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기다
어젯밤도 그 전날의 밤과 같이 패트리샤와 함께 잠자리를 가졌다.
어제는 술도 먹지 않았다.
맨 정신이었다.
정신이 말짱한 상태였지만 패트리샤가 선사한 키스 한 번에 모든 것이 무너졌다.
아래로부터 올라온 성욕이 내 몸을 지배했다.
그것은 패트리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모든 이성을 내려놓고 서로의 육체를 탐했다.
‘하······.’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 정신을 차렸을 때.
이유를 알 수 없는 씁쓸한 기분을 느끼는 것이었다.
어젯밤 분명히 머리끝까지 차오른 성욕을 달콤하게 해소했다.
회귀 전 패트리샤와 함께 교제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모든 걸 풀어놓았다.
그럼에도 아침에 문득 찾아오는 후회감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불을 걷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현민?”
패트리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왜?”
“어땠어?”
“뭐··· 좋았지. 그렇긴 한데···.”
내가 말끝을 흐리니 패트리샤가 등을 돌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패트리샤의 알몸이 훤히 다 보였다.
“그런데 뭐가 문제야?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라도 있나보지?”
그녀의 한 마디에 난 머리에 망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순간적으로 심지현의 이미지가 그녀의 얼굴과 겹쳐지더니 빠르게 사라졌다.
그제야 나는 문득 찾아오는 후회감의 원인을 좀 알 수 있었다.
“아무 말도 못하는 거 보니까 맞는가보군.”
패트리샤가 킥킥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 상황이 도대체 뭐가 재미있어서 웃는 건지 모르겠다.
난 고개를 돌려 패트리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은 웃고 있으면서 약간은 슬픈 기색을 보였다.
“너랑 만날 때마다 무언가를 하나씩 빼앗기는 기분이 드네. 저번엔 스킬증폭구슬을, 이번엔 현민 너의 마음을.”
패트리샤가 씁쓸하게 말을 뱉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다시 밝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슬픈 기색은 싹 가시고 환하게 웃었다.
내 입술에 키스를 한 번 해주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난 패트리샤의 섹시한 뒤태를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후··· 이게 뭔 일이람.’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죄책감이 좀 들었다.
내가 패트리샤의 인생을 망가뜨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난 그녀가 당연히 얻었어야 할 스킬증폭구슬을 갈취했다.
그로 인해 그녀는 회귀 전만큼 성장을 도모할 수는 없게 되었다.
그저께 그녀가 문득 찾아 왔을 때.
그녀는 분명히 내게 마음이 이끌린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패트리샤의 마음마저 거부하고 나섰다.
비록 헤어지긴 했어도, 회귀 전에 응당 얻었어야 할 나의 마음마저 그녀는 얻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패트리샤는 회귀의 기억이 없으니 이러한 사실을 알 턱이 없다.
방금 그녀가 한 말 역시 무심코 뱉은 말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말이 내 폐부를 파고들었다.
‘아냐··· 그래도 어쩔 수 없었잖아.’
양심의 가책을 더 느끼기 전에 난 나의 마음을 달랬다.
모든 게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
스킬증폭구슬이 있어야 내가 더 빨리 성장할 수 있다.
나만이 오직 크로노스를 막을 유일한 열쇠였다.
패트리샤가 내 마음을 가지고자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비록 그녀와 몸을 섞긴 했어도 마음마저 함께 가진 못했다.
그렇다고 나를 희생해가면서 그와 교제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자꾸만 걸리는 감정이 심지현에게 비롯된 것이었음을 이제는 깨달았다.
너무 현안에만 집중한 나머지 심지현에 대한 나의 감정을 돌이킬 새가 없었던 것이다.
허나 패트리샤의 말 한 마디에 문득 깨닫고야 말았다.
덜컥 소리와 함께 패트리샤가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
그녀의 젖은 금발의 머리카락과 알몸이 훤히 드러났다.
가릴 생각조차 없이 생긋 웃으며 내게 말했다.
“너도 씻어.”
난 터질 것 같은 한숨을 꾹 참으며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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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어쩔 셈이야?”
패트리샤와 나는 서울에 도착했다.
지금 시각은 오후 6시쯤이었다.
“글쎄. 나도 날 잘 몰라서. 뭘 하면 좋을지 생각해봐야지.”
패트리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아침에 보았던 그 슬픈 기색은 이제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이전의 밝고 쾌활한 패트리샤의 모습 그대로였다.
“계속 한국에 있을 건가?”
“일단 온지 얼마 안 되었으니 이곳저곳 더 돌아보긴 해야겠지. 넌 이제 뭐할 건데?”
“난 출국 준비를 좀 해야 할 것 같아. 티베트 던전에 볼 일이 있어서 말이야.”
“그래? 지현 그 친구랑?”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패트리샤의 입 꼬리가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재밌겠네.”
그래도 겨우 웃음을 짓긴 하였다.
“준비 잘 하고, 다음에 또 연락하지.”
그렇게 패트리샤는 자신의 렌트카를 몰고 떠나버렸다.
한숨을 깊게 쉬었다.
패트리샤가 처음에 나를 만났을 때.
그때부터 나에게 모종의 이끌림을 느꼈던 것 같다.
이제야 그녀의 의아한 행동들이 조금 해석이 되었다.
심지현을 향해 인면어를 터뜨리던 모습.
내기에 져서 길길이 날 뛰는 모습.
자기 혼자 우메보시를 다 먹던 모습.
장면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그녀의 성격으로 볼 때 그녀가 내게 호감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마음 한 구석이 씁쓸했다.
어쨌든 상황은 이 지경까지 되었다.
띠리리리-
그때 내 휴대폰에 전화가 울렸다.
오서희의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
얼른 전화를 받았다.
“어, 서희야.”
- 현민 오빠! 저 레벨 45 찍었어요!
기뻐하는 오서희의 목소리가 스피커 너머로 들려왔다.
아니 벌써 그렇게 됐나?
생활이 안정궤도에 올라서 그런지 성장 속도가 예상보다 빨랐다.
이제 45레벨이 되었으니 내가 지난번에 건네준 ‘역수의 덩굴나락 레시피’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드디어 궁금증이 좀 풀리겠구먼?
“진짜야? 축하한다, 흐흐흐.”
- 오늘까지 재료 구해다가 아이템 한 번 만들어 볼 테니까, 내일 저희 가게로 방문할 수 있어요?
“오, 좋지. 그럼 내일 찾아갈게.”
전화가 끊어졌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오서희네 가게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10시쯤이었다.
오서희가 카운터에 앉아 정산을 하고 있었다.
“엇! 현민 오빠! 오셨네요!”
“이야 벌써 레벨 45야? 다시 한 번 축하한다.”
“헤헤, 고마워요!”
“네가 45 레벨이면 재호 형님은 레벨이 어떻게 되시니?”
“저랑 비슷한데 저보다 낮아요 사실. 레벨 41··· 흐흐흐.”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가게 일 때문에 바빠서 절 좀 도와주느라 오빠가 던전에 많이 못 들어가거든요.”
그렇구나.
암살자라는 클래스는 던전에서만 레벨 업이 된다.
허나 연금술사는 인간 세계에서 아이템을 만들어도 레벨 업이 되는 클래스.
그래서 어느 순간 역전을 당한 것이다.
“빨리 가게가 커야겠네. 직원도 더 고용하고.”
“안 그래도 저도 학교 다시 다녀가지고 정신없어서, 직원 모집 공고를 냈어요. 아마 곧 편해질 것 같아요.”
“그나저나 역수의 덩굴나락은 만들어 본 거야?”
“그럼요! 이번에도 S급으로 뽑았어요~ 한 번 보세요.”
오서희가 아이템을 건네었다.
담쟁이덩굴처럼 칭칭 말려있는 긴 줄기로 엮은 그물이었다.
시스템을 확인했다.
[역수의 덩굴나락]
- 분류 : 전투보조
- 등급 : S
- 효과 : 상대방이 그물을 밟으면 일정시간 유지되는 덩굴나락 속으로 빠집니다. 나락 안에 위치한 덩굴이 나락에 빠진 상대방을 공격합니다. 나락의 지속시간과 덩굴의 파워는 사용자의 마력에 비례합니다.
뭐야? 함정을 생성하는 아이템이네?
전투보조 아이템 중에 덫과 같이 상대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스킬은 많았다.
그러나 아예 함정을 생성하는 건 처음 들어본다.
역시 내가 모르는 아이템인 만큼 좋은 아이템이었다.
“어때요?”
“와··· 진짜 좋은데?”
“이거 원래 마력 비례 효과는 없었어요. 그런데 제가 아이템 몇 개를 추가해보니까 마력 비례 효과가 추가되며 S급이 되더라고요. 흐흐, 이러면 주술사한테 유용하지 않겠어요?”
그의 말이 맞았다.
모든 클래스 중에 마력을 주요하게 찍는 클래스는 주술사와 연금술사.
그런데 연금술사는 전투에 참여할 일이 거의 없다.
허니 이 아이템은 주술사를 위한 전투보조 아이템이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마법사인 나한테 더 좋다.
주술사는 집중력이 최우선이고 그 다음 마력인 반면, 나는 마력이 최우선이니까.
내가 쓰면 훨씬 더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다.
‘잠깐만··· 이거 어쩌면?’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얼마 후에 일어날 티베트의 던전 폭발.
그 사건을 적극 활용할 만한 계기가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의 레벨은 90 이상이다.
스킬증폭의 마즈다 스태프, 나의 뛰어난 스탯과 스킬 활용 능력, 마법사의 파괴력을 고려했을 때 못 잡을 건 아니다.
문제는 양.
양이 너무 많으면 정면 승부가 힘들다.
하지만 만약 이 아이템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 같다.
나락에 녀석들을 빠뜨려 놓고 집중 포화를 퍼부으면 된다.
생각해보니 독 구름과 아이스 브레스도 있잖아?
각이 나왔다.
무조건 가능하다.
기분이 좋아졌다.
“서희야.”
“넵?”
“이거 좀 많이 만들어주면 안 될까? 가능한 한 많이!”
“아··· 가능은 하죠. 그런데 재료가 싼 건 아니라서. 엄청 비싸거든요, 흐흐흐.”
“돈은 얼마든지 쳐줄게. 걱정하지 말고! 원하는 값 부르기만 해. 그래도 다 쳐줄게.”
“헤헤헤, 고마워요. 그러면 만들어드릴게요.”
“참, 그리고 이 아이템 만들었다는 건··· 한동안 비밀로 하면 안 될까?”
“흐음··· 못할 건 없는데···.”
오서희가 집게와 엄지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보였다.
그에 응당한 대가를 치르라는 것이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재밌어서 빵 터지고 말았다.
“푸흐흐, 서희 완전히 장사꾼 다 됐네?”
“그럼요, 이래봬도 이 가게 사장 아닙니까. 그래도 현민 오빠 덕에 가게 운영하고 있으니 이렇게까지 편의를 봐 주는 거예요. 아시죠?”
“크크크, 알고 있지. 고맙다, 그래.”
나는 일단 샘플로 나온 역수의 덩굴나락에 대해 값을 치른 뒤 가게를 빠져나왔다.
내일 당장 시험해봐야겠다.
- 작가의말
n8033_bluemoon-99님!!
또 한 번 후원.. 정말 감사드립니다!!
감동..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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