡하게 집으로 들어가고, 다른 한 마리는 목이 잘린 채로 쓰러져 있다.“
대충 설명을 드리면 이렇습니다. 부하가 설명을 시작한다.
“토끼 한 마리가 집으로 들어왔는데... 그 다음이 문젠데 토끼목이 잘렸다는 건 죽이라는 명령입니다. 종합하면 토끼를 죽이라는 겁니다.”
내용은 불명확하지만 분위기는 좋지 않다. 듣는 순간 유호의 인상이 일그러진다.
“문제는 토끼가 누구냐는 거군. 금노 생각은 어때? 자..잠시만!”
순간 유호와 금노의 눈이 마주친다.
“서..설마! 금노도 같은 생각이지? 그치!”
“그렇긴 하지만, 단정할 순 없습니다.”
“아니야, 놈들이 태란 낭자의 존재를 알아낸 게 분명해. 월령대주는 들어라!”
“예, 전주님!”
부하의 말에 의하면 유호가 월령전주이고, 그 부하가 대주인 모양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놈들을 찾아 제거하라. 이번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알았느냐?”
“충! 목숨을 다해 놈들을 처단하겠습니다.”
월령대주는 인사를 하고는 곧바로 물러난다.
“금노!”
“예, 도련님.”
“지금 이 시간부터 무심장을 철저히 지켜라.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얼씬 못하게 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그럼 낼 약속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약속은 지킨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놈들이 태란 낭자를 확인 한 이상 숨길 수는 없다. 오히려 놈들을 기다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함정을 파자는 말씀인가요?”
“다른 방법이라도 있어?”
“그게 아니라. 태란 낭자는 오늘 만났습니다. 근데 벌써 암살 명령이 내려졌다는 건 그 동안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의미합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거야 우리도 하는 일이니까 예상한 거고, 문제는 태양전에서 어떤 놈들이 왔느냐 하는 거야. 만약 일급 살수들이 왔다면 위험하다.”
“제가 직접 무심장에 상주하겠습니다.”
“아니. 내가 간다.”
“하지만 그건....”
“그만 해. 이젠 밀당이니 뭐니 그런 소린 하지 마. 내 여자는 내가 지킨다.”
“알겠습니다. 근데 태양성환은 어떻게 할까요?”
“일단 금노가 가지고 있어. 처음이라 부담스러워 거절했을 수도 있으니까. 다음엔 어떤 구실이든 만들어서 먹여야 해. 병을 치료하든 안 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내가 줬다는 게 중요해.”
유호는 호란에게 빠져 헤어날 줄을 모른다.
‘으음! 이렇게 된 이상 도련님을 도와서 그녀와 연을 맺어주는 수밖에 없다. 결국 그들을 불러야 하는가?’
“도련님!”
“왜?”
“아무래도 지옥전사들을 호출해야겠습니다.”
“지옥전사를?”
“예.”
“그들이 누군지는 알고 하는 말이야?”
“장주님을 제외하곤 저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래. 금노가 그들을 가르쳤단 소린 들었어. 하지만 장주님이 아시면 금노가 곤란하지 않을까?”
유호도 형인 소장주처럼 태양장주를 아버님 대신 장주님이라 부른다.
“전 이미 도련님께 모든 걸 걸었습니다.”
“좋아. 그래서 내가 금노를 항상 내 곁에 두는 거잖아. 근데 그들이 움직이면 여자들이 남아나지 않을 텐데, 괜찮을까?”
“저도 그게 걱정입니다만,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그도 그렇지만 지금 부르면 너무 늦진 않을까?”
“다행히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그래? 그럼 당장 불러들여!”
“예, 도련님.”
금노는 대답을 하곤 뒤에 있는 새장에서 독수리 한 마리를 꺼내 창밖으로 날려 보낸다.
‘후후후! 지옥전사라고? 이름 한 번 더럽게 살벌하네. 그럼 실력은 어떤지 확인해볼까?’
이들의 얘기를 지붕 위에서 처음부터 듣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전신을 검은색 천으로 휘감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이곳은 황진에서 약 백 리 정도 떨어진 금화. 황진보다 조금 작은 동네이다.
세림객잔(細林客棧).
지금 이층 객잔에선 한낮인데도 열락의 신음소리가 흘러나온다.
“그..그만! 제발... 나..나으리!”
이상한 것은 여인의 목소리가 결코 즐겁지 않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남자는 다르다. 그는 끊임없이 침대에서 여인을 괴롭히고 있다. 뿐만 아니다. 그는 여인을 창가로 끌고 가선 거기에서 사랑을 나눈다.
“나..나으리. 사람들이 봐요.”
그녀의 말대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 곁눈질로 쳐다본다. 벌건 대낮에 발가벗은 남녀가 훤히 다 보이는 곳에서 그 짓을 하니 쳐다보는 건 당연하다.
“허억! 으으음!”
여인도 그게 자극이 되는지 다시 목소리가 요상하게 변한다.
“흐흐흐! 봐라. 너도 좋잖아? 자, 간다!”
사내는 다시 허리를 빠르게 움직인다.
“헉! 아아! 너..너무해. 아악!”
여인의 목소리는 다시 뜨겁게 변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금방 신음소리가 비명소리로 바뀐다.
“아아악! 그..그만 해요. 아..안돼요. 제발!”
“뭐야? 이제 시작인데...”
“나으리. 벌써 열 번이 넘었어요. 더 이상은 어려워요. 제..제발! 커억!”
여인은 견디다 못해 바닥에 쓰러진다.
“에이, 씨발! 어째 하나 같이 한 시진을 못 버티냐? 꺼져!”
사내는 여자에게 축객령을 내린다.
“아이고고... 나으리! 제가 열 번째예요. 열 번째! 더 이상은 안 됩니다. 아이고!”
우당탕!
여인은 옷도 제대로 걸치지 않고 계단을 굴러가듯이 사라진다. 그녀는 삼십 대 후반으로 기녀로선 환갑을 지난 나이다. 손님을 받을 기녀가 없어서 주루의 주인이 들어온 것이다. 물론 이 정도 주루면 수십 명의 기녀를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사내 세 명이 한꺼번에 들어오면서 기녀가 씨가 마른 것이다. 모두 하루 저녁에 열 명 이상의 기녀를 망가뜨렸으니 방법이 없다.
“오랜만에 몸을 좀 풀려고 했는데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되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다. 다른 방법으로 해소하는 수밖에. 에잉? 늙은이가 어쩐 일이야?”
사내는 창밖을 보다가 몸을 날린다.
푸드드득!
창가에 앉은 새 한 마리를 낚아챈 것이다.
“차라리 이게 낫겠다. 숫자 제한도 없을 테고 말이야. 걸리는 놈들은 모조리 죽여 버리면 되니까. 크크크큭!”
사내가 손에 힘을 주자 새는 산산조각이 나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는 피 묻은 손으로 옷을 주섬주섬 입는다. 순간 평범하게 생긴 얼굴이 악마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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