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스의 낫
“생각은 정하셨습니까?”
다시금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김재권과 현정환. 김재권은 여전히 건방진 태도로 그에게 말하고 있다. 현정환은 손사래를 치며 짜증을 냈다.
“또 불쑥 찾아와서 하는 소리가 그 소리인가? 집어치우게.”
이번에도 김재권은 현정환에게 연락도 없이 찾아왔다. 현정환은 그런 그의 무례함에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제 시간이 거의 없습니다.”
“알아 나도. 레벨 200까진 1레벨밖에 안 남았지.”
“얼른 크로노스의 낫에 가입하시지요.”
“싫어. 자네가 자꾸 꼬드기니까 더 짜증나. 얼른 레벨 200이나 찍어야겠어. 그래야 네가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자꾸 지랄하는지 알지.”
레벨 199를 찍은 현정환은 여전히 단호했다. 크로노스의 낫에 가입하는 걸 완강히 거부했다.
“그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선생님.”
완강하기는 김재권도 역시 마찬가지. 그도 역시 생각을 굽히지 않고 현정환을 꼬드기려 했다.
“두고 봐야 알 일이지. 이제 할 말 다 했는가?”
“후회하실 겁니다.”
“그만 닥치고 나가게.”
“······.”
현정환의 역정으로 겉으로만 평온해보이던 대화가 중단되었다.
김재권은 더 이상 그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정환의 생각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레벨 200이 되더라도.
김재권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표정은 한없이 침착하고 또 차가워보였다.
곧장 문을 박차고 나갔다.
현정환은 입술을 실룩이며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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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이, 현민!
수화기 너머에서 패트리샤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밝고 활발했다. 영어로 대답했다.
“오랜만이네. 무슨 일이야?”
- 너 엄청 유명해졌더라?
어디에서 내 소식이라도 주워들었나보다. 하긴, 최근에 영국에서 헌터 레지스탕스가 소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귀족 집안인 그녀는 자연스레 그 전말에 대해 알게 되었겠지. 그 출발점에는 내가 있었으니까.
“뭐, 그래도 너만 하겠냐.”
- 야, 심지어 그리고 너 마법사 클래스였다면서?
“그렇지.”
- 나한테 주술사라고 그러더니? 거짓말이었네?
“흠, 미안하다.”
- 실망이야.
“솔직히 이해해줘라. 어디 가서 마법사라고 이야기하고 다닐 순 없잖아?”
수화기 너머에서 패트리샤가 낄낄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말만 실망이라고 하는 것뿐이지 진지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언제나와 같이 장난스레 말을 이었다.
- 나 조만간 한국 한 번 갈 것 같아.
“한국? 무슨 일인데.”
- 스킬 획득 퀘스트 때문에. 공교롭게도 위치가 한국이더라고.
“그래? 무슨 스킬이야?”
- 용오름.
용오름.
회오리 폭풍의 상위 스킬.
쏘아올린 화살이 용의 형상으로 화해 상대방을 요격하는 기술.
강력한 파워를 지닌 스킬인 만큼 높은 레벨에서야 획득할 수 있다. 그녀가 이 스킬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최소 레벨 140은 되었다는 소리.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너 레벨이 왜 그러냐?”
- 크크, 언제 이 스킬을 얻는지 대충 알고 있나보네?
“렙 몇인데?”
- 141.
역시 그랬군.
말도 안 되는 성장이다.
스킬증폭구슬을 얻었던 지난 생이랑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번 생에 난 그것을 선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회귀 전의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다. 무슨 작심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도대체 사냥을 얼마나 다닌 거냐?”
- 말도 말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사냥만 해댔으니까.
“대단하네.”
- 그래도 너한테는 안 될 것 같은데. 지금 넌 레벨 몇이지?
“190.”
나 역시 놀고 있었던 건 아니다. 레벨 190을 찍고 서클 역시 4서클로 진급했다.
- 이것 봐. 듣자하니 마법사라는 게 성장에 엄청 유용한 클래스라면서? 이거 완전 그거 아니야? 너희 나라 말로 뭐라고 하던데··· 그··· 그···
패트리샤는 입 끝에서 말이 맴돌기만 할 뿐 단어를 기억해내진 못했다. 난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대충 알 것 같아 말을 뱉었다.
“금수저?”
- 맞아. 금수저.
“영국 귀족 집안인 너한테 그런 소리는 듣고 싶진 않은데······.”
그녀의 집안 후광은 내가 도저히 넘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귀족인데다가 여러 기업과 금융회사를 거느린 대재벌.
내가 레벨이 높아서 사냥을 하기만 하면 떼돈을 벌었지만 그녀의 재산은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녀의 집안은 자수성가라는 말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 됐고, 한국 가면 얼굴이나 보자고.
“그래, 알겠다.”
나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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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탄의 위대한 낫, 크로노스가 당신에게 이미 모든 것은 되돌릴 수 없다고 말합니다.]
김재권의 머릿속에 들려오는 크로노스의 음성.
[티탄의 위대한 낫, 크로노스가 현정환은 이미 가망이 없으니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아주 잔혹한 음모를 품고 있는 음성이었다.
이것은 비단 김재권의 머릿속에만 들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김재권과 함께 있는 크로노스의 낫 일원. 그들의 머릿속에도 똑같은 메시지가 들려오고 있다.
“크로노스님이 결단을 내리셨군요.”
김재권이 가장 먼저 입을 떼었다. 함께 있던 아홉 명의 전사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크로노스의 낫의 일원 중에서도 국적이 한국인 사람들. 그 중 우두머리는 김재권이었다.
그는 비록 날고 긴다는 다른 전사들보다 레벨이 낮았지만 리더가 될 수 있었다. 이유는 바로 크로노스가 전적으로 지지를 했기 때문. 누구보다 그를 통해서 명령을 했고, 누구보다 그에게 많은 신임을 주었다.
그의 현재 레벨은 212. 그보다 레벨이 높은 전사들은 크로노스를 따랐기에 그를 따랐다.
그 중 하나였던 함지영의 레벨은 219였다.
“이렇게 또 아까운 전력을 잃게 되겠군요.”
함지영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를 포함한 모두가 현정환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끈질기게 그를 포섭하려고 했던 것도 그의 실력이 아까웠기 때문.
“어쩔 수 없죠. 크로노스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 순간부턴 오히려 적이 될 뿐이죠.”
“그래서, 계획은 뭡니까?”
함지영의 말에 김재권이 눈을 감았다. 속으로 크로노스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중이었다. 곧 크로노스의 대답이 머릿속에 울렸다.
[크로노스가 지금으로부터 5일 후, 경상북도 울릉군에 있는 21레벨 던전이 폭발할 예정이라고 말합니다.]
언뜻 들으면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장. 그러나 김재권은 곧바로 크로노스의 저의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눈을 부릅떴다. 함지영은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울릉도에 있는 21레벨 던전 하나가 얼마 후 폭발한다고 하네요.”
“던전 폭발이요? 그게··· 이번 일과 무슨 상관이라는 거죠?”
“21레벨 이상의 던전은 헌터협회에서 특수 관리를 하죠.”
21레벨 던전은 레벨 200대의 몬스터가 출현한다. 하지만 헌터 중에 200이 넘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당장 한국에 있는 헌터의 총 수를 세보면 열여섯 남짓.
그 중에 전사가 열이고 암살자가 하나,
저격수가 하나, 주술사 하나, 탱커 하나, 대장장이 둘이었다.
그러니 만약 21레벨 던전이 폭발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장 폭발을 진압할 사람을 구하기도 힘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이상의 던전들은 특수 관리를 했다. 레벨 200 이상의 헌터들은 던전 폭발이 일어났을 때 우선적으로 이 작전에 투입되어야 할 의무를 졌던 것이다.
“제가 보니 이틀만 더 있어도 현정환은 레벨 200을 찍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도 이번 폭발 진압에 참여를 해야 한다는 뜻이군요.”
“법적으로 그렇게 되죠.”
김재권이 씨익 웃었다.
“던전 폭발이 일어날 때를 노려 작전을 실행합니다. 공교롭게도 위치가 울릉도라 작전을 실행하기 안성맞춤이군요.”
사면이 동해 바다로 둘러싸인 울릉도. 한 번 들어오면 빠져나가기 힘든 곳이다.
이런 곳에 폭발이 일어난다는 것은 사실상 무법지대가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 모든 행정 사법이 마비될 것이다.
이곳에선 어떤 일이 발생해도 아무도 관여할 사람이 없다는 거다.
“같이 투입되는 헌터들이 있을 텐데, 누가 그들과 같은 팀이었죠?”
“저입니다.”
구석에 있던 조재석이 손을 들었다.
그는 레벨 203으로 갓 크로노스의 낫에 들어온 헌터였다. 그는 레벨 200이 넘는 다른 한국 사람들과 한 팀을 맺고 있었다.
암살자 하나, 주술사 하나, 탱커 하나, 저격수 하나. 여기에 조재석이 더하여 한 팀을 이루었다. 사실상 대장장이, 전사를 제외한 다른 클래스들이 모두 조재석의 팀원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재석 씨가 그들의 시선을 끌어주시면 좋겠군요.”
조재석이 다른 클래스들과 함께 다니며 시선을 분산시킨다.
와중에 김재권은 현정환을 암살할 것이다.
“나머지 분들은 알아서 하셔도 좋을 것 같군요. 저와 지영 씨 정도면 그 할배를 처치하는 데는 문제없을 테니까요.”
김재권의 입 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그것은 사냥의 시작을 알리는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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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전라도 전주시의 한 던전.
콰과과과광-
패트리샤가 쏘아올린 화살이 흑룡으로 화했다.
물리계에서 존재할 수 없는 검은색의 빛.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용오름 스킬은 그것을 가능케 했다.
흑룡이 검은 빛을 뿜으며 몬스터를 향해 쇄도했다.
꾸어어어억!
그 날카로운 예기에 신음하며 쓰러지는 몬스터. 가히 레벨 140때 배우는 스킬이라고 할만 했다.
“어때?”
패트리샤가 자신감에 가득 찬 표정으로 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새로 배운 스킬이 아주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지금 나에게 용오름을 여섯 번째 선보이는 중이다.
“멋있네.”
“쳇, 싱겁기는.”
“시간 다 됐으니까 나가기나 하자고. 지현 씨 기다리겠어.”
심지현 얘기가 나오자 패트리샤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녀는 이미 나와 심지현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후였다. 지금껏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속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발걸음이 짐짓 어색해졌다.
“오랜만이에요!”
던전에서 빠져나오자 심지현이 우릴 맞았다. 그녀는 패트리샤를 향해 영어로 인사했다. 패트리샤는 간단히 ‘Hi’라고 한 마디를 뱉고는 장난스레 웃었다.
우리는 근처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패트리샤가 떡볶이를 한 번 맛보고 싶다고 이야기해서 메뉴는 자연히 떡볶이로 정해졌다.
그녀는 음식이 나오자 이리저리 살피더니 한 입 베어 물었다. 상당히 매웠던 모양이다. 채 삼키지도 않았는데 물을 연신 들이킨다.
“Oh My God! 이런 걸 먹는다고?”
“자기가 먹고 싶어 했으면서······.”
우리는 그렇게 오랜만의 회포를 풀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패트리샤는 이제 슬슬 매운 맛이 익숙해졌는지 연거푸 떡볶이를 흡입했다.
“그래, 내가 말한 건 생각해봤어?”
“아 그거? 길드원들 교육시키는 거?”
외유내강 길드에는 훌륭한 저격수가 없었다. 임우진과 같은 팀의 저격수, 레벨 117의 이수현 역시 그다지 실력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현정환은 언제나 이것을 걱정했다. 본인은 전사 클래스이니 저격수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한다.
그러나 외부에서 사람을 들이기는 또 힘들었다. 길드의 정체성이 정체성인 만큼 실력 좋은 저격수들은 길드에 들어오고 싶어 하지 않았다.
돈을 주고 고용하기에도 예산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지금 난 인맥을 동원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외유내강 길드와 현정환에 대해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도 되겠지.’
현정환의 원을 들어주는 것이 단지 목적은 아니었다.
패트리샤는 헌터 세계에서는 전 세계적 유명 인사였다.
그녀가 만약 외유내강 길드와 조금이라도 엮인다면?
언론에 이름이 나기도 좋았다.
며칠 전.
현정환이 막 200을 찍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사도 시련도 오늘 중 끝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크로노스의 속삭임을 들을 것이다.
난 그것을 이용하려고 한다.
그는 크로노스의 속삭임을 듣고도 크로노스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크로노스의 음모를 세상에 밝힐 유일한 증인이 될 수 있다는 것.
크로노스의 낫에 가입하지도 않았으니 그가 미리 제거될 염려도 없었다.
어쨌든 이런 일련의 계획들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선 일단 이름을 알리는 게 좋았다. 패트리샤를 끌어들이는 것도 그 때문이고.
“나야 상관없는데, 내가 한국어를 못해서. 영어 잘 하는 사람 있나?”
“이수현 그 사람 미국 유학 출신이야. 아마 그 분이 도맡아서 통역도 할 테니까, 문제없을 거라고 봐.”
“그러면 뭐, 오케이. 잠깐 동안이니까.”
“고맙다.”
“네 부탁이니까 들어주는 거야.”
원래라면 거금을 불러도 시원찮을 부탁. 그래도 패트리샤는 흔쾌히 그것을 수락했다. 인맥이 역시 좋긴 좋은 거다.
“그러면 다 먹고 길드 한 번 방문하자고.”
그때 식당에 있는 티비 화면이 순간적으로 변했다. 드라마만 나오고 있던 와중에 갑자기 긴급뉴스가 떠오른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티비로 쏠렸다.
“오늘 오후 1시, 울릉도에 있는 21레벨 던전이 폭발했습니다. 갑자기 터진 던전 폭발로 주민들 모두가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순식간에 일대가 마비되어 당국은······.”
앵커가 격앙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그것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맞아, 지금쯤이긴 하지. 울릉도에 있는 던전이 폭발한 것이. 내 기억으론 오늘 중으로 금방 진압되었던 것 같은데.’
침착한 표정으로 떡 하나를 집어 들었다. 오물오물 씹었다.
그런데 씹으면 씹을수록 배어나오는 생각들이 있었다.
점점 표정이 어두워졌다.
‘젠장··· 설마···.’
이거··· 계획이 틀어질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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