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천등운
비천호리의 이야기가 끝나자 항응은 자신의 이야기를 비천호리에게 들려주었다. 비천호리는 도망간 흑웅이 항응의 손에 잡혔다는 이야기에 기쁨을 표했다. 바로 대낮에 흑풍대신을 사로잡기 위해 장주가 고수들을 데리고 출발했는데 허탕을 칠게 뻔했다.
비천호리는 항응에게 자신의 손녀딸을 데리고 도망가 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항응은 목적이 팔족흑사의 내단에 있기 때문에 거절했다. 항응이 따로 목적이 있음을 짐작한 비천호리는 항응에게 제안을 하나 했다.
'소협은 그곳에서부터 저 반대편 담까지 몇호흡에 도달할 수 있소?'
'정상적으로 뛰면 일곱호흡 전력을 다하면 다섯호흡이오.'
'내 경공을 배우면 세호흡에 도달할 수 있소. 그리고 전력을 하면 한호흡도 가능하지.'
'원하는 바를 말해주시오. 협의와 인륜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라면 웬만해서 다 들어드릴 것이오.'
비천호리는 자신이 항응에게 경공을 가르치고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면 자신의 손녀딸과 의남매를 맺어주기를 청했다. 다리가 잘린 후 이년여간의 시간동안 비천호리는 손녀에게 경공을 가르치고 자신이 숨겨둔 재물의 위치도 암기시켰다.
내단을 각성한 흑웅을 혼자 힘으로 잡을 정도면 손녀딸의 안위를 맡겨도 될 것이다. 거기에 의남매를 맺으면 손녀딸에게도 가족이 생기는 것이다. 항응은 비천호리의 말에 지체하지 않고 맹세를 했다.
'나 항풍과 목예란의 아들 항응은 하늘에 대고 맹세하오. 비천호리의 손녀를 내 의동생으로 삼고 친동생처럼 돌볼 것이오. 이를 어길 시 벼락을 내려 나를 벌하시오.'
항응의 맹세가 끝나자 비천호리는 두 손으로 땅을 짚으며 항응에게 다가왔다. 서로를 믿지 못해 멀리에서 전음을 주고 받았던 두 사람이지만 이제 서로간에 최소한의 신뢰가 생겨난 것이다. 가까이 온 비천호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손녀는 아직 내 두다리가 잘린 사실을 모르오. 난 항상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전음으로 손녀와 대화했소. 평생 이런 모습으로 손녀앞에 나타날 생각이 없으니 내 손녀에게 나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면 하오."
"손녀분과 의남매를 맺기로 했으니 나에게도 조부가 됩니다. 말을 낮추시지요."
비천호리는 항응의 진심이 느껴지자 마음이 한층 더 놓였다. 비천호리는 지체하지 않고 자신의 경공인 비천등운(飛天騰雲)의 기본구결을 항응에게 알려주었다.
비천등운은 사실 그렇게 대단한 경공이 아니었다. 하지만 비천호리는 경공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으로 비천등운을 강호에서도 손꼽히는 경공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기본구결을 알려준 비천호리는 자신의 경험을 하나하나 항응에게 전수했다.
비천등운은 두가지 구결로 나뉜다. 비천은 속도에 치중했고 등운은 은밀함에 치중했다. 비천호리는 비천과 등운을 전부 높은 수준으로 사용하지만 아직 두 구결을 결합하지 못했다.
비천과 등운은 내공의 운용방식이 상이하다. 이 둘을 동시에 운용하려면 내공의 조예가 아주 깊거나 비천등운에 알맞는 내공심법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비천호리가 익힌 심법은 가문에서 전해지는 평범한 심법이었다.
내단을 단전으로 사용하는 것이기에 항응에게는 해당이 없다. 눈을 감고 잠시동안 명상을 한 항응은 이내 비천등운을 사용했다. 비천호리는 항응이 한호흡만에 반대편 담장에 도달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하지만 곧바로 항응이 자신의 뒤에 나타나자 그 경이로움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항응은 처음으로 시전하는 비천등운에서 자신이 꿈꿔오던 경지를 보여준 것이다. 비천호리는 수년간 답답하던 가슴이 조금 시원해 지는 것을 느꼈다.
"네가 경공에 이정도 재능이 있을 줄은 몰랐구나. 네 깨달음을 소월에게도 전해줬으면 하는구나."
"아무렴요. 비천등운의 진정한 전인은 소월이 될 겁니다."
항응은 자신의 목적이 팔족흑사의 내단임을 비천호리에게 밝혔다. 비천호리는 두 다리를 잃어 비천의 이름이 실색(失色)했지만 호리라는 이름에는 여전히 부족함이 없었다. 비천호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들에 결합해서 계획을 짜주었다.
낮에 출발한 대장주와 그 수하 고수들은 빨라도 내일저녁은 되어야 돌아올 것이다. 그전에 우선 동쪽에 사는 흑호를 잡아야 한다. 흑호는 대장주가 몇년전부터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마지막 제물이다. 그 흑호가 잡히면 분명 대장주 일족사이에 분열이 생길 것이다.
의심을 품은 대장주는 신룡에게 제물을 바칠 때 자신이 신임하는 자들만 데리고 갈 것이다. 일손이 넉넉하면 비천호리를 데려가지 않을 것이나 일손이 부족하면 데려갈 수밖에 없다. 한번에 일곱의 제물을 바쳐야 하기에 일손이 많이 필요하다.
보름달이 뜰 때 제물을 전부 바친 후 대장주와 일행들은 분지를 떠나야 한다. 보름달이 뜰 때마다 팔족흑사는 내단을 토해내서 달의 정기를 받는다. 그때 곁에 사람이 있으면 광폭하게 변한다. 이 경우에는 단적도 소용이 없다.
항응은 미리 근처에 숨어 있다가 도로 나온 비천호리가 신호를 주면 동굴로 들어가는 것이다. 팔족흑사가 토해낸 내단을 훔친 후 돌아와서 비천호리의 손녀인 소월을 데리고 도망가면 된다.
항응은 자신이 함정을 이용해서 흑풍대신을 겨우 잡았는데 흑호를 잡을 수 있을지 의문을 표했다. 내단을 단전으로 사용하는 것을 비밀로 했기에 비천호리는 항응이 장기전을 두려워함을 몰랐다. 오히려 기척을 낼까 걱정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우리가 육성으로 대화하는데도 저 예민한 짐승들이 잠을 자고 있지 않느냐. 몽혼약을 먹인 후 잠든 놈을 잡으면 된다."
몽혼약(朦昏葯)은 몽한약(蒙汗葯)을 정제한 순도높은 수면약이다. 몽한약은 술에 타야만 빠른 효과를 본다. 물이나 차에 탄 경우 효과를 보일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 만약 몽한약을 먹은 자가 낌새를 차리고 땀을 내면 몽한약은 땀으로 배출된다.
몽혼약은 그러한 몽한약을 정제하여 효과가 훨씬 빠르고 땀으로 배출되지도 않는다. 다만 몽혼약 한근을 만들려면 몽한약이 서른근 이상 필요하다. 몽한약은 단순히 잠들게 하지만 몽혼약은 이지를 흐려 깨어있어도 힘을 제대로 못쓴다.
흑호의 먹이는 점심과 저녁 사이에 준다. 비천호리가 직접 주는 것은 아니지만 먹이를 관리하는 사람은 비천호리이다. 몽혼약을 기름종이에 감싼 후 먹이의 위장으로 넣으면 된다. 흑호는 항상 내장을 먼저 먹는 습관이 있기에 빠르게 효과를 볼 것이다.
비천호리는 밤새 짐승들을 돌봐야 한다. 잠에서 깨어나는 놈이 있으면 몽혼약이 든 고기를 먹여 다시 재워야 한다. 항응은 몰랐던 사실이지만 내단을 각성하는 것은 보통 밤이라고 한다. 낮에 각성하는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
항응은 비천호리의 처소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강력한 내단을 얻을 생각에 흥분하여 잠이 오지 않았지만 억지로 눈을 붙였다.
이튿날 날이 밝자 비천호리는 항응과 함께 손녀를 찾았다. 비천호리의 손녀는 이년전부터 대장주 큰딸의 시비로 발탁되어 장원에 머무르고 있었다. 항응에게 손녀의 얼굴을 보여주고 손녀에게도 사정을 설명해야 했다.
'내가 사정이 생겨 자리를 비워야 한다. 나와 조손의 연을 맺은 아이가 있으니 너는 그를 의형으로 모시고 따르거라.'
한편 병상에 누워있던 패왕성주 항불은 아픈 몸을 일으켜 마차에 몸을 실었다. 풍엽장의 장주가 병환이 심해져서 곧 별세할 것 같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풍엽장주는 항불의 의형제로 패왕성의 설립에 혁혁한 공을 세운 자이다.
항불의 마차가 풍엽장에 도착하자 풍엽장의 하인들이 대문을 활짝 열어 영접했다. 마차에서 내린 항불은 수하의 부축임을 거절하고 힘겨운 발걸음을 옮겼다.
풍엽장주의 처소에 도착한 항불은 수하들에게 밖에 대기하라 명하고 홀로 방에 들어갔다. 병환이 심해져서 곧 별세할 것 같다던 전언과는 달리 풍엽장주의 얼굴은 혈색이 돌았다. 풍엽장주의 앞에는 신선로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항불이 들어오자 풍엽장주는 일어나 포권을 올렸다. 그리고 손수 국자로 신선로의 고기와 국을 퍼올렸다. 향긋한 냄새는 오랜만에 항불의 식욕을 돋우었다.
항불은 체면도 잊고 허겁지겁 국과 고기를 입에 넣었다. 배가 부를 때까지 대화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먹기만 했다. 항불의 손과 입이 멈추기를 기다려 풍엽장주는 입을 열었다.
"고수 그 어린것이 우리 늙은이들이 걱정되었는지 소얼굴만한 웅장을 보내왔소. 황금잉어와 함께 하루 푹 고았으니 몇년은 더 살 수 있을 것이오."
고수(固守)는 항응의 태명이다. 패왕성을 굳게 지키라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이다. 항응은 패왕성의 장남이다. 하지만 부모를 잃고 세가 약한 항응이 성주의 자리를 이어 받으면 분란이 일 수 있다. 그래서 항불은 항응을 방치했다.
맹자는 어여웅장불가겸득(魚與熊掌不可兼得 - 물고기와 웅장을 동시에 얻을 수 없다)고 하였다.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를 버려야 함을 이른 말이다. 하지만 풍엽장주는 웅장과 황금잉어를 동시에 고았다.
이는 네가 원하면 어와 웅장을 겸득할 수 있지 않느냐는 말이었다. 패왕성도 지키고 혈육도 지키는 어려운 길을 걸으라 항불에게 권한 것이다. 대부인덕에 무식함을 어느 정도 벗은 항불은 풍엽장주의 뜻을 알아들었다. 패왕성으로 돌아가는 항불은 마차가 아닌 말을 타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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