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세르크세스
[서울시 금천구 제1던전]
- 레벨 : 14
- 제한시간 : 5시간
- 인원제한 : 21명
던전 출입 메시지와 함께 풍경이 사막으로 변했다.
오랜만에 마즈다의 던전을 방문하니 기분이 남달랐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모래사막이 마치 내 고향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이곳에서 워낙 많은 일들을 치러 냈기 때문일까.
진급도 하고, 존재 등급도 올리고, 좋은 아이템도 얻고.
오늘의 방문목적은 딱 하나였다.
도제에서 수제자로 존재 등급을 올리는 일.
그 퀘스트를 진행하기 위해서 다시 마즈다를 찾은 것이다.
14레벨 던전이기 때문에 이곳엔 130레벨 대의 몬스터가 출현했다.
주요 몬스터는 132레벨의 미라 코끼리.
최근에 138짜리 샴 오크를 잡던 나로선 힘든 상대가 아니었다.
마주치는 코끼리들을 모두 학살하며 길을 찾았다.
도제 시련 때와 마찬가지로 멀리서 쓰러져가는 유적지를 발견했다.
회색 기둥들로 둘러싸인 원형 경기장이었다.
한 발짝 들여놓자마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수제자 시련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크세르크세스의 환영이 소환됩니다. 당신의 현재 능력에 따라 크세르크세스의 환영의 힘이 결정됩니다.]
경기장의 가운데서 모래 폭풍이 일기 시작했다.
폭풍 속에서 나타난 건 크세르크세스의 형상이었다.
남자답게 생긴 다리우스와 달리 그는 호리호리한 체격을 갖고 있었다.
노란 빛이 감도는 마법사용 로브가 그의 체형을 감춰주고 있었다.
[소환이 완료되었습니다. 경기장 밖을 벗어나면 환영이 사라집니다. 이 점에 유의하여 주십시오.]
경기장을 둘러싸고 결계가 형성되었다.
가운데 있던 크세르크세스의 환영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 반갑습니다. 이현민 씨.
크세르크세스는 나를 상당히 존중한다는 듯 존댓말로 말을 걸었다.
처음부터 반말로 시작했던 다리우스와는 차원이 다른 대우였다.
그의 인사에 화답하여 꾸벅 고개를 숙였다.
- 자라투스트라님의 회귀를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저도 당신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군요.
그는 내 생각을 이미 읽고 있다는 듯이 의문을 해소해주었다.
회귀를 받았다는 사실이 나를 존중해줄 만큼 중요한 사실인가?
하긴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는 권능을 나를 위해 사용해주었으니.
특별한 일이긴 하다.
- 흐음··· 꽤나 성장을 많이 한 모양이군요. 환영에 제법 많은 파워가 구현되었어요.
수제자 시련에서 신장의 환영은 나의 상태창을 반영하여 파워가 결정된다.
크세르크세스는 환영에 모인 힘을 느끼면서 이 말을 하였다.
나의 성장세를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 어때요? 마법사 클래스는. 할 만한가요?
“아주 좋습니다. 회귀 전에도 이런 클래스가 있었다는 걸 진작 알았더라면···. 솔직히 사냥효율만 놓고 보면 이만한 클래스가 없더라고요.”
- 오호, 그렇군요. 자라투스트라님의 힘이 시스템을 통해 드러난다면 어떤 식으로 발휘될지 궁금했는데. 괜찮다고 하니 다행이네요.
크세르크세스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신장이라면 위대한 자의 바로 밑의 단계라고 해도 될 만큼 뛰어난 존재이다.
왜 시스템에 대해 잘 모르는 걸까?
명쾌하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심지어 자라투스트라에게서도 말이다.
그조차도 시스템의 한계에 대해 뚜렷하게 예측할 수 없다고 말한 적 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걸까.
“크세르크세스님 역시 시스템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 잘 모르시는 건가요?”
- 그럼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저희는 시스템이라는 것 없이 살아가는 걸요. 현민 씨와 이렇게 맞대면을 해야 할 때만 일시적으로 시스템의 매개를 받을 뿐이죠.
“자라투스트라님은요? 그분도 역시 마찬가지인가요?”
- 저보다는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해요. 그러나 전체를 다 아실 지는 저도 잘 모르겠군요. 협약이 진행될 동안 자라투스트라님이 워낙 바쁘셨거든요.
“바쁘셨다고요?”
- 네.
“무슨 이유죠?”
- 흠, 이런 건 발설하기 좀 꺼려지는데. 그냥 ‘반란진압’ 정도로만 생각하면 좋겠군요.
그 말 한 마디만 들었는데도 대략 어떤 상황인지 감이 왔다.
마즈다는 위대한 자가 있는 땅.
위대한 자라는 것도 영속적이진 않을 것이다.
힘을 기른 자가 나타난다면 언제든지 뒤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아마 자라투스트라는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새로운 위대한 자의 후보를 막느라 바빴던 것 아닐까.
- 크로노스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크세르크세스가 다소 침착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야기가 내게는 민감한 이야기임을 알았던 탓이다.
- 현민 씨는 막중한 책임을 안고 있더군요. 크로노스를 막아야만 하는.
“······그렇습니다.”
- 그런데 왜 크로노스가 인간 세계를 노리는 거죠?
“······.”
예상치 못하게 치고 들어오는 날카로운 질문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질문에 대해 그를 납득시킬 만한 대답을 내놓을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일단 내게 중요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어쨌거나 크로노스가 전사들로 하여금 인간 세계를 정복하게끔 했다는 것.
그로 인해 많은 살육이 일어났고 인간 세계가 처참하게 망해갔다는 것.
이런 일들을 막기 위해 내가 노력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왜 크로노스가 인간 세계를 노리는지 그것에 대해선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아니, 그게 내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기에 많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이유를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는가?
그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크로노스를 찾아가 설득이라도 할 텐가?
만약 이유가 있다고 해도 나의 컨트롤 밖일 확률이 높았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해야 했다.
-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가 힘들거든요. 혹시 회귀한 현민 씨는 아시나 싶어 물어본 거예요.
그런데 이 앞에 있는 남자가 이 사건이 일어난 본질에 대해 묻고 있었다.
솔직히 오히려 신장씩이나 되면 나는 그 이유에 대해 알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이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것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었다.
무어라고 답해주어야 할까.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려 봐도 단서는 없었거든요.”
- 그래요?
크세르크세스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별 수 없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어깨를 으쓱였다.
- 흐음, 도대체 무슨 꿍꿍이일까요? 뭐··· 그냥 재미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는 듯 말을 뱉었다.
그 말을 듣자 난 속으로 압도되고 말았다.
위대한 자란 그런 존재들인가.
인간이란 하찮은 개미를 자기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도 있는 그런 자들이란 말인가.
뚜렷한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단지 유희를 위해서······.
존재의 현격한 격차 앞에서 몸이 저절로 떨렸다.
- 잡설은 여기까지 해두죠. 이야기나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니잖아요?
크세르크세스가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씨익 웃음과 동시에 온몸에서 노란 오오라가 퍼져나갔다.
그것을 보는 것만 해도 움찔거릴 정도의 위용이었다.
‘역시 S- 난이도라더니. 쉬운 상대가 되진 않겠다.’
- 아참, 한 가지 빼먹을 뻔했네. 지더라도 걱정 마세요. 죽이진 않으니까. 중상으로 끝나지 않을까요? 아마 많이 아플 거예요. 아주 많이.
말을 마침과 동시에 크세르크세스의 전신에서 번개가 뿜어져 나왔다.
그의 몸에서 가시처럼 솟아나온 번개들은 결계를 향해 사방으로 뻗어갔다.
방심했던 탓에 흐르는 전류에 일부분 타격을 입고 말았다.
‘으으으···.’
찰나의 일격이었다.
스쳤을 뿐인데 온몸을 파고드는 고통이 느껴졌다.
흘러나오려는 신음성을 간신히 틀어막았다.
그의 힘은 나의 힘을 거울처럼 반영한다.
그의 파워 최대치가 어느 정도일지는 나도 예측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강력한 한 방은 아니었다.
처음이다 보니 힘을 아꼈던 것이다.
만약 방심한 상태로 최대치의 공격을 맞았다면 난 한 방에 패배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크세르크세스는 스태프도 안 들고 있잖아?’
스태프를 들고 있는 나의 모습과 대조를 이루었다.
역시 마법의 본고장답게 스태프 없이도 자유자재로 마법을 사용하는 모양이다.
이러면 난이도는 더욱 올라간다.
다리우스 때에는 스태프의 위에 떠오르는 빛깔을 보고 스킬 사용을 대충 예측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스태프가 없어 그런 것도 불가능했다.
S-난이도에 걸맞은 조건이었다.
콰과과과강-
다시 한 번 그의 몸에서 번개들이 뚫고 나왔다.
이번에는 방심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순간이동을 사용할 수 있었다.
동시에 환영을 남겨두었다.
그러나 내 자리에 있던 환영은 쇄도하는 번개로 인해 큰 타격을 입고 말았다.
소멸을 간신히 면하고 나의 형상으로 서 있었다.
콰과과과강-
쉴 틈을 주지 않고 쇄도하는 번개.
이번엔 화염지옥으로 겨우 막아냈다.
이대로 당할 순 없었기에 그에게 공격을 시도했다.
두 곳에서 동시에 번개광선이 뻗어나갔다.
화염지옥마저 통과하여 크세르크세스에게로 쇄도했다.
- 흐흐흐······.
콰아아아앙!
허나 뻗어나간 번개광선들은 그의 몸에서 폭발하는 마력의 기운과 함께 도로 튕겨 나왔다. 광선은 산산이 부서져 자그마한 전류가 되었고, 경기장 내부의 곳곳에서 반사되어 장내를 어지럽혔다.
‘으으으··· 저건 또 뭐람···.’
나는 사방으로 화염지옥을 지핀 채 날아드는 번개를 방어해야만 했다.
환영은 번개폭풍에 휩쓸려 소멸되고 말았다.
이제 환영의 남은 소환 횟수는 하나밖에 없었다.
- 팁을 하나 드릴까요?
크세르크세스가 공격을 멈추고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화염지옥을 거두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 번개속성 공격은 제 환영에게 전혀 소용없을 겁니다.
역시 그랬던 것이다.
노란 로브와 오오라를 보았을 때 눈치 챘어야 했다.
그는 번개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마법사였던 것이다.
번개광선이 산산이 흩어져 도로 튕겨져 나온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그는 번개마법의 흐름을 읽었고 그것을 파훼할 줄도 알았다.
‘젠장 번개광선이 3서클 스킬 중엔 가장 레벨이 높은데.’
생각보다 큰 난관이 찾아왔다.
내가 가진 3서클 공격마법 중에서 레벨이 가장 높은 것이 번개광선 스킬이었기 때문이다.
번개광선이 4레벨, 빙결대검과 맹독연꽃이 3레벨, 화염지옥이 2레벨이었다.
가장 강력한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는 스킬 하나가 봉쇄된 것이다.
‘어쩔 수 없군.’
안타까워할 시간이 없었다.
빠른 판단이 중요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음식을 씹어야 한다.
번개광선이 안 되면 빙결대검을 주력으로 사용하는 수밖에 없지.
빙결대검을 시전했다.
하늘에서 냉기가 피어올라 검의 형상을 이루었다.
곧바로 크세르크세스의 머리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로운 표정으로 하늘 위를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무슨 스킬을 사용하는지 예측하기만 하면 순간이동을 쓰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미 내 스태프에서 피어오른 불빛의 색깔을 보고 빙결대검을 쓸 것을 알고 있었다.
쐐애애애액-
빙결대검은 그를 향해 떨어졌다.
하지만 이내 그의 형상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대검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냉기를 발산하고 사라졌다.
콰아아앙-
“으억!”
강렬한 폭발음과 함께 나는 옆으로 쓰러졌다.
크세르크세스의 환영이 나의 옆에 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마나 폭풍을 사용하여 나를 뒤로 튕겨내었다.
환영은 음흉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으으···.’
난관에 봉착했다.
크세르크세스의 환영은 나의 힘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다리우스 때보다도 훨씬 강력했다.
마력이 증가한 만큼 내 마법 방어력이 좋아진 건 아니니 공격 하나하나가 위협적이었던 것이다.
방어구들이 벌써 너덜거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크세르크세스는 나의 수를 모두 읽고 있었다.
손을 쓰기가 힘들었다.
확실히 난이도의 격차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난 얼른 몸을 추스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뭔가 허전함을 느꼈다.
‘잠깐만···?’
내 손에 들려 있던 스태프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 이런 이런···
크세르크세스의 조롱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주변을 살펴 내 스태프를 찾았다.
- 스태프를 놓치면 쓰나요?
그가 손을 뻗어 가리킨 곳.
바로 크세르크세스의 앞에 그것이 떨어져 있었다.
- 작가의말
hskelly님!! 후원금 감사합니다ㅠㅠ
오늘 한 편 더 올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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