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룡탈주
항응은 사냥꾼이 도망오면서 남긴 흔적을 찾아 움직였다. 하지만 어느정도 이동하자 사냥꾼의 흔적이 그냥 사라졌다. 사냥꾼이 갑자기 여우냄새가 사라졌다고 말하던 것이 이해가 되었다. 항응은 움직이지 않고 나뭇가지들을 주워다가 모닥불을 피웠다.
항응은 완성된 두개의 단전 덕분에 먹고 마시지 않아도 크게 상관이 없다. 하지만 전투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음식과 물을 섭취했다. 항응은 지금 보름달이 뜨기를 기다리고 있다.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어떻게든 몸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보름달이 뜨기 사흘전 황금빛 털을 한 여우 한마리가 나타났다. 항응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여우는 항응에게 말을 건넸다. 입을 벌리지 않고 직접 마음으로 대화를 해왔다.
'경지에 이른 인간,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항응은 마음으로 말하는 재주가 없어서 입을 열어 대답했다.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아 여의주가 필요하오."
여우는 한참동안 침묵을 했다. 항응은 상대가 깊은 생각에 빠져있다고 느꼈다.
'내가 너에게 여의주를 주면 나는 악룡이 되어 이 세상 사람의 절반을 죽여야 한다. 그래도 여의주를 원하는 것이냐?'
항응은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자신 하나 살겠다고 세상 사람의 절반을 죽인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그리고 자신과 그 가족이 죽는 그 절반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아직 몇년의 시간이 더 있으니 다른 방도를 찾아볼 수도 있다.
"여의주를 제외하고 내 상태를 해결할 방법이 있으시오?"
'지금 너는 하단전에 팔급의 내단이 들어있고 중단전에 구급의 내단이 들어있다. 십급의 내단은 여의주밖에 없으니 여의주를 제외하면 방도가 없다.'
항응이 침묵하자 여우는 말을 이어갔다.
'위험하기는 하지만 하단전과 중단전을 파괴하고 다시 수련하면 목숨을 건질 수도 있다. 네가 하단전에 칠급의 내단을 넣고 중단전에 팔급을 넣고 상단전에 구급을 넣었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팔급을 하단전에 넣었기에 중단전에는 구급을 넣어야 하고 상단전에는 십급을 넣어야 한다.'
기호지세라는 말이 있다. 항응이 하단전에 팔족흑사의 내단을 넣는 순간 파멸의 시간이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다행히 구미호의 내단을 얻어 중단전을 완성하며 수명이 더 늘어난 것이다. 하지만 여의주를 얻어 상단전을 완성하지 못하면 몇년뒤에 죽어야 한다.
항응은 공동에서 지호가 자신에게 구미호의 내단을 중단전으로 보내라고 종용한 것이 이러한 상황을 알고 그런것이라 생각되었다. 속으로 지호에게 감사를 표한 다음 항응은 금빛여우에게 포권을 하고 패왕성으로 돌아갔다.
패왕성으로 돌아간 항응은 시간이 날 때마다 죽간을 잡고 방도를 찾으려고 했다. 구미호인 호연은 죽간이 당사자가 가장 원하는 깨달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죽간을 들여다봐도 아무런 방도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소월이 또 임신하게 되자 항응은 미칠것만 같았다. 내공을 통해 들여다본 소월의 뱃속에는 두명의 아이가 자라나고 있었다. 항응은 중요한 일이라며 소월에게 양해를 구한 후 임신한 소월을 두고 종남파로 향했다.
"사부님, 이 모자란 제자에게 깨우침을 주십시오."
순양진인은 반박귀진의 경지를 완성했는지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자연스러움의 극치였다. 항응의 말을 들은 순양진인은 눈을 감고 깊은 사고에 빠졌다. 한참후에 눈을 뜬 순양진인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항응아, 이 사부의 깨달음이 부족해서 좋은 말을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하지만 세상의 일이 그러하듯 무엇이라도 해서 변화가 생겨야 방도를 찾을 수 있는 법이다. 그러니 충분히 고민한 후 무엇이라도 하거라. 이 사부는 네가 무엇을 하든 네 편이다."
순양진인은 예전에 모든 사람에게 진중한 말투를 사용했다. 하지만 반박귀진의 경지를 이룬 후 사람들을 편하게 대하며 말도 편하게 했다. 항응은 비록 구체적인 방법을 얻지 못했지만 순양진인의 말 덕분에 마음을 굳게 먹을 수 있었다.
순양진인에게 작별을 고한 뒤 항응은 아미산으로 향했다. 명경대사는 항응의 상태를 살펴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운이 너무 강성하네. 그 총람이라는 것의 마지막 몇장이 찢어졌다고 했는데 거기에 아마 경고 아니면 해결책이 있었을 수도 있네. 돌아가서 그 분실된 몇장을 찾아보는 것이 어떠한가?"
"대사님, 이미 패왕성을 전부 뒤져보았고 대형에게도 부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하늘의 뜻인가 봅니다."
"천룡사에 갔다가 돌아올 때 다시 한번 아미에 들러봐라. 원공이 해마다 몇달씩 자리를 비우는데 네가 공교롭게 원공이 자리를 비울 때마다 찾아오는구나. 다시 올때면 원공도 있을테니 원공한테 방법을 한번 직접 물어보자꾸나."
항응은 명경대사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백원이라면 방도를 알 수도 있다. 항응은 명경대사에게 작별을 고한 뒤 천룡사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천룡사에 도착하니 단사영이 항응을 반갑게 맞이했다. 천룡생불을 뵙고자 하니 단사영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생불께서 새로운 무공을 창안하셨네. 지금 그 무공을 수련하느라 사람을 만날기 불편하다네."
항응의 표정이 절실해 보이자 단사영은 밖에 소문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항응을 생불의 방으로 안내했다. 몇년만에 보는 생불은 비쩍 말라서 뼈에 가죽만 남은 것 같았다. 생불은 눈을 감고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겉으로 드러난 피부가 나무껍질 같았다.
"새로 고안해낸 고영대법(枯榮大法) 이라네. 시성 두보의 시를 보고 깨달음을 얻으셨네. 이러시다가 다시 사람 피부로 돌아온다네. 반년은 나무처럼 꼼짝 않고 지내시고 반년은 걸어다니시며 정상적으로 지내시네."
항응은 생불에게 절을 올리고 밖으로 나왔다. 단사영에게 작별을 고한 뒤 팔족흑사가 있던 폭포를 찾아갔다. 팔족흑사는 아들 항득의 수호룡이다. 둘의 운명이 서로 연결된 만큼 팔족흑사의 승천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항응은 자신이 동굴을 막아놓았던 바위를 치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항응을 발견한 팔족흑사는 기쁨의 소리를 질렀다. 항응이 예전에 뚫어놓은 구멍들은 나무뿌리들이 엉키면서 빛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항응은 다시 권력으로 구멍속의 나무뿌리들을 제거했다. 하지만 이대로는 몇년뒤에 또 문제가 생길 것이다. 항응은 팔족흑사에게 내단의 기운을 뽑아내서 일곱개 구멍속의 나무뿌리나 자라난 풀들을 태우는 방법을 가르쳤다.
팔족흑사는 항응의 가르침을 간단히 소화했다. 하지만 항응은 팔족흑사가 이대로라면 승천이 간당간당할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자꾸 들었다. 항응은 묵염목에 가서 손바닥을 대고 양화의 기운을 뿜어냈다.
항응의 기운을 받은 묵염목은 열매를 맺었다. 팔족흑사는 그 열매를 삼켜 자신의 기운을 키워 나갔다. 항응은 양의 기운이 부족해지면 음양전도를 통해 기운을 보충한 후 다시 묵염목에 양기를 불어 넣었다.
어느 순간 팔족흑사가 필히 승천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항응은 팔족흑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다시 동굴을 바위로 막아버렸다. 이후에도 몇년에 한번씩 와서 이상이 없는지 살펴야 겠다고 다짐하다가 몇년에 한번이면 한번밖에 더 못올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어버렸다.
다시 아미산으로 가자 명경대사가 반갑게 맞이했다. 하지만 항응의 상태를 살핀 명경대사는 드물게 화를 냈다.
"그사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목숨이 일년밖에 남지 않았구나."
명경대사는 곧바로 항응을 데리고 백원을 만났다. 백원은 항응을 보자마자 다짜고짜로 나뭇가지 하나를 던져주고 대련을 시작했다. 항응은 백원과 대결을 하면서 자신이 원공검법을 잘못 생각했음을 알았다.
예전에 백원은 항응의 수준에 맞춰 가르쳤던 것이다. 그래서 항응은 원공검법이 단지 공방일체라고 생각했다. 여기까지가 백원이 항응을 가르친 수준이었다. 하지만 항응은 해남도에서 깨달음을 얻어 원공검법이 공간을 제압하는 검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지금 백원과 대결해보니 공간뿐 아니라 시간도 제압하는 검이었다. 상대의 시간과 공간을 전부 제압하면 상대는 속수무책으로 패할 수밖에 없다. 원공검법은 필승의 검법이었던 것이다.
백원과 삼천여합을 겨룬 후 항응은 편한 자세로 명상에 들어갔다. 새롭게 얻은 깨달음과 죽간의 깨달음이 어우러져서 하나가 되었다. 균형, 순환, 조화, 고선의 깨달음들이 합쳐져서 탄생과 소멸의 비밀을 엿보게 되었다.
항응이 명상에서 깨어나니 옷이 그대로였다. 육체는 거의 완성되어 있었으나 정신수양이 따라오지 못했던 것이다. 정신과 육체가 균형을 이루자 항응은 자신의 몸에 생긴 문제점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흐르지 않는 물은 썩는다. 항응의 하단전과 중단전의 기운은 서로 교환을 하지만 항응의 경지가 그 끝에 다라 하단전과 중단전의 구분이 없게 되었다. 상단전을 열어서 새로운 순환을 이루어야 하는데 그게 안되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거기에 항응이 팔족흑사를 돕느라 기운을 사용하고 보충하면서 기운의 크기가 더욱 커졌다. 해납백천이 하루 열두시진 돌아가며 내공을 불리니 이제 수명이 일년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항응은 백원에게 포권을 하며 도움을 청했다.
"원공께서 이 부족한 자의 목숨을 살릴 방도가 있다면 가르침을 주십시오."
백원은 나뭇가지로 땅에 네글자를 썼다. 도룡탈주(屠龍奪珠), 용을 죽이고 여의주를 빼앗으라고 백원이 방법을 제시했다.
- 작가의말
다음 글은 대화를 많이 넣고 장면묘사를 많이 해야겠습니다. 인물들의 성격도 대화나 장면을 통해 표현하구요. 첫번째 작품보다는 조금 나아졌지만 아직도 생동감이 많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연재 속도를 조금 늦추고 한편이라도 재미있게 쓰는 걸 목표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일단 재미 위주로 짜겠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최대한 개연성을 부여하도록 하겠습니다. 김용 소설도 가끔 개연성이 말도 안되지만 재미 있으니까 다 눈을 감고 따라가게 되더군요. 개연성에 너무 집착해서 재미를 놓친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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