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의 계시
‘후··· 다행히 엄마한테 등짝 스매싱 맞는 건 피했군.’
적절한 타이밍에 일어나 준비했다.
조금만 더 늦었어도 김 여사의 폭풍 같은 잔소리가 쏟아졌을 것이다.
어쩌면 등짝도 몇 대 맞았을지도.
우리 엄마가 위대한 자였다면 아마 헌터들에게 ‘등짝 스매싱’ 같은 스킬을 나눠줬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강력하군···.
크로노스도 바를 수 있겠어.
‘보자··· 버스를 타면 안 되니까 지하철을 타야겠어.’
나는 내가 처음으로 헌터가 되었던 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워낙 감명 깊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스펙타클한 일이 일어난 날이기도 하다.
회귀 전 같은 날, 나는 버스를 타고 출근했다.
이상할 게 없었다.
나는 원래 버스를 타고 다녔으니까.
버스가 훨씬 쾌적하고 빨랐다.
지하철을 타면 환승도 해야 하고 빙빙 돌아서 더 늦었다.
그러나 이번엔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정확히 오늘, 버스가 다니는 경로에 던전이 출현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생겨나자마자 엄청난 규모로 ‘던전 폭발’이 일어났다.
수많은 몬스터가 쏟아졌고 교통이 마비되었다.
나는 그래서 그 날 우리 잘난 최 부장님한테 죽도록 잔소리를 들어야했다.
아니 이 정도면 천재지변인데. 봐줄 만도 하지 않나?
그러나 우리 최 부장님한테 그런 건 없다.
그런 변수까지 생각해서 더 일찍 나왔어야 된단다.
참나. 생각만 해도 어이가 없네.
어쨌든 나는 그딴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지하철에 탑승했다.
“어머 어머, 어떡하니! 서울 한 복판에 또 던전이 터졌다네!”
“아이고 큰일 났네! 여기 근처에 우리 친척들 사는데! 아이고!”
“오! 우리 대학교 근처에 던전 터졌대! 아싸 내일 휴강 각? 오늘 술 한 잔 하실?”
중간 쯤 왔을 때 지하철 안에 있는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역시나 예상대로 던전이 출현했다.
사람들은 제각기 이해관계에 따라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특별히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던전 폭발 같은 사건은 인간들에게 익숙한 일이다.
또 헌터들이 얼른 출동해 상황을 처리해주겠지 생각하는 것이다.
“이번 역은 oo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 쪽입니다. This stop is···."
아 뭐야. 벌써 내릴 때가 됐네.
멍 때리다 하마터면 놓칠 뻔했어.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 이현민이 왔구먼. 좋은 아침.”
최민철 부장이 자리에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언뜻 들으면 친절한 아침 인사 같다.
하지만 이 남자의 표정은 전연 다른 걸 말하고 있었다.
이 새끼 오늘은 안 늦었네. 까비.
이런 느낌으로 나를 바라봤기 때문이다.
나를 흘겨 본 뒤 시계를 확인한 그의 시선만 봐도 알 수 있다.
지금 시각은 8시 50분.
출근 시간인 9시까지는 아직 10분이 남았다.
항상 이런 식이다.
최 부장은 만날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
어디 꼬투리 잡을 만한 게 없을까.
호시탐탐 나를 괴롭힐 기회를 노린다.
다시는 얼굴 볼 일 없어서 기뻤는데.
저 능글맞은 얼굴을 보니 회귀했다는 사실이 더욱 실감이 난다.
“오, 현민 씨 왔네요. 다행히 오늘 안 늦었네요? 던전 출현했다고 해서 걱정 많이 했는데. 출현한 곳이 현민 씨 버스 경로에 있더라고요.”
심지현이 나를 보고 웃으며 인사했다.
심지현은 나와 입사동기.
이 뭐 같은 회사에서 유일하게 천사같이 착한 여자다.
이 뭐 같은 회사에서도 이런 착한 성격을 유지하다니.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성격이 이러니까 나중에 주술사 최상위 랭커가 된 거겠지.
참, 그러고 보니.
회귀 전의 나는 이 친구가 나중에 어마어마한 헌터가 될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다지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는데···.
내 기억으로는 앞으로 한 달 정도 있다가 심지현은 각성한다.
그 전에 미리미리 친하게 지내야겠어.
성격도 이렇게 착한데 내가 왜 진작 친하게 지내지 않았을까?
아마 회귀 전의 나는 업무와 스트레스에 치여 정신을 못 차렸던 것 같다.
“운이 좋았어요. 오늘은 버스를 안 타고 지하철을 탔거든요.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요. 만약에 버스를 탔다면···. 몬스터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최 부장님 잔소리가··· 어휴···!”
“에이, 천재지변인데 아무리 조금 타이트하신 최 부장님이라도 현민 씨한테 뭐라고 했겠어요? 그냥 다음부터는 조심하라고 하고 마시겠죠.”
생각하는 것 좀 봐.
참 긍정적이다.
저렇게 성격이 막 나가는 최 부장을 좋게 볼 수 있다니.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 정도다.
물론 틀린 말이다.
나는 오늘 버스를 타서 지각을 했을 가능세계를 이미 겪었다.
폭풍 잔소리로 하루 종일 기분 최악.
시나리오는 정해져 있었다.
세상은 심지현이 생각하는 것만큼 밝지 않다.
“아이고! 어제 던전을 돌았더니 몸이 찌뿌둥하네!”
최민철 부장이 사무실에 있는 모든 사람이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입을 잔뜩 벌리고 하품하며 기지개를 켰다.
‘각성했다고 재기는···.’
참 마음에 안 든다.
오늘 내가 각성하기 전까지만 해도 인생이 참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하필 각성 계시를 받아도 저런 놈이 받나?
저런 심성을 가진 사람이 헌터를 하다니.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기억에 그의 클래스는 전사다.
크로노스와 계약을 맺은 전사.
그 생각을 하니 더 심사가 뒤틀린다.
“아이고 부장님, 어제 돈 많이 버셨어요? 어느 던전에 들어가셨어요? 설마 남양주에 새로 생겼다던 그 던전?”
아부 쟁이 김민식 대리.
여느 때와 같이 최 부장의 비위를 맞추느라 최선을 다한다.
“김 대리도 참! 그 던전은 3레벨 던전이야! 나한테는 아직 무리라고.”
“아 그런가요? 저는 최 부장님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기에 벌써 가능하실 줄 알았는데!”
“허허허, 그 정도 되면 내가 왜 아직 회사에 나오겠나. 진즉 때려치웠지.”
던전이 생긴지 10년.
헌터들도 그 만큼 많이 생겼다.
그러다보니 레벨이 낮은 헌터들은 돈을 많이 벌지 못했다.
끽해봐야 부업으로 용돈벌이 하는 정도.
그렇기에 빠듯하게 먹고 사는 우리 같은 월급쟁이는 각성이 되었다고 해서 쉽사리 회사를 때려 칠 수 없었다.
게다가 각성했다고 해서 반드시 탄탄대로가 보장된 것도 아니다.
헌터라는 게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하는 직업.
목숨을 걸고 괴물과 맞설 깡과 실력이 없다면 차라리 포기하는 게 낫다.
다 하기 나름이었다.
실력이 없다면 몸만 버리는 거고, 실력이 좋으면 위대한 자의 지원을 받고 승승장구할 수 있다.
그래서 각성이 되었다고 해서 처음부터 전업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누가 자신의 가능성을 쉽게 믿겠는가?
내가 회귀 전에 각성이 되고도 회사를 바로 때려 치지 못한 게 바로 이런 이유다.
장애를 가진 아버지, 식당 일을 하시는 어머니.
수입이 나올 곳이 없었다.
병원비도 많이 나왔다.
나마저 돈을 벌지 않으면 우리 집은 그 날로 길바닥 행이었다.
게다가 내가 형가의 화신까지 할 줄 몰랐기 때문에···.
“부장님은 정말 좋으시겠어요. 헌터도 되시고. 정말 부럽네요··· 저도 각성 계시를 받았으면···.”
“허허, 김 대리는 나처럼 인성이 좋으니까, 좋은 일이 있을 거야. 꾹 참고 기다려보라고.”
잘들 논다. 인성이 좋기는.
“어이, 이현민이. 뭘 그렇게 쳐다보냐. 얼른 일이나 하지? 오늘 점심까지 보고서 마무리 해놓으라고.”
으악! 망했다.
괜히 엿보다가 찍히고 말았다.
미친··· 점심까지 보고서 마무리라니.
회귀 전에 지각했을 때는 이런 업무는 주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그때는 잔소리로 스트레스를 다 풀어서 그랬던 것 같다.
어휴···. 참자.
부모님의 얼굴을 생각하자.
당장은 돈 나올 구멍이 있어야 한다.
“여기 있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했다.
최 부장이 시켰던 대로 보고서를 마무리했다.
까무룩 죽을 뻔했다.
“흐음··· 다시 해와.”
아 미친. 제대로 읽지도 않고서?
아니 몇 줄이나 읽었다고 빠꾸 먹이냐. 에휴.
나는 보고서를 들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왔다.
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12시. 점심시간이다.
최 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난다.
“휴, 배고프다. 현민 씨는 점심 먹으러 안 가요?”
심지현이 일어나면서 말했다.
“저도 가야죠.”
“저랑 같이 드실래요? 근처에 김치찌개 맛집을 하나 찾았는데.”
“아, 저야 좋죠. 같이 먹어요.”
우리 둘은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맛집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북적북적했다.
사람들 틈새를 비집고 자리에 앉았다.
“음, 역시 지현 씨 말 대로네요. 정말 맛있어요.”
“그렇죠? 요즘 SNS에서 핫하더라고요. 그래서 먹어보고 싶었어요.”
“와, 저것 좀 봐! 몬스터들이 미치도록 쏟아지는데?”
옆 테이블에서 TV를 보며 외쳤다.
TV 뉴스에서는 오늘 출현한 던전에 대해 생방송되고 있었다.
끔찍했다.
생김새를 형용하기조차 힘든 괴물들이 건물을 파괴했다.
헌터들이 다수 동원되어 괴물과 맞서 싸웠다.
“저거 현민 씨 출근하는 길에 생긴 그 던전 맞죠?”
“네, 맞아요.”
“와··· 끔찍하네요. 제법 레벨이 높은 던전인가 봐요.”
“듣기로는 11레벨 던전이라죠.”
“헐··· 장난 아니다. 잘 마무리가 되어야 할 텐데··· 사람들이 다치지 않게···.”
그때 나는 갑자기 장난기가 동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참, 지현 씨는 이번 던전이 어느 길드에 의해 소멸될 것 같아요?”
“글쎄요. 저 정도면 ‘전진’ 길드 쯤 되어야 할 것 같은데. 현민 씨는요? 어떻게 생각해요?”
“으음··· 제 생각엔.”
생생하게 기억난다.
누가 바로 저 던전을 격파했는지.
“한 번 쯤은 이변이 있지 않을까요? 보자··· 제 생각엔 어떤 사람 혼자 들어가서 클리어할 것 같아요.”
김재권.
크로노스의 화신 김재권.
물론 아직은 아니지만.
그가 바로 혼자서 저 던전을 클리어했다.
11레벨 던전 쯤 되면 혼자서 클리어하는 게 말이 안 된다.
하지만 그는 보란 듯이 해냈다.
이번 일로 그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번 일로 크로노스의 눈에 제대로 들어 지원도 팍팍 받게 되었다.
그의 인생에서 한 가지 전환점이었던 것이다.
“에이··· 말도 안 돼요! 혼자서 어떻게 클리어해요!”
“음. 그렇죠. 그냥 제 감이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나는 고개를 돌려 시간을 보았다.
이제 나올 때가 됐을 텐데.
“어! 던전이 소멸됐다!”
식당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TV를 쳐다보았다.
도심 한 가운데 있는 던전이 사라지고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김재권이었다.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경악했다.
“와··· 혈혈단신이잖아? 혼자서 어떻게···.”
모든 이들이 입을 다물지 못한다.
심지현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어떻게··· 어떻게 맞춘 거예요? 현민 씨, 미래에서 왔어요?”
순간 흠칫했다.
맞는 말이니까.
미래에서 회귀했으니까.
그러나 솔직하게 말할 수야 있나.
“그냥 감이에요. 저도 맞을 줄 몰랐어요. 저도 좀 떨떠름하네요.”
“대단하다. 돗자리 깔아야겠는데요? 제 미래도 한 번 맞춰줘요.”
“으음··· 글쎄요.”
장난 한 번 더 쳐볼까?
“지현 씨는 뭔가 한 달쯤 뒤에 각성 계시를 받을 것 같아요.”
“아 뭐에요. 그런 게 일어날 리가 없잖아요.”
“뭐, 믿거나 말거나죠.”
“흐흐흐, 그래도 긍정적인 말을 해줘서 고마워요. 만약에 진짜 현민 씨 말대로 되면, 밥이라도 한 턱 살게요. 현민 씨가 좋은 말 해준 덕분이니까.”
심성 한 번 곱다.
솔직히 각성 계시를 받는 것과 내가 좋은 말 해준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
어차피 일어날 일인데.
그래도 나는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친해질수록 내게 좋은 거니까.
잠시 후.
점심시간 이후의 노곤한 업무 시간.
나는 보고서를 보다말고 시계를 쳐다보았다.
2:00 PM
됐다. 드디어 기다리던 시간이 왔다.
각성 계시가 내려오는 그 시간!
[공허의 사제가 당신에게 말을 건넵니다. 당신에게 각성의 계시가 내려옵니다. ‘위대한 시험’을 치를 자격이 주어집니다. 위대한 시험은 꿈속에서 치를 수 있습니다.]
한 번 더 내게 주어진 기회.
이번엔 실패하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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