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룡기담
오병은 어릴 때 목을 다쳐 소리를 내지 못한다. 오군과 오병이 마음이 통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오병의 비밀을 몰랐다. 오병은 제비의 소리를 알아듣는 재주가 있다.
제비둥지를 따면서 제비들의 지저귐을 엿들은 오병은 해룡의 비밀을 알아냈다. 그리고 마음으로 오군에게 전했다. 해룡이 대요괴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남지 않음을 안 둘은 애주로 와서 해룡을 빨리 처단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누구도 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먹고 살기 위해 둘은 벼랑을 탔는데 오병의 재주 덕에 최상품의 제비둥지만 땄다. 제비들이 누구 둥지가 참 멋있다고 부러워하면 그 둥지를 따오는 것이다.
그래서 육연방에서 두 형제를 방도로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오군이 계속 해룡을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결국에는 쫓아내고 말았다. 오병은 제비들로부터 해룡의 출생부터의 모든 비밀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해룡은 바다에서 사는 생물이 아니라 육지에서 태어난 뱀이다. 비늘이 없다고 해서 무린사(無鱗蛇)라 불리며 간혹 털이 있다 하여 모사(毛蛇)라고도 부른다. 이빨이 자라지 않는 무린사는 오래 살지 못하고 굶어죽기가 일쑤이다. 생김새가 뱀과 비슷하지만 실제로 뱀인지 아닌지는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
경애에서 태어난 무린사는 운이 좋은 편이다. 금사연 한마리가 무린사에게 벌레를 물어다 주었던 것이다. 덕분에 무린사는 굶어죽지 않고 무럭무럭 자랐다. 보통 제비는 십년정도의 수명을 가지고 있는데 무린사에게 먹이를 물어다준 제비는 이십년이 되도록 계속 무린사에게 벌레를 물어다 주었다.
무린사는 자신을 보호할 비늘이 없고 남을 공격할 이빨이 없다. 팔족흑사처럼 이 세상에 오래 머무르지 못할 운명을 타고 태어난다. 하지만 묵염목을 만난 팔족흑사처럼 금사연을 만난 무린사는 운명의 굴레를 벗었다.
태어날 때부터 내단을 가지고 태어나는 팔족흑사와는 달리 무린사는 십년이 지난후에 내단이 생겼다. 기운이 한쪽으로 치우친 팔족흑사와는 달리 무린사의 내단은 조화와 균형이 잘 잡혀 있었다.
언젠가부터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경애에는 작은 보름달이 뜬다는 소문이 돌았다. 무린사가 토해낸 내단이 밝은 빛을 뿜어내어 그런 소문이 퍼진 것이다. 그래서 보름달이 뜰 때마다 경애 주변에는 두개의 보름달을 구경하기 위한 사람들이 바글거리기 시작했다.
애주에는 무경이라는 채집꾼이 있다. 애주에서 가장 뛰어난 제비둥지 채집꾼인 무경은 욕심도 많은 자였다. 경애의 가장 높은 곳은 무경을 제외한 다른 채집꾼들은 감히 도전하지 못하는 곳이다. 무경은 보름달이 뜨는 날 낮에 미리 경애의 꼭대기로 올라가 있었다.
무린사는 무경을 평소에도 자주 보아왔다. 무경은 제비둥지만 따갈 뿐 제비들을 해치는 일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 먼곳에 무경이 있는 것을 알았지만 개의치 않고 내단을 토해내어 달의 정기를 받았다. 달의 정기를 받으려 안달이 난 내단을 달래는게 더 시급하기 때문이다.
무린사와는 달리 무경은 무린사를 처음 본다. 길이가 반장가량 되는 뱀이 입으로부터 밝게 빛나는 구슬을 토해내자 전설속의 야명진주(夜明眞珠)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빛을 모아서 뿜어내는 야명주와는 달리 야명진주는 직접 빛을 낸다.
탐심을 이기지 못한 무경은 달려가서 작대기로 무린사를 공격했다. 반장이면 사람의 키 정도 크기이다. 그 정도 크기의 뱀을 두려워할 채집꾼은 없다. 제비둥지를 채취하면서도 뱀을 발견하면 맨손으로 잡아 던지는게 채집꾼들이다.
무린사는 다급히 내단을 회수하려 했지만 내단은 달의 정기를 더 흡수하기 위해 무린사에게 저항했다. 내단은 조심스럽게 다뤄야지 그 심기를 거스르면 안된다. 토해낸 내단을 억지로 삼키면 몸안에서 난동을 부리기도 한다. 달의 정기를 충분히 흡수하면 얌전해진다.
내단의 저항이 심하자 무린사는 억지로라도 내단을 삼키려 했다. 한동안 몸속에서 난동을 부리는 내단 때문에 고생해야 겠지만 탐욕스러운 인간에게 내단을 빼앗기는 것보다는 낫다. 하지만 무경이 무린사보다 한발 빨랐다.
내단을 빼앗기자 무린사는 화가 났다. 하지만 무린사는 몸을 보호할 비늘도 없고 공격할 이빨도 없다. 무린사의 내단을 손에 넣은 무경은 손에 든 작대기로 무린사의 머리와 몸을 마구 내리쳤다. 날이 밝은 후에야 경애를 내려갈 수 있는데 무린사를 살려두고 싶지 않았다.
속수무책으로 매를 맞아대며 무린사는 비명을 질렀다. 무린사에게 이십년째 먹이를 물어다 주던 금사연이 그 소리에 날아와 무경을 공격했다. 무경은 제비가 자신을 공격하자 작대기를 마구 휘둘러 쫓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금사연은 물러서지 않았고 마구 휘두른 작대기에 맞아 벼랑 밑으로 떨어졌다.
금사연이 죽자 무린사의 덩치가 갑자기 커졌다. 반장정도의 크기가 삼장으로 늘어났고 동글동글하던 몸도 납작하게 변했다. 커다란 입을 벌린 무린사는 놀라움과 공포에 몸이 굳은 무경을 통째로 삼켜버렸다.
무린사에게 삼켜진 무경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작대기로 마구 찔렀다. 뱃속에서 무경이 난동을 부리자 무린사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벼랑 아래의 바다로 떨어졌다. 그후로부터 경애에는 하나의 보름달만 떴다.
그렇게 일년이 지나 보름달이 뜨는 날, 바다에서 길이가 삼십장이 넘는 해룡이 나타났다. 해룡은 육지로 올라 수백명의 목숨을 취한 후 슬픈 비명을 지르고 돌아갔다. 해룡의 비명에 경애에 둥지를 틀고 살던 수많은 금사연들이 피를 토하고 죽었다.
이듬해의 같은 날 해룡이 또 방문했을때는 길이가 오십장까지 늘었다. 관에서 미리 준비한 투석기와 쇠뇌 그리고 화살들은 아무 소용도 없었다. 수백의 목숨을 앗아간 해룡은 밤이 되자 구슬픈 울음을 지르고는 바다로 돌아갔다.
세번째 해에는 아예 바닷가를 깨끗이 비웠다. 사람들은 미리 먼 곳까지 몸을 피했다. 그런데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사흘이 지났는데도 해룡은 바다로 돌아가지 않고 육지에 머물렀다. 몸 길이는 더욱 커져서 팔십장은 되어 보였다.
해룡 때문에 바다로 나갈 수 없게 되자 애주 사람들은 굶어야 했다. 어쩔수없이 소와 양 그리고 돼지 백마리를 제물로 바쳤다. 제물을 다 먹고 나서야 해룡은 바다로 돌아갔다. 그 다음해에는 미리 제물을 준비해서 바닷가에 두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깜빡한 것이 있었는데 해룡이 해마다 자란다는 것이다. 전해와 똑같은 제물을 바치자 해룡은 제물을 다 먹어치운 후 난동을 부렸다. 안이한 생각으로 애주에 남아있던 사람들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다.
연속 사년동안 같은 시기에만 방문하고 평소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해룡은 백장이 넘는 몸을 이끌고 바다를 누볐다. 배가 보이는 족족 뒤집어 버렸다. 덕분에 몇해동안 해남도를 찾는 배가 없어서 해남도 사람들은 곤군(困窘)한 생활을 영위해야 했다.
다행히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었다. 용감하고 무모한 뱃사람들은 해룡이 활동하지 않는 시기를 찾아내어 해남도를 방문했다. 해마다 해룡에게 제물을 바치느라 등허리가 휜 해남도 사람들은 겨우 숨통이 트였다.
봄마다 대량의 물품과 식량을 가지고 해남도를 찾는 상인들은 콧대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관의 사람들도 상인들의 심기를 거를세라 정성을 다해서 대접했다. 바다에 배를 함부로 띄우지 못하니 상인들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높아진 것이다.
해남도는 날씨가 따듯하고 홍수나 가뭄같은 자연재해가 드물다. 바다에도 먹을거리가 널려있기 때문에 부자가 되기 힘들어도 굶어죽는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해룡때문에 밑빠진 항아리에 물 쏟아붓듯이 재물들이 빠져나갔다.
려족의 소년들도 그렇고 항응도 해룡을 처치하는게 목적임을 안 오군은 몹시 기뻐했다. 검동은 항응이 해룡을 처치하려 한다는 말에 처음에는 깜짝 놀랐지만 곧 수긍했다. 항응이라면 해룡을 무조건 처치할 것이라고 려족 소년들에게 큰소리를 쳤다.
해룡이 찾아오는 날은 약 두달 뒤이다. 검동은 자신도 한손 보태겠다고 수련을 더욱 열심히 했다. 해룡의 크기를 오군의 입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한 려족 소년들도 하루종일 수련에 매진했다. 덕분에 오군과 오병 그리고 항응이 사냥과 조업을 통해 일행을 먹여살려야 했다.
산란주를 빚는데 사용되는 산란쌀이 이곳의 주식이었다. 항응은 말 두필을 끌고 가서 산란쌀을 넉넉히 사왔다. 거기에 사냥과 조업을 통해 얻은 반찬과 여러가지 과일들까지 있으니 매일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수련을 열심히 하고 끼니도 잘 때우고 휴식도 충분히 하자 검동의 덩치가 조금씩 커지는 것이 보였다. 키는 많이 크지 않았지만 근육이 붙고 몸이 균형을 찾으면서 더 커보이는 것이다.
항응은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 소월더러 검동에게 월녀검을 가르치게 했다. 검동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려족 소년들은 당나라 말을 열심히 배우더니 어느 하루 항응에게 제자로 받아달라고 빌었다.
항응은 제자를 더 받고 싶은 생각이 없다면서 소월을 사부로 삼으라고 했다. 사실은 말이 통하지 않아서 귀찮았던 것이다. 려족 소년들은 여자를 사부로 삼을 수 없다고 완강히 거부했다.
화가 난 소월은 그러면 나랑 대련해 보자고 소년들을 도발했다. 열두명이 하나씩 덤비다가 무참히 깨졌다. 소월의 유신장은 소성의 경지에 올라 있기에 체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려족의 무술을 어설프게 익힌 소년들이 열합도 버티지 못했다.
대련을 보고 흥이 오른 오군은 소월에게 대련을 요청했다. 소월도 키가 그리 큰 편은 아니다 보니 오병의 목에 올라탈 필요가 없었다. 둘은 막대기를 들고 대련을 했다. 소월은 월녀검을 펼쳐 오군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였다.
오군은 무공을 익힌 적은 없다. 눈썰미가 좋아 상대의 빈틈을 발견해서 파고드는 방식으로 무공을 어설프게 익힌 자들도 쉽게 물리쳤다. 하지만 월녀검처럼 대중적이고 무난한 검법을 제대로 익힌 소월과 대련하자 부족점이 드러났다.
월녀검은 수많은 사람들이 익히는 대중적인 검법이다. 특별히 뛰어남이 없지만 내공이 없어 큰힘을 내지 못하는 사람이 익히기에 가장 적합한 검법이다. 큰 장점이 없지만 반대로 빈틈도 별로 없다. 빈틈을 찾아 찌르는 식으로 싸워왔던 오군에게는 상성상 최악인 것이다.
혼자서 힘에 부치자 오병이 막대기를 들고 가담했다. 빠르고 예리하게 찔러오는 오군과는 달리 오병은 묵직하고 우직했다. 둘이 합심하자 소월은 손발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곁에서 대련을 구경하던 항응이 조언 한마디 건넸다.
"월녀검은 월녀검이고 유신장은 유신장이구나. 물과 기름도 아닌데 왜 섞이지 못하는 것이냐."
소월은 월녀검을 사용할 때에는 철저히 월녀검의 투로를 따랐다. 검술을 수련할 때의 투로와 실전에서 사용되는 투로는 달라야 하는 법이다. 유신장은 전신을 무기로 사용하며 발경위주의 무공이다. 월녀검에 유신장의 몸놀림을 결합하면 훨씬 강한 위력을 낼 수 있다.
소월은 무공에 대한 자질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으나 삼일간 항응이 무공을 합치는 과정을 지켜봤다. 항응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아들었다. 단순히 월녀검만 사용하는게 아니라 유신장을 중간중간 섞자 두 쌍둥이와 비슷하게 싸울 수 있었다.
유신장의 몸놀림에 월녀검의 출수를 합치니 오군과 오병은 수비에만 급급했다. 소월의 움직임이 점점 더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변하자 오군은 막대기를 던지며 소리쳤다.
"불공평해. 우리는 무공을 배운 적이 없단 말이야."
오병은 막대기를 땅에 내려놓고 소월의 앞에 가서 무릎을 꿇었다. 오군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오병의 곁에 가서 무릎을 꿇고 외쳤다.
"사부, 이 불민한 형제를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려족 소년들은 두 형제가 하는 짓을 지켜보더니 분분히 소월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소월이 항응을 바라보자 항응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월이 고개를 끄덕이자 열네명의 소년은 구배를 올렸다.
- 작가의말
기담(奇談)은 말로 전해지는 신기한 일을 말합니다. 보통 사람들의 공감을 사지 못해 글로 적히지 못한 이야기들이지요.
오병은 막대기를 땅에 내려놓고 소월의 앞에 가서 무릎을 꿇었다. 벙어리인줄 알았던 오병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나랑 결혼해줄래~ 나랑 평생을 함께 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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