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평지전
항응은 마상전투에 문외한이다. 어떤 무공서적도 마상전투에 대해 서술하지 않는다. 적구를 타고 육십여명의 퇴역한 흑풍혈로의 노병들과 훈련을 하며 마상전투를 체험한 항응은 만만치 않음을 확인했다.
우선 말을 달리면서 내공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 내단으로 단전을 대체하고 부분적으로 무혈지신을 이룬 항응도 운기가 자연스럽지 못한데 다른 무인들은 더 말할 것이 없다. 그렇다고 말을 타지 않고 걸으면서 싸우면 크게 손해를 본다.
말과 마갑 그리고 말을 탄 기마병의 무게가 휘두르는 장병기에 합쳐져서 일격이 수백근의 힘을 포함한다. 말을 타고 높은 위치에서 장병기로 내려찍는 일반병사가 무공고수와 같은 공격을 하는 것이다.
말을 타지 않은 무인은 말을 탄 일반 기마병과 전투력의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무공을 익혔다고 더 좋은 대우를 바라는 무인을 굳이 효율을 중시하는 군대에서 반길리가 없다. 무인을 전장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지휘자를 지키게 하는 것이다.
항응도 수련의 부족으로 근력과 체력이 부족하다. 내공으로 그 부족한 부분을 메꾸어왔는데 말에 타니 운기가 자연스럽지 못해서 가진바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나이가 사십정도 되는 노병들의 체력과 근력도 별로 좋지는 않았다.
쉬는 시간에 항응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아직도 패왕성의 회신을 받지 못했다. 만약 이 육십여명을 데리고 복수를 해야 한다면 자신의 지금 상태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말을 타면서도 내공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말을 타면서 내공의 사용이 어려운 것은 몸이 계속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혈도에서 혈도로 내공을 보내는 것이 힘들다. 혈도의 위치는 감으로 잡는 것인데 흔들리는 말에서 정신을 집중하여 혈도의 위치를 감지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항응은 나무밑에 앉아 맹룡도의 운기경로를 하나하나 점검했다. 해납백천을 얻은 후 맹룡도의 수련을 소홀히 한 감이 있었다. 맹룡도는 항응이 알고 있는 유일한 운기법이다. 그러니 답을 맹룡도에서 찾아야 한다.
수백가지 운기경로를 하나씩 짚어본 후 같은 혈도를 지나지 않는 운기경로를 동시에 시전해 보았다. 맹룡도의 운기법을 수련하며 항응은 무혈지신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
항응의 무혈지신은 혈도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만약 사라졌다면 사라진 혈도들로 운기가 되지 않아야 한다. 진짜 무혈지신은 명경대사처럼 무공을 사용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내공이 혈도를 지날 때 속도나 양의 손실이 전혀 없기에 무혈지신이라 오해한 것이다.
반면 항응은 웬만해서는 자신이 내상을 입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얻었다. 현재 항응은 팔다리와 정수리를 제외하고 나머지 부분을 단전이라고 봐도 될 정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운기가 어지간히 복잡하고 다양하게 꼬이지 않는 이상 단전에 타격이 가지 않는다.
해룡과의 일전도 그렇고 호연에게 선기불신을 시전하며 모험을 할 때도 그렇고 단전은 항상 버텨줬다. 그저 행운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본인의 실력이었다. 항응은 오전내내 기마전투를 훈련하면서 짓밟혔던 자존심이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오후에 훈련이 시작되자 항응은 더욱 과감하게 운기했다. 오전내내 힘과 체력이 딸려 어수룩한 모습만 보여주던 항응이 오후에는 숨 한번 헐떡이지 않고 시종일관 강한 모습을 보여주자 노병들은 항풍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몰래 눈물을 흘렸다.
항응의 노력에 힘입어 노병들도 나이를 잊고 훈련에 매진했다. 결국 저녁때에 전부 탈진하여 항응이 내공으로 일일이 기운을 북돋워 주었다. 기마전투에 재미를 붙인 항응은 저녁에도 홀로 적구를 타고 전투술을 연마했다.
며칠간 전투술을 연마한 항응은 더 훈련을 해봤자 크게 나아질 것이 없다는 생각에 전장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전투에 합류하여 북한과 요나라의 연합군을 물리친 후 태원까지 진군한다는 것이 항응의 목표이다. 물론 항응이 멋대로 정한게 아니고 조광윤이 시영의 계획을 항응에게 귀뜸해 준 것이다.
삼년전 북한과 요나라가 연합하여 침공했다가 곽위에게 호되게 당한적이 있었다. 그후 곽위가 죽기전까지 북한과 요나라는 한번도 침공을 시도하지 않았다. 시영은 이번 기회에 확실한 힘의 우위를 보여줘서 강남을 통일할 동안 북의 우환이 없기를 바랐다.
항응은 떼를 쓰는 소월과 검동을 떼어놓고 전장으로 출발했다. 둘다 어느 정도 무공에 자신있어 했지만 항응은 전장에서 두사람이 아무 힘도 쓰지 못할 것임을 안다. 사람을 향해 칼을 휘두른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미리 조광윤에게서 받은 마패를 이용해 성문을 나섰다. 전장이 될 것으로 예상한 택주를 향해 말을 천천히 달렸다. 노병들에게서 배운 것인데 싸우기 전에 제대로 못 달리게 해서 말들의 흉성을 최대한 격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천히 전장을 향해 이동하는데 뒤에서 먼지바람이 일더니 수백의 기마병이 달려왔다. 하나밖에 없는 눈을 찌푸리고 관찰하던 애꾸눈이 껄껄 웃으며 옆사람에게 말했다.
"우리 성주께서 성질이 아직 그대로군. 귀여운 후배들이 왔다네."
잠시후 항응의 눈에도 진천일후 서영의 얼굴이 보였다. 아마 애꾸눈은 흑풍혈로만의 어떤 특징을 통해 미리 알아본 듯 했다. 서영은 항응의 앞에 도착하자 말에서 내려 한쪽 무릎을 꿇고 서신 하나를 공손히 받들어 올렸다.
서신의 내용은 간단했다. 패왕성을 비울 수 없어 흑풍혈로를 보내니 복수를 하고나면 함께 패왕성으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따뜻한 문안 한마디 없고 격려 한마디 없었지만 항응은 오히려 자신을 믿어주는 듯 해 기분이 좋았다.
서영은 노병들과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곧 항응을 대장으로 하고 서영이 부대장을 맡았다. 마갑이 없는 노병들은 가장 뒤에서 달리게 했다. 흑풍혈로의 말은 부대이름과 다르게 백마도 끼어 있었다. 하지만 말에게 씌운 마갑은 전부 검은색으로 통일했다.
서영은 수하들이 들고있던 패왕창을 항응에게 건넸다. 철을 단조하여 통으로 만든 철창은 항불의 애병이었다. 항유가 청룡도를 사용하는 관계로 항풍에게 물려줬는데 항풍이 죽임을 당한 후 다시 항불이 가져갔다.
항응은 패왕창을 보자 부친의 모습이 떠올라 감개가 무량했다. 패왕창을 가볍게 들어올려 허공에 찌르기 몇번을 했다. 무거운 패왕창을 부지깽이 다루듯 가볍게 다루는 모습에 기병들은 갈채를 보냈다. 흑풍혈로에 십년이상 몸을 담그고 항풍과 함께 전장을 누볐던 자들은 항풍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감격했다.
곧 항풍이 사용하던 마갑을 가져다 적구에게 씌웠다. 가죽끈으로 마갑을 연결하자 적구의 모습도 늠름하기 그지 없었다. 마갑을 처음 착용해서 답답해하는 적구를 항응은 목을 쓰다듬으며 멋있다고 칭찬해줬다. 적구는 곧 우쭐해져서 춤을 췄다.
항응은 수많은 말들을 거느리고 마음껏 달리고 싶어하는 적구를 달래며 전장을 향해 이동했다. 중간중간 지나치는 마을들에서 주나라를 돕는 군사라고 하자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음식을 장만했다. 주나라가 백성들의 세수를 줄이면서 민심을 확실하게 얻은 것이다.
한편 시영은 택주의 고평성 부근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고평성은 성이 작아 많은 군사를 용납할 수 없어 성밖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시영이 자꾸 재촉하는 바람에 일만 정도밖에 안되는 선봉군은 본대보다 하루 더 빨리 도착했다.
시영이 금군총령 장영덕과 함께 중군을 맡았고 백중찬과 이중진이 좌군을 번애능과 하휘가 우군을 맡았다. 조광윤은 후군을 맡아 전황을 봐가면서 밀리는 쪽을 지원하기로 했다.
전부 합쳐서 만명정도인 주나라에 비해 북한과 요의 연합군은 덩치가 달랐다. 유숭이 직접 이끄는 삼만의 중군과 장원휘의 좌군 육만 양곤의 우군 일만기병이 진세를 펼치고 있었다. 양곤은 주나라가 숫자는 적으나 진세가 치밀하게 짜인 것을 보고 신중하게 임하자고 건의했다.
"우리는 십만이나 되는 대군인데 일만도 안 되어 보이는 저들을 두려워서 출전하지 못하면 병사들의 사기가 얼마나 떨어지겠소. 굳이 양장군의 귀한 손을 빌릴 필요가 없이 우리 한의 삼만 군사면 주나라를 충분히 소멸할 수 있소."
유숭은 양곤의 권고를 귓등으로 흘리며 장원휘에게 삼만의 군사를 돌격시키라고 명했다. 장원휘가 군령을 내리자 삼만의 북한 군사들이 주나라의 진영을 향해 돌진했다.
힙겹게 버티는 좌군과는 달리 우군은 얼마되지 않아 번애능과 하휘가 말머리를 돌려 도망을 쳤다. 싸우기전부터 상대의 진세에 겁을 먹었던 둘은 전세가 불리한 듯 보이자 목숨을 보전하려 도망간 것이다. 수하의 장수들도 분분히 도망갔고 천에 가까운 주나라 병사들이 무기를 놓고 항복했다.
시작부터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시영은 갑옷을 차려입고 전군으로 가서 직접 독전했다. 황제가 직접 전장에 나서자 사기가 오른 주나라 군사들은 더욱 힘내어 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적인 열세는 쉽게 뒤집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조광윤은 급히 장영덕을 찾았다. 자신이 이천의 수하들을 데리고 우군의 공백을 메울테니 장영덕에게 이천의 궁수들을 데리고 좌측의 높은 비탈을 차지해서 황제를 도우라 말했다. 장영덕은 조광윤의 계획에 동의하고 중군에 속한 궁수들을 데리고 좌측으로 이동했다.
조광윤은 이천 후군을 거느리고 진영이 붕괴된 오른쪽으로 향했다. 조광윤과 조광의가 가장 앞장서서 적을 베자 이천의 수하들도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일만에 가까운 북한의 병사들이 조광윤의 후군에게 막혀 포위를 완성하지 못했다.
우번행수 마전의도 수백의 기마부대를 거느리고 종횡무진하며 북한의 군사들을 무찔렀다. 장영덕의 궁수들이 높은 지형을 차지하고 화살로 지원하자 열세에 처했던 전황이 팽팽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유숭은 시영이 직접 전군으로 독전을 나온것을 확인하자 장원휘를 독촉해서 시영을 주살하라 명했다. 장원휘는 휘하 장수들을 거느리고 시영을 향해 돌진했다. 장원휘는 용맹이 널리 알려진 용장이다. 그 누구도 장원휘를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 예리한 파공성과 함께 먼곳에서 날아온 철창 하나가 장원휘와 장원휘의 전마를 그대로 꿰어 땅에 박아놓았다. 북한의 유일한 명장이 눈깜짝할 사이에 즉사하자 북한군의 사기는 바닥을 쳤다. 그때 멀리서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진천일후(震天一喉) 서영의 목소리는 별호 그대로 하늘을 울렸다.
"흑풍취(黑風吹) 혈로개(血路開) 참두로(斬頭顱) 음열혈(飮熱血)"
서영이 선창을 하자 수백의 목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흑풍취 혈로개 참두로 음열혈이라는 외침이 산과 들을 덮었다.
검은 바람이 불면 피의 길이 열린다. 머리를 잘라서 뜨거운 피 마시리. 개주 일대에서 우는 아이를 달래는 용도로 사용된다는 흑풍가가 전장에 울려퍼졌다.
- 작가의말
사실 유숭이 장원휘보고 빨리 시영을 죽이라 출전을 명해서 장원휘가 직접 출전했습니다. 최고지휘관인데도 말이지요. 그러다가 눈먼 화살에 전마가 죽어버려서 낙마했는데 일반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찔러죽였습니다. 말 그대로 개죽음을 당한 거지요. 뭐 소설이니까 각색이 필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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