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계시록
[헌터들은 선택받은 자들이다. 각성의 계시는 아무에게나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계시는 위대한 자가 그 사람의 능력을 인정했다는 것을 뜻한다. 반대로 말하면 계시를 받지 못한 자들은 위대한 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한 자들이다. 일반인들이 이에 속하며 그들은 헌터에 비해 열등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잭슨이 쓴 ‘헌터계시록’의 한 페이지에 쓰여 있는 글귀다.
그와 식사를 마치면서 그는 내게 이 책 몇 권을 선물로 주었다.
당연하게도 저자의 이름은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다.
마치 하나의 종교를 낳았던 성스러운 책들이 그랬듯 말이다.
진짜 공허의 존재들에게서 계시라도 받아서 옮겨 쓴 것처럼 신비주의를 조성했다.
하지만 난 이것이 잭슨이 집필한 저서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 글귀들은 사실과도 달랐다.
각성의 계시는 위대한 자의 의지와 전혀 상관이 없이 내려진다.
이처럼 사실을 왜곡하여 헌터들의 마음을 선동하는 것이다.
[참된 인간이란 본인의 안위를 스스로의 힘으로 지킬 수 있는 사람들만을 포함한다. 우리는 갓난아이를 보고 참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인과 달리 외부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힘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헌터와 일반인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일반인은 헌터가 없으면 스스로의 안위를 지킬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참된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신비주의뿐만이 아니라 각종 사회과학적 개념들을 입맛에 맞게 변형했다.
아전인수 격으로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끼워 넣었으며 그럴듯한 이론을 구축했다.
머리가 조금 흐릿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현혹될 만큼 체계적이었다.
사실 나조차도 찬찬히 읽고 있다가 혹하는 문장들이 몇 개 있을 정도니까.
‘헌터 레지스탕스 세력이 불어난 데에는 다 이유가 있군.’
지난 생에 난 헌터 레지스탕스 사상에 대해선 간략하게 들어본 적은 있었다.
그러나 헌터계시록을 직접 읽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냥 개소리로 점철되어 있겠거니 생각했기 때문이다.
허나 생각보다 치밀한 체계와 문장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끔벅 속아 넘어갔던 것이다.
- 저희 조직은 각국에 지부를 두고 있습니다. 물론 현민 씨의 모국인 한국에도 지부가 있지요. 여기······.
난 어제 저녁에 잭슨이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그와 나는 헌터와 세계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난 전적으로 그의 비위에 맞는 말들을 했다.
그래서인지 잭슨은 절대로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당히 재능 있는 헌터 레지스탕스 멤버가 될 거라고 극찬을 쏟아냈다.
마지막으로 그는 내게 명함 한 장을 내밀었더랬다.
- 한국 지부에서 지원을 담당하고 있는 친구입니다. 모국으로 돌아가시면 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이 좋겠군요. 많은 도움을 줄 겁니다.
나는 지금 그것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하얀 바탕 외에 별달리 눈여겨볼 것이 없는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그 위에는 검은색 글씨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추호민
한국 헌터 교육 협회
지원팀
010-####-####
역시나 그럴듯한 직함이 붙어 있었다.
한국 헌터 교육 협회.
이름만 그럴듯하지 혁명을 꿈꾸는 반동 세력들이 모여드는 협회일 것이다.
교육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 보니 잭슨의 사상을 전파하는 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추호민이라···.’
추호민이라는 남자는 연금술사였다.
역시나 한국에서 대형 길드로 꼽히는 ‘결전’ 길드에서 부공방주로 활동하는 인물.
그것이 내가 회귀 전에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였다.
아, 하나 더 있네.
전사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전사 세력에게 굴복하여 온갖 아이템 생산을 맡아서 했다는 것 정도.
- 추호민 : 그러면 정확히 다음 주 서울 서대문구 ‘카르마 바’ 앞에서 봅시다.
이미 그와도 이야기를 끝내 놓은 상태였다.
약속 날짜와 장소까지 모두 정했다.
‘카르마 바’라.
아마 그들의 아지트쯤 되려나.
갑자기 분노가 치솟아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일단 조용히 들어가서 동태를 살펴봐야겠군.’
읽고 있던 헌터계시록 책을 덮었다.
책장 속에 아무렇게나 꽂아 넣고 옷을 챙겨 입었다.
‘아참··· 한 권 챙겨 갈까?’
도쿄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뒤였다.
방금 막 심지현과 함께 던전을 돌기 위해 외출을 하려던 참이다.
그런데 문득 그녀에게도 한 번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헌터계시록만 보여주더라도 헌터 레지스탕스가 뭐하는 자식들이고 훗날 어떤 일을 계획할지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인벤토리에 한 권을 집어넣고는 문밖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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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제1던전]
- 레벨 : 13
- 제한시간 : 5시간
- 인원제한 : 14명
이곳은 서울 한강 한 가운데 생성된 던전이다.
수중에 떠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 입장하는 사람을 위해 부표가 설치되어 있었다.
심지현과 함께 그 길을 따라 들어갔다.
풍경이 뒤바뀌고 동굴이 나타났다.
이곳은 파라켈수스의 땅 아조트였다.
희미하게 설치된 등불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곧 회색빛 벽돌로 건축된 사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브륀힐드의 늑대 소환.”
심지현의 스태프가 빛을 발함과 동시에 늑대의 환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르르르-!
환영은 전신에서 빛을 뿜고 있었기에 이런 어두운 곳에서 길잡이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우리보다 먼저 앞서나가면서 적들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크르르르!!
냄새를 맡았는지 적을 향해 뛰어갔다.
나와 심지현도 놈을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츠워어어어-
그 끝에 있는 녀석은 회색빛 벽돌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비슷한 색깔을 하고 있었다.
만약 감각이 조금 무딘 사람이라면 녀석이 있는 줄 모르고 지나치다가 봉변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든든한 늑대가 있었기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크르르르!
브륀힐드의 늑대가 몸을 꽁꽁 말고 있던 녀석을 힘껏 물었다
츠워어어얽!
콰아아아앙!
그러자 굉음을 내며 녀석이 폭발했다.
마치 전소해버린 재와 같던 녀석이 다시금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브륀힐드의 늑대는 다행히도 화마를 비껴나갔다.
매서운 눈빛으로 녀석을 쳐다보았다.
녀석의 이름은 ‘폭발데몬’이다.
레벨 123짜리 몬스터.
3서클 진급으로 화력의 한층 증대가 이루어졌다.
이젠 레벨 차이가 10이 넘어도 사냥이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가능만 하다면 레벨 차이가 많이 나는 몬스터를 잡는 게 유리하다.
폭발데몬은 이름 그대로 평소엔 어둠 속에 숨어 있다가 근처를 지나가는 헌터를 급습했다.
첫 폭발은 잘못 맞았다간 바로 의식불능에 빠질 정도로 데미지가 무시무시했다.
츠워어어어!!
머리 양쪽에 산양뿔이 달린 데몬은 전신에 불을 발산하며 울부짖었다.
위압감은 장난이 아니었다.
인간보다 1.5배는 큰 키로 우월하게 나를 내려다보았다.
구워어어어얽-
입에서 용암을 토해냈다.
제법 강력한 한방이었다.
잘못 맞았다간 그 자리에서 통구이가 될 것 같았다.
난 스태프를 들어 올려 ‘화염지옥’을 사용했다.
곧 내 전방에서 불꽃이 솟아올랐다.
사아아아아-
불꽃과 용암이 부딪혔다.
화염지옥은 벽 너머로 오는 상대방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스킬.
그러나 아직 1레벨에 머물고 있었다.
라르고 드래곤을 잡을 때 주로 번개광선과 독구름, 아이스브레스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레벨 차도 많이 나는 녀석이다.
그래서 전부 막아내진 못했다.
폭발데몬의 공격 중 일부는 화염을 뚫고 흘러내렸다.
한껏 달아오른 용암이 식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시작해볼까?’
스태프를 들어올렸다.
가장 먼저 사용한 것은 바로 ‘렌토의 발톱 스태프’ 사용 효과였다.
10분 동안 공격 마법의 마나 소모를 제로로 만드는 스킬.
사용과 함께 전신에 붉은 빛이 퍼져나갔다.
동시에 심지현의 각종 버프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말하지 않아도 내가 전투를 개시할 것을 알았던 것이다.
‘순간이동.’
일단 화력의 증대를 위해 나의 환영들을 소환해야했다.
순간이동을 연속하여 두 번 사용했다.
환술 스킬 효과로 환영이 두 명 생성되었다.
이 스킬들은 공격 스킬로 판정되지 않아서 마나 소모가 그대로 적용되었다.
촤아아앗-
나머지 두 명의 이현민은 ‘맹독연꽃’을 사용했다.
화염지옥의 너머에 연꽃 두 송이가 피어올랐다.
그놈들의 꽃술에서는 주기적으로 독침이 발사되었다.
불타오르는 녀석의 몸뚱어리를 찌르고 들어갔다.
츠워어어어-!
폭발데몬은 독침들을 귀찮아하며 울음을 토했다.
자꾸만 본인의 몸을 파고들며 지속적인 데미지를 입혔기 때문이다.
아마 본인은 모르겠지만 마법 방어력도 계속 떨어지고 있을 것이다.
녀석은 연꽃에 달려들어 뿌리를 뽑았다.
그러나 곧 소용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두 명의 이현민이 계속 맹독연꽃을 소환할 거거든.
10분간 마나도 무한이나 마찬가지니까.
츠워어어-!
드디어는 이 상황을 못 참고 내게로 돌진했다.
그러나 어림도 없지.
세 명의 이현민이 동시에 화염지옥을 사용했다.
두껍게 형성된 화염지옥에 부딪치자 녀석의 몸 곳곳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뒤로 물러났다.
구우우우-
이때 나는 빙결대검을 시전했다.
빙결대검은 익스플로젼보다도 약간 많은 시전 시간을 요구했다.
마력을 집중하여 빙결대검을 사용하면 하늘에서 냉기가 검형을 이루며 응축되었다.
그것이 빠르게 완성을 이루고 나면 그제야 목표물을 향해 떨어졌던 것이다.
쐐애애애액-
츠워어어얽-!!
하늘에서 빙결대검이 떨어졌다.
폭발데몬의 머리 위를 정확히 가르고 지나갔다.
냉기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몸이 활활 타고 있던 녀석의 전신이 완전히 굳어버렸다.
단 한 방만에 동결 상태에 걸린 것이다.
외모에 걸맞게 얼음 속성이 약점이었던 모양이다.
크르르르!!
동결된 녀석의 몸뚱어리를 향해 브륀힐드의 늑대가 뛰어들었다.
이곳저곳을 거칠게 물어뜯었다.
소환되어 있는 네 개의 맹독 연꽃은 계속해서 독침을 뿜어댔다.
독침에 노출된 폭발데몬은 중독 상태에 빠져들었다.
동시에 5분의 시간이 지났기에 두 명의 이현민이 모두 사라졌다.
뭐, 상관없었다.
이미 녀석은 독 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이다.
쐐애애애액-
나는 녀석의 머리통 위로 빙결대검을 꽂아 넣었다.
화르르륵!
그 와중에 발밑에서는 화염지옥을 지폈다.
지속적으로 폭발하며 데미지가 들어갔다.
여기에 중독 효과가 붙어 추가 데미지가 터져 나왔다.
츠워어어···
빙결대검을 세 개 째 꽂아 넣었을 때.
폭발데몬이 목숨을 잃었다.
화려하게 타오르던 녀석의 육체는 이전의 잿더미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얼음찜질이 매섭긴 매서웠나 보다.
검게 물들어 있던 전신은 표백이라도 한 듯 하얗게 질려 있었던 것이다.
좀 불쌍하긴 하네.
가만히 서서 아무것도 못한 채로 죽음을 맞이했으니.
‘역시 이 정도 화력이면 123짜리 몬스터도 문제없군.’
난 이 광경을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확실히 앞으로의 성장세는 이전보다 좋아질 것이다.
라르고 드래곤의 던전과 같은 특수한 사건이 없더라도 말이다.
레벨 차가 많이 나는 몬스터를 사냥하며 빨리 성장해야겠다.
그리고 최대한 단기간 내에 헌터 레지스탕스의 뿌리를 뽑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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