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궤계
화엽공에 푹 빠져있던 항응은 정신을 차렸다. 비천등운의 균형이나 육맥신검의 순환 죽간에서 얻은 선기불신의 조화의 깨달음처럼 화엽공의 깨달음도 전부가 아닌 일부일 뿐이다. 한때 균형에 집착한 적이 있기에 화엽공에서 얻은 고선(孤善)의 깨달음에 빠져서는 안된다.
균형은 넘침이나 부족함이 없는 상황에서 가장 안정적으로 가장 강한 힘을 낸다고 가르친다. 육맥신검은 강한 힘을 유지하려면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순환이 필요하다고 알려줬다. 조화는 자신을 버리고 세상과 하나 되어 세상을 닮아감으로 자신을 완성하라 깨우쳐주었다.
고선은 조화와는 반대로 개인 홀로도 완전한 소우주이니 삼라만상을 마음속에 품어 격을 높이라고 속삭였다. 언듯 조화와는 반대의 개념으로 보이지만 수도동귀(殊途同歸 - 길은 다르지만 결과는 같다)라고 결국은 같은 목표를 향한 다른 움직임이다.
조화는 자신을 버려 세상을 배우라 했고 고선은 세상을 담아 자신을 충실히 하라 했다. 자신을 세상에 던지는지 세상을 자신에게 끌어당기는지 방식의 차이만 있고 그 목표는 같았다. 항응은 새로 얻은 깨달음에 매몰될까 두려워 자신에게 끊임없이 속삭였다.
'균형과 순환 조화도 잊지 말자. 그리고 이 네개만 전부일리 없다. 나는 그저 태산의 돌멩이 네개를 주웠을 뿐이다.'
그후 항응은 비무에서 고선뿐 아닌 균형과 순환 그리고 조화도 찾아보려고 애썼다. 가끔 보이는 균형이나 순환, 그리고 드물게 보이는 조화는 항응도 지호처럼 손뼉을 치게 만들었다. 그렇게 비무에 빠져있다 보니 어느덧 네명만 남아있었다.
오후에는 실력이 비슷한 자들이 많은 관계로 두시진의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날이 어둑해지자 남은 네명의 비무는 내일 오전 진행한다고 선포했다. 항응은 지호에게 전음을 날려 어디에서 만날지 물었다. 지호는 전음으로 자신은 소림에 남을테니 항응 혼자 돌아가라고 했다.
철들 무렵부터 소림에서 자라온 지호는 객잔의 생활을 불편해했다. 그래서 항응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소림을 떠나는 사람들 무리에 끼어 밖으로 나왔다. 등봉현이 가까워질 무렵 역용을 풀고 객잔에 갔다.
지호가 없는 관계로 항응은 오랜만에 고기를 배불리 먹었다. 술도 한잔 곁들인 항응은 상쾌한 기분으로 잠에 들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난 항응은 객잔의 방을 물리고 아침을 간단히 챙겨먹은 뒤 소림으로 향했다.
담을 넘어 복마동으로 향했다. 하지만 복마동에는 지호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항응의 예상과는 달리 잠자리를 찾은 듯 했다. 항응은 복마동에서 비무의 시작을 기다리며 어제 얻은 깨달음을 되새겼다. 시간이 날 때마다 되새겨서 다시는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러다 지호는 화엽공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었을지 궁금했다. 얼핏 거대한 것과 미세한 것은 같다고 했던 기억이 있지만 자신할 수는 없었다. 그때는 자신의 생각에 몰두하느라 지호의 말을 새겨듣지 않았던 것이다.
해는 뜨지 않았지만 날이 슬슬 밝아왔다. 아직 비무가 시작할려면 한시진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때 항응의 귀에 복마동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들려왔다. 지호의 발걸음소리와는 달랐고 한사람의 기척이 아니었다. 항응은 몸을 띄워 복마동의 동굴 천장에 몸을 숨겼다.
보통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사람을 찾지는 않는다. 그리고 고개를 들 낌새가 보이면 소리없이 시야의 사각으로 이동하면 된다. 항응은 만일에 대비하여 역용술로 얼굴을 바꾸려다 어차피 자신의 얼굴을 아는 자는 이 세상에 몇 없다는 생각에 그만뒀다. 역용술로 얼굴을 바꾸고 있으면 여러모로 불편했다.
동굴에 들어온 자들은 세명이었다. 두명은 항응이 아는 얼굴이었고 한명은 모르는 얼굴이지만 소림의 중 같았다. 세명은 동굴 여기저기를 꼼꼼하게 살핀 후 다시 모였다. 복마동 바깥에도 기척이 하나 있는것을 보니 밖에 망을 볼 사람 한명을 둔 것 같았다.
항응의 예상대로 동굴 천장을 올려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항응은 자신의 깨달음들이 너무 가벼워서 자꾸 천장으로 올라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은 습관처럼 머리를 들지 않아 자꾸 깨달음을 잊고 있는 것이다. 깨달음을 무겁게 하여 바닥으로 끌어내리든지 아니면 자신이 고개를 자주 젖혀 올려다봐야겠다 다짐했다.
항응이 아는 두명은 철방과 구마자였다. 철방의 철혈방은 촉나라와 토번의 경계지역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철방과 구마자가 서로 안면이 있을 수도 있다. 항응과 일장을 부딪히고 절명한 독고숭 역시 토번무공인 혈접공을 익히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소림의 중이 추가되고 밖에 망을 보는 사람이 추가되면 그저 친분으로 끝날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항응은 갑자기 흥미가 돋았다. 뭔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듯했다.
"대사, 계획을 앞당겨 오늘 진행해야 할 것 같소. 비무가 생각보다 빨리 끝났소."
철방은 소림의 중을 향해 말했다. 원래 종과(終過)는 사흘 진행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주황실과 소림의 예상과는 달리 하루만에 끝날 뻔했다. 어제 구마자가 일부러 시간을 끌지 않았으면 비무가 이미 끝나고 영웅대회도 마쳤을 가능성이 높았다.
"걱정 마시오. 확실히 믿을만한 제자들과 함께 언제든 계획의 실행이 가능하도록 준비를 마쳤소. 당신들이 약속을 지킬 준비가 되었는지가 더 궁금하오."
소림중의 말을 구마자가 받았다.
"밀종 대법인의 무공구결은 마지막 열여섯글자만 빼고 다 알려드렸습니다. 계획의 성공을 확인한 순간 나머지 열여섯글자를 전음으로 알려드리죠. 제 사부와 조사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계획이 완성된 후 철혈방과 밀종에서 나와 제자들이 몸을 기거할 사원을 마련해 준다고 했던 약속도 잊지 마시오. 그리고 밀종에 있는 불경들도 우리가 필사할 수 있도록 빌려줘야 할 것이오."
"오래전의 약속이지만 밀종의 약속은 천년을 갑니다. 대사께서는 계획에 차질없도록만 신경써 주시면 됩니다."
그후로 셋은 계획이 실패하거나 지연되었을 때 어떻게 대처할지 상의했다. 계획이 제대로 진행될 수 있게 구마자가 최대한 시간을 끌기로 했다. 철방도 시간을 끄는데 도움을 주겠다고 말했다.
셋은 조심성이 너무 많아 계획의 내용에 대해 한마디도 누설하지 않았다. 해가 동쪽에서 머리카락을 삐쭉이자 셋은 복마동을 떠났다. 항응은 지호를 만나 들은 이야기를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지호가 어제 소림에 남고 자신이 일찍 일어나 복마동에 온 것은 부처님의 뜻일지도 모른다. 지호의 병이 자신한테 옮겨온 것 같다고 생각하며 항응은 피식 웃었다.
비무대회가 거의 시작될 무렵에 항응은 복마동 밖으로 나갔다. 복마동을 나올 때 역용술을 펼쳐 어제와 같은 얼굴로 바꿨다. 혹시 자신의 옷과 얼굴을 기억하는 자가 있을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비무장에 내려온 항응은 학승들의 무리에서 지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어느덧 시간이 되어 장영덕과 소림방장 그리고 여섯 귀빈이 자리에 착석했다. 소림의 지객당 당주인 굉자가 비무대회의 시작을 선포하려고 하는데 철방이 먼저 일어나 포권을 올렸다.
"천하의 영웅들이 이렇게 모이기도 힘든데 세번의 비무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많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소림이 영웅대회를 개최하며 비무대회에 불참했는데 저희들한테 소림의 고강한 무공을 견식할 기회를 한번 주셨으면 합니다."
현재 남은 네명중 두명은 어제 비무를 한번 더 했다. 두명은 시간 관계상 오늘 비무를 하기로 했다. 세명이 되면 어제 비무를 끝낸 두사람이 우선 대결하고 어느정도 휴식하고 마지막 결승을 하는 것이 원래 일정이다.
굉자는 원래 오전에 두번의 비무를 완성하고 오후에 마지막 비무를 진행하려 했다. 하지만 철방의 말에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자 굉태의 얼굴을 살폈다. 굉태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굉자가 철방의 말에 대답했다.
"소림이 주인의 도리를 다하지 못했군요. 철혈방의 철방주가 깨우쳐 주셔서 다행입니다. 그럼 나한당이 소림을 대표해서 여러분에게 소림의 무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나한당 당주 굉우(宏遇)는 굉태와 간단히 전음을 나누었다. 그러자 곧 백팔명의 소림나한이 비무장에 진세를 펼쳤다. 소림의 무승들이 나한의 칭호를 얻으려면 여덟개의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누군가와의 대결을 통해 무위를 시험하는 상대적 시험이 아니라 본인의 한계를 확인하는 절대적 시험이다. 그래서 소림의 나한들을 철나한이라고도 부른다.
한때 소림의 나한이 서른명도 되지 않은적이 있다. 열여덟명이 펼치는 십팔나한진을 겨우 한개만 펼칠 수 있는 것이다. 굉태는 소림방장이 된 후 절치부심해서 무승들을 지원했다. 그래서 여섯개의 십팔나한진이 육합에 의해 어우러져서 백팔나한진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항응도 공동에서 지호와의 대화를 통해 백팔나한진을 알고 있다. 지호는 백팔나한진을 십팔나한진에 비교하면 아무런 불심도 깃들어 있지 않은 백정의 무공이라 폄하했다. 과연 백팔명의 소림나한들이 시전하는 백팔나한진은 무공의 위력을 최대화하는데만 집중하여 균형이 위태롭고 순환이 빠르기만 하며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여섯개의 십팔나한진이 어우러져서 하나의 세계가 되지 못하고 여섯개의 세계가 공존했다. 하지만 그 위력만큼은 무시할만한 것이 되지 못했다. 무공의 위력이 경지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일례로 순양진인은 종남파를 떠날때의 항응과 대결하면 패배가 분명하지만 항응이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반박귀진의 경지에 발을 들여놓았다.
항응은 지호가 말했던 모든 마공은 정공에서 나왔다는 말이 기억났다. 지호의 말대로라면 소림의 백팔나한진도 마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백팔나한진의 시연에 환호와 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백팔나한의 나한진은 물흐르듯 변화가 자연스럽고 서로의 위치교환과 공수의 교대가 딱딱 들어맞았다. 가끔 백팔명이 함께 기합을 내지르며 동시에 공격할 때는 구경하는 자들의 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백팔나한의 시연이 끝나자 환호와 갈채가 비무장을 뒤덮었다.
철방도 벌떡 일어나서 손뼉을 쳤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철방은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모든 사람들에게 똑똑히 들렸다.
"과연 천하무공출소림입니다. 이 철방이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데 끓어오르는 피를 주체할 수 없습니다. 패왕성의 항공자가 거절하지 않으신다면 한번 손을 섞어볼까 하는데 어찌 생각하십니까."
항룡은 무공이 아주 평범하다. 어릴때부터 놀기를 좋아했고 열여섯에 부마가 된 후 다그치는 사람이 없어 아예 무공을 손에서 놓다시피 했다. 그래서 철방의 요청에 난감해하는데 그때 항룡을 구해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연무를 보면서 피가 끓어올랐습니다. 철방주께서 미흡한 본인을 꺼려하지 않으신다면 내가 철방주의 절세무공을 한번 상대해 드리리다."
- 작가의말
고선(孤善)은 나홀로도 훌륭함, 나홀로도 완전함 입니다. 독선(獨善)이 가장 알맞지만 원래 주변을 상관않고 자기 수양에만 신경 쓴다는 좋은 의미로 사용되던 독선이 현재는 자기주장만 강한 나쁜 의미로 씌이고 있습니다. 독선은 설명을 곁들여도 이후 계속 사용하기에 오해의 소지가 있어 고선으로 바꾸었습니다. 혹시 이후에 제가 독선이라 쓰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영웅대회는 원래 계획에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수백개 댓글에서 소림의 처사에 대해 비분강개하는 모습을 보고 이 부분을 원래 생각했던 것처럼 가볍게 넘어가면 안되겠다 생각되어 급히 쪽대본을 날렸습니다. 원래 스쳐지나가는 부분이었는데 해룡급으로 성장했습니다. 구마자를 급하게 섭외했고 철방을 강제 우정출연 시켰습니다. 그리고 소림의 중 한분이 악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도 원래 줄거리보다 훨씬 낫습니다. 댓글로 깨우쳐주신 수백분께 감사드립니다.
원래는 오늘 연재를 여기에서 마치고 글 읽는 분들이 마지막에 말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맞추게 해야 합니다. 항응이다, 지호이다, 보선문에서 온 강녀다, 기타 등등 댓글들이 수백개 달리고 그다음 제가 내일 뒷머리를 거하게 때려드려야 합니다. 하지만 곧 연참을 해야 하기 때문에 뒤늦게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오초동안 누굴지 심각히 고민한 다음 다음편으로 넘어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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