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의막측
소월의 강력한 주장으로 이해를 구경하기로 했다. 이해는 양지미성 동쪽으로 백이십여리 떨어진 곳에 있다. 북에서 내려와 서쪽의 점창산으로 향한 둘은 이해를 구경하지 못했다.
비록 동가라가 쉽게 물러섰지만 양지미성으로 가기 싫었다. 그래서 양지미성을 피해 에돌아 가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한 둘은 날이 어두워지자 빗물이 침입하지 않은 곳을 찾아 모닥불을 지폈다.
모닥불을 지펴서 몸을 덮힌 후 항응은 주변을 살피며 겸사겸사 사냥도 했다. 이름을 모르는 새 한마리를 잡은 항응은 새털을 모닥불에 그을린 후 깃털을 뽑았다. 가까운 곳에 물이 없어서 항응은 내장 손질하러 조금 먼 곳까지 가야 했다.
항응은 비가 멎었음에도 개울 상류에서 비오는 소리가 들려오자 호기심에 개울을 거슬러 올라갔다. 얼마 이동하지 않아서 커다란 폭포가 항응의 눈앞에 나타났다. 높이가 열장정도 되는 곳에서 바위에 부딪히며 떨어지는 물줄기는 하얀 비단천 같았다.
처음 보는 폭포에 넋을 잃은 항응은 내일 날이 밝으면 소월을 데려다 함께 구경해야겠다고 생각했다.모닥불로 돌아가서 새를 구워먹은 후에도 폭포는 항응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항응은 폭포의 흐름에 무공과 관련된 무언가가 있는게 아닌지 고민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토록 신경이 쓰일리가 없을 것이다. 항응은 내친김에 시원하게 목욕을 하기로 하고 갈아입을 옷을 챙겨 폭포로 향했다.
차가운 물에 몸을 담그고도 항응의 시선은 시종일관 폭포로 향했다. 아무리 쳐다봐도 느껴지는 것이 없자 항응은 폭포를 향해 헤엄쳐갔다. 폭포 밑으로 들어가자 강한 물줄기가 항응의 전신을 두드려왔다.
처음에는 쉴새없이 온몸을 두드리는 물줄기에 정신이 없었으나 잠시후 적응되자 주변을
살필 여력이 생겼다. 폭포수를 완전히 지나자 넓이와 높이가 일장정도 되는 둥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항응이 이리저리 살펴봐도 사람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전혀 없었다. 동굴안으로 몇걸음 걸어가던 항응은 멈칫하며 멈춰섰다. 이상하게 어두운 밤인데도 동굴안의 광경이 잘 보였던 것이다.
다시 곰곰히 생각해 보니 사냥할 때도 달이 밝지 않은데 잘 보였던 것 같았다. 천천히 며칠동안을 되짚어 보자 천룡사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부터 밤눈이 밝아진 듯 했다. 동굴이 이상한게 아님을 확인한 항응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안으로 오십걸음 정도 들어가지 동굴벽이 항응을 반갑게 맞이했다. 하지만 동굴이 끝난게 아니었다.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자 조금은 작지만 여전히 항응이 서서 걸을 수 있을 정도의 동굴이 있었다.
항응은 신중히 살핀 후 여전히 사람손이 닿지 않은 천연동굴임을 확인했다. 칠십걸음 걷자 동굴의 방향이 또 한번 바뀌었다. 그렇게 방향이 다섯번 바뀌고 대략 삼백걸음을 걸어 들어가자 커다란 공동(空洞)이 나타났다.
밤눈이 밝아졌다고는 하지만 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공동에서 그저 윤곽이 어렴풋이 보일 뿐이다. 조심스레 공동을 한바퀴 돈 항응은 아무것도 없자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항응이 들어왔던 공동의 입구에는 검은 신형이 가로막고 있었다.
어렴풋한 윤곽으로 봐서는 길이가 이장정도 되어보였다. 사람키의 네배정도인 것이다. 형태가 구렁이와 비슷했지만 항응은 경솔히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문득 혼자 있을 소월이 걱정이 된 항응은 내단속의 기운을 뽑아올렸다.
천룡사에서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 항응은 내단의 기운을 사용함에 있어 매우 신중했다. 혹시라도 기운을 뽑아 쓸 때 내단이 말썽을 부리지 않을까 걱정되었던 것이다. 구보가 반딧불이라면 팔족흑사의 내단은 태양이다. 구보의 기운이 말썽을 부릴 경우 가볍게 제압하면 되지만 팔족흑사의 내단이 난동을 부리면 큰일이 난다.
하지만 천룡사에서 깨달음을 얻어 내단의 기운을 뽑아쓰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 내단의 기운을 뽑아써야 하는지 감을 잡았기 때문이다. 내단속에는 뭉치려는 기운과 밖으로 나가려는 기운이 동시에 존재한다. 그중 밖으로 나가려는 기운을 뽑아쓰면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며칠간 아무런 말썽도 부리지 않던 내단의 기운이 하필 이때 말썽을 부렸다. 항응의 운기를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혈도를 타고 흘렀다. 내단의 기운이 머리쪽으로 흐르자 항응은 정신을 집중해서 내단의 기운을 제어하려 했다. 눈앞에 있는 거대한 괴물은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항응의 저항은 무의미했다. 내단의 기운은 정상적인 운기경로를 무시하고 머리쪽으로 밀려갔다. 항응은 이것도 내단의 본질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아예 저항을 포기하고 기운이 제멋대로 움직이게 놔뒀다.
항응의 머리로 몰려든 내단의 기운은 가면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내단의 기운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이던 묵염목의 이파리는 갑자기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 빛을 통해 항응은 입구에 버티고 있는 괴물이 길이가 두장이 조금 넘는 팔족흑사임을 확인했다.
무릉도원의 팔족흑사에 비하면 애기나 다름없는 크기였다. 원래 화기때문에 버티지 못하고 죽었어야 하는 팔족흑사인데 아마 음기가 강한 폭포속의 동굴에 있은 덕분에 겨우 연명한 듯 하다. 내단의 기운에 대항하기 위해 덩치를 어찌어찌 불렸지만 이대로라면 얼마 못가서 죽었을 것이다.
묵염목의 이파리는 갑자기 항응의 얼굴에서 떨어져 나갔다. 나풀거리면서 바닥에 떨어진 묵염목의 이파리는 땅에 뿌리를 내리더니 순식간에 자랐다. 항응의 가슴정도의 높이로 자란 묵염목은 가는 줄기에 비해 커다란 이파리를 힘겹게 지탱했다.
묵염목의 이파리가 묵염목으로 변하자 팔족흑사는 지체않고 달려왔다. 항응은 뒤로 훌쩍 뛰어 길을 비켜줬다. 묵염목에 가까이 다가간 팔족흑사는 자신의 거대한 몸집을 묵염목에 조심스럽게 가져갔다.
묵염목은 팔족흑사의 기운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이며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반면 팔족흑사는 커다란 허물을 벗어내고 점점 작아지더니 항응의 팔 하나정도의 크기로 줄어들었다. 팔족흑사의 허물은 땅에 닿더니 순식간에 가루가 되었고 비늘 한장만 그대로 남았다.
자그맣게 변한 팔족흑사는 항응의 키보다 조금 더 커진 묵염목을 타고 올라가 입을 벌리고 소리를 질렀다. 비명인지 환호인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곧이어 팔족흑사가 한번 더 입을 벌리자 항응은 팔족흑사의 뜻을 알아차렸다.
이곳은 햇빛도 달빛도 들지 않는 곳이다. 팔족흑사는 화기를 얻을 길도 없고 달빛에 내단을 정련할 수도 없다. 지금 당장은 팔족흑사가 폭포 밖으로 나가 햇빛과 달빛을 받을 수 있지만 묵염목이 더 성장하면 팔족흑사는 묵염목의 곁을 떠날 수 없다.
항응의 몸속의 내단도 꿈틀거렸다. 마치 항응에게 자신의 동족을 도와달라고 사정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항응은 눈을 감고 내기를 뻗었다. 항응의 몸에서 나간 기운은 주변의 정보를 탐지하여 항응에게 알려주었다.
주변의 정보를 받아들인 항응은 어느 순간 숨이 멎었다. 심장의 박동도 멈추었고 사고도 멈췄다. 항응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몸짓을 통해 동시에 칠권을 내 뻗었다. 항응의 칠권이 끝나자 멈췄던 세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곱개 구멍 중 하나를 통해 달빛이 흘러들어왔다. 낮이면 햇빛이 흘러들어올 것이다. 햇빛과 달빛이 부족하지만 묵염목은 항응의 뱃속으로부터 많은 기운을 뽑아갔다. 크게 성장한 묵염목은 부족한 햇빛과 달빛에도 늦지 않게 팔족흑사를 승천시킬 것이다.
묵염목을 감아타며 달빛에 목욕하던 팔족흑사는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두방울의 눈물은 땅에 남아있던 한장의 비늘위에 떨어지더니 맑고 고운 소리를 냈다. 항응은 비늘과 두개의 눈물을 주어들고 팔족흑사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폭포밖으로 나온 항응은 커다란 바위들을 옮겨다가 폭포뒤의 동굴을 꼼꼼히 막았다. 누구든 팔족흑사를 만나려면 천근은 넘어갈 바위 몇개를 동굴로부터 끄집어내야 한다. 상쾌한 기분을 느낀 항응은 비늘과 눈물방울 두개를 들고 모닥불로 돌아갔다.
소월은 항응이 걱정되었는지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항응이 가까이 다가오자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의형, 얼굴이"
그제야 항응은 묵염목의 이파리가 떨어져나가 맨얼굴임을 알아챘다. 황급히 돌아선 항응은 칠성비를 꺼내 비늘에 두개의 구멍을 뚫은 후 얼굴에 갖다댔다. 그리고 가죽을 꼬아만든 가는 줄로 대충 묶어맸다.
얼굴을 가린 항응이 다시 돌아서니 소월은 크게 놀랐는지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자신의 얼굴때문에 소월이 크게 놀랐을 것이란 생각에 항응은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소월아, 이거 보여? 이거 용루석(龍淚石)이라고 용이 흘린 눈물이야."
소월은 달빛을 받아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두개의 보석에 곧바로 정신을 빼앗겼다. 차마 손에서 놓기 싫어하는 소월에게 항응은 대수롭지 않다는 어투로 말했다.
"세상에 몇개 없을거야. 나도 예전에 책에서만 봤어. 이쁜 보석이니까 네가 가져."
소월은 고개를 저으면서 거부의 뜻을 표했다. 하지만 입으로 명확히 싫다는 표현은 안 했다. 항응은 소월을 등지고 비늘에 몇개의 구멍을 더 뚫었다. 끈으로 고정하기 쉽게 필요한 위치에 구멍을 뚫은 뒤 항응은 새로운 가면을 다시 착용했다.
"이거 용의 역린(逆鱗)이야. 일부 사람들이 역린을 찌르면 용이 죽어서 용의 요해라고 하는데 다 헛소리야. 역린은 용의 모든 부위중 가장 단단한 부위야. 가장 단단한 부위를 찌를 수 있으면 당연히 용을 잡을 수 있지. 하지만 역린을 뚫지 못하면 용을 죽일 수 없어. 다른 곳을 아무리 찔러도 죽지 않거든."
엄밀히 말하면 용의 역린보다는 급이 떨어지는 팔족흑사의 역린이다. 하지만 항응은 굳이 구분하지 않았다. 어차피 몇백년 후면 팔족흑사는 용이 된다. 그러면 그때는 용의 역린인 것이다. 미리 수백년 앞서가도 문제될 일은 없다.
소월은 색색의 명주실과 비단실을 꺼내 꽈기 시작했다. 수많은 색의 실들을 꼬아 굵은 실을 만들고 그 실들을 꼬아 용루석을 감쌌다. 용루석을 물샐틈없이 감싼 후 줄에 연결해서 목걸이를 두개 만들었다.
소월은 하나의 목걸이를 자신이 걸고 남은 하나는 항응에게 걸어줬다. 꼼꼼히 감싼 덕분에 용루석은 보이지 않았다. 누가 봐도 그저 색이 이쁘기만 한 실로 만든 목걸이가 성 몇채를 가져다 줘도 바꾸지 않을 비싼 보석이라는 것을 알수 없을 것이다.
- 작가의말
天意莫測, 하늘의 뜻을 가늠하지 마라 혹은 하늘의 뜻은 가늠할 수 없다. 두가지 뜻 다 되겠습니다.
주변의 정보를 받아들인 항응은 어느 순간 숨이 멎었다. 심장의 박동도 멈추었고 사고도 멈췄다. 사고가 멈춘 항응은 아무 생각도 없었다. 왜냐면 아무 생각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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