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풍대신
관도를 따라 북으로 달리던 항응은 급하게 동으로 방향을 꺽었다. 품에 안은 탐요경에서 떨림이 전해진 것이다. 탐요경은 구보처럼 기운이 약한 내단에 반응하지 않는다. 구보의 기운이 오십리밖까지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탐요경에 감지되는 내단은 시시한 물건이 아니라는 뜻이다. 탐요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향하는 길을 찾은 항응은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적구는 오랫동안 마구간에 묶여서 제대로 달린적이 없다. 처음으로 마음껏 달린 적구는 기마술이 엉성한 항응을 태웠음에도 불구하고 오십리가량 되는 길을 반시진도 안 걸려 주파했다. 항응이 등자를 차서 멈춰세우자 적구는 앞다리를 들고 울음소리를 길게 뽑았다.
항응이 말에서 내렸지만 객잔의 점소이는 감히 다가오지 못했다. 적구의 덩치가 일반말보다 큰 것도 있지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적구가 콧김을 세차게 내뿜고 있었기 때문이다. 항응은 직접 적구를 끌어다 마구간에 안치했다.
안장을 끌러내린 항응은 찬물로 적구의 몸을 씼어주었다. 몸의 열이 식자 적구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여물을 먹기 시작했다. 항응은 점소이에게 동전 몇닢을 건네면서 적구의 여물에 삶은 콩 한바가지 섞으라고 주문했다.
객잔에 들어간 항응은 만두 한접시에 닭국 한사발을 시켰다. 배부르게 먹은 후 점소이가 차 한사발 올렸다. 쉽게 구할 수 있는 싸구려차라서 향이 별로였지만 항응은 시원하게 들이켰다.
항응은 점소이에게 근처에 맹수나 괴이한 짐승이 없는지 물었다. 아까 건넨 동전 덕분인지 점소이는 항응의 물음에 친절하게 대답했다. 동북방향으로 이십리 가량 떨어진 흑풍산에 흑풍대신(黑風大神)이라 불리는 맹수가 살고 있다.
이미 여섯명이나 되는 사냥꾼들이 흑풍대신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키가 일장하고도 오척이나 되며 발톱 하나가 사람 팔뚝만큼 길다. 송곳니가 사람의 손바닥만큼 길었다.
몇달전에 갑자기 나타난 흑풍대신 때문에 사냥꾼들과 약초꾼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큰 덩치에 부합되게 흑풍대신의 영역은 네개의 산을 뒤덮었다. 사냥꾼들과 약초꾼들은 흑풍대신의 영역을 피하느라 발품을 더 팔아야 했다.
지역유지들이 돈을 모아 무공을 익힌 고수를 초빙한 적도 있었다. 사냥꾼들이 합심해서 깊은 함정을 파고 유인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함정에 꽂은 죽창은 흑풍대신의 가죽을 뚫지 못했고 무공을 익힌 고수는 몇호흡만에 흑풍대신의 손에 갈기갈기 찢겼다.
다행히 흑풍대신은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흑풍대신의 영역이 점점 커지고 있어 사람들의 걱정을 키우고 있다. 산간지역이라 농사 대신 약초와 짐승 가죽으로 연명하는 곳인데 흑풍대신 때문에 고향을 떠난 자들이 적지 않았다.
약초와 짐승 가죽을 구입하러 오는 상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던 객잔도 몇달동안 손님이 뜸했다. 덩달아 상인들을 호송하는 일로 벌어먹고 살던 자그마한 표국도 손님이 끊겨 문을 닫을 지경이다.
점소이의 친절한 설명 덕분에 항응은 예전에 사냥꾼들이 파놓은 함정의 위치도 알게 되었다. 돈을 주고 커다란 벌목도끼 한자루와 튼튼한 밧줄을 산 항응은 적구를 타고 흑풍대신의 영역으로 출발했다.
적구는 흑풍대신의 영역에 가까워지자 더이상 접근하려 하지 않았다. 항응은 적구를 밖에 풀어두고 직접 도끼와 밧줄을 메고 함정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사냥꾼들이 함정을 파놓은 지점에 도착해보니 함정의 깊이가 사람의 키 세배는 되었다. 함정 주변에는 부러진 죽창과 화살들이 널려있었다. 화살촉은 철로 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흑풍대신의 가죽을 뚫지 못한 듯 했다.
함정주변을 정리한 뒤 도끼로 나무 한그루를 쓰러뜨렸다. 가지들은 함정위에 덮어놓았고 껍질을 발라낸 줄기는 함정옆에 눞혀놓았다. 나뭇가지와 풀들을 더 가져다 함정위에 덮은 후 흑풍대신을 유인할 미끼를 찾았다.
함정 주변에서는 살아있는 미끼를 찾을 수 없었다. 이미 흑풍대신의 식사거리가 되었든지 아니면 몸을 꽁꽁 숨기고 있든지 둘중 하나일 것이다. 항응은 미끼를 찾으러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온 항응은 적구를 먼저 찾았다. 석림을 치료해준 뒤로 적구는 항응을 무척이나 따랐다. 하지만 이렇게 밖에 혼자 방치해둔 것은 처음이라 약간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적구는 항응과 헤어진 자리에 떠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달라진 점이라면 적구의 주변에 머리가 깨진 두마리의 늑대가 드러누워 있었다. 아무래도 적구를 사냥하려고 덤비다가 오히려 당한 모양이었다.
늑대의 시체를 확인한 항응은 늑대의 흔적을 따라 역추적했다. 책에서 늑대는 무리를 지어 사냥하는 동물이라고 했다. 흑풍대신을 유인할 미끼로 살아있는 늑대가 아주 적당할 것이다.
하지만 흔적을 따라간 곳에는 새끼늑대 몇마리만 있었다. 모든 늑대가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항응은 개중 가장 덩치가 크고 건강해 보이는 새끼 한마리를 품에 안았다.
항응은 함정이 있는 곳의 높은 가지에 새끼 늑대를 묶었다. 그리고 나뭇가지로 쿡쿡 찔렀다. 화가 치밀어 씩씩거리던 새끼 늑대는 목청껏 울어댔다.
생각보다 훨씬 가냘픈 새끼 늑대의 울음소리에 항응은 실망했다. 저 작은 소리가 흑풍대신의 귀에까지 전해질 것 같지도 않았고 전해지더라도 흑풍대신이 엉덩이를 움직일 것 같지 않았다.
다른 미끼를 찾아야 하나 고민하는 와중에 갑자기 산새들이 무리지어 날아올랐다. 맹수가 자신의 영역에 대한 집착을 항응이 너무 얕보았던 것이다. 흑풍대신은 새끼 늑대의 울음소리를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항응은 급히 신형을 날려 높은 나무위로 몸을 숨겼다. 흑풍대신의 속도는 전력질주를 한 적구보다도 더 빨랐다. 물론 적구가 아직 두살도 되지 않은 망아지라는 점을 고려해야 겠지만 그래도 흑풍대신의 속도는 놀라울 정도이다.
빠른 속도로 달려오던 흑풍대신은 급하게 속도를 늦췄다. 그대로 달리면 절벽에 몸을 부딪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속도를 줄인 흑풍대신은 함정에 빠져들어갔다. 사냥을 업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판 함정은 위치선정이 절묘했다. 나뭇가지에 묶인 늑대를 덮치려면 함정이 있는 위치에서 뛰어올라야 했다.
흑풍대신은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 함정속에서 난동을 부렸다. 비록 함정이 흑풍대신의 키보다 더 깊었지만 발톱을 벽에 박으면 쉽게 올라올 수 있다. 지난번 사냥꾼들이 실패한 것도 흑풍대신의 힘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짐승은 짐승인지라 함정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함정벽을 긁으면서 화풀이만 했다. 항응은 침착하게 흑풍대신이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흑풍대신은 거대한 흑웅이었다. 하지만 흑웅은 기껏해야 사람키만큼 자란다. 항응의 눈앞에 있는 흑풍대신은 사람키의 세배정도는 되어 보였다. 점소이의 말을 들을때는 과장이 섞여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축소해서 말한 것 같았다. 아니라면 그 사이에 흑풍대신이 더 자랐을 수도 있다.
화풀이를 끝낸 흑풍대신은 인립(人立)자세로 허리를 쭉 펴고 포효했다. 흑풍대신의 시위(示威)에 놀란 새와 동물들의 움직임에 인근 산들이 소란스러워졌다.
항응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뒤로부터 달려가서 흑풍대신의 뒤통수에 지동권(地動拳)을 시전했다. 지동권에 얻어맞은 흑풍대신은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렸다.
지동권은 내력으로 상대의 기운을 상하로 흔든다. 산요권(山搖拳)은 상대의 기운을 좌우로 흔든다. 지동권과 산요권을 대성하여 동시에 사용할 수 있으면 지동산요(地動山搖)라 하여 수천근의 바위를 부술 수 있다고 전해진다.
아쉽게도 항응은 지동권만 가능하다. 내단의 제한으로 말미암아 마음껏 수련하지 못해서이다. 흑풍대신의 내단을 취하면 실력을 한단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미리 밧줄로 만든 올가미로 흑풍대신의 두팔을 걸었다. 그리고 아까 벌목한 나무기둥에 흑풍대신의 두 팔을 묶어버렸다. 흑풍대신이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활짝 벌린 두 팔이 등뒤의 나무기둥과 함께 묶여서 전혀 힘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항응은 함정옆에 버려졌던 죽창으로 흑풍대신을 쿡쿡 찔렀다. 화가 치밀대로 치민 흑풍대신은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난동을 부렸다. 하지만 항응은 침착하게 눈이나 콧등 같은 부위를 지속적으로 건드렸다.
곰을 사냥할 때 죽이기 전에 화를 돋우면 웅담의 크기가 커진다. 화가 나면 담즙의 분비가 가속화되어 웅담이 꽉 차기 때문이다. 책에서 얼핏 봤던 내용을 용케 기억해낸 항응은 흑풍대신이 홧김에 죽어버릴 정도로 도발했다.
화가 꼭두까지 치민 흑풍대신은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흑풍대신의 눈에 총기가 전혀 남아있지 않은 것을 확인한 항응은 검을 뽑아들었다. 항응이 익힌 검법은 불화검(拂花劍)이다. 꽃을 쓰다듬는다는 뜻의 불화검은 일격필살을 지향하는 검법이다.
항응은 차화헌불(借花獻佛)의 초식을 사용했다. 차화헌불은 항응이 알고 있는 모든 초식들 중에서 가장 강한 찌르기 초식이다. 결함은 외기를 타는 초식이라 시전하면 자의로 멈출수가 없다.
항응의 일검은 흑풍대신의 눈알을 터뜨리고 머릿속을 곤죽으로 만들었다. 흑풍대신은 마지막 비명을 짧게 지르고 짧은 산왕(山王)의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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