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골면장
한의 은제 유승우가 업도로 자객을 파견하여 곽위의 암살을 시도했다. 하지만 암살에 실패하고 오히려 곽위의 반란을 부추기게 되었다. 반란을 일으켜 수도를 점령한 곽위는 개봉을 수도로 하고 국호를 주(周)라 하였으며 연호를 광순(廣順)으로 정했다.
주의 황제가 된 곽위는 남평(南平)의 왕 고보융을 발해군주로 봉했다. 형주에 수도를 둔 남평국은 약세를 인정하고 강한 나라에 부속하여 국가를 유지했다. 원래 한의 신하를 자청했지만 곽위의 반란으로 한이 주로 바뀌자 곧바로 주의 신하를 자처했다.
남평은 주, 촉, 당, 초 등과 국경을 인접하고 있으며 남한(南漢)의 상인들도 북으로 향할 때에는 남평을 경유한다. 거기에 초나라가 연속 삼년간 왕위쟁탈전을 벌이며 유민이 대량으로 발생했는데 이 유민들이 남평으로 유입되었다.
남평은 주변의 여러 나라들과 교역을 하면서 그 차익으로 국가를 유지한다. 주나라뿐 아니라 촉이나 당, 초에도 신하를 자처하면서 공손히 대했다. 주변 나라들은 이러한 남평의 고씨 왕족들을 고뢰자(高賴子 - 뢰자는 몰염치한 사람을 낮춰 부르는 말)라 폄하(貶下)하였다.
하지만 왕족들의 고개가 숙여질 수록 백성들의 삶은 꽃피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수천명 인구밖에 살지 않는 작은 현성에도 도박장이 있었고 도박장은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도박장에서 하는 노름은 몇개 없다. 귀뚜라미싸움을 벌이는 솔투는 평소 가장 인기가 있는 종목이다. 승리한 귀뚜라미는 솔왕으로 봉해진다. 솔왕이 되면 도박장에서 그 귀뚜라미를 은자 한냥을 주고 사들인다.
솔왕과 손님이 가져온 귀뚜라미의 싸움은 승패에 돈을 걸 수 있다. 맞추면 무조건 두배로 돌려주는 솔투는 도박장의 주 수입원이다. 거기에 할일 없는 한량들도 도박에 참여하지 않지만 솔투를 구경하는지라 항상 수십명씩 붐빈다.
하지만 오늘만은 대부분 사람들이 솔투판이 아닌 주사위판에 모여 있다. 주사위는 오래되고 간단하지만 그만큼 싫증이 나지 않는 노름이다. 도박장마다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주사위노름을 벌이는데 이 도박장은 많은 도박장과 같은 규칙을 사용한다.
죽통안에 주사위 세개를 넣고 흔든 뒤 판에 엎어놓는다. 그리고 세 주사위의 점수를 합친 걸로 대, 중, 소를 맞춘다. 사점부터 칠점까지 소이고 팔점부터 십이점까지 중이다. 십삼점부터 십칠점까지 대이다. 일 세개는 삼점홍이라 해서 여기에 건 손님이 없을 경우 장(庄 - 주사위 던지는 사람,도박장의 직원)이 판돈을 몰수한다. 육 세개 역시 표자(彪子)라 칭하며 표자에 돈을 건 손님이 없을 경우 장이 판돈을 모조리 가져간다.
대부분 손님은 소, 중, 대 셋중 하나를 선택한다. 소중대는 판돈을 두배로 돌려준다. 삼점홍과 표자는 다섯배로 돌려주고 나머지 판돈을 장과 반반 나눈다. 삼점홍이나 표자를 맞출려면 최소 은자 한냥이 필요하다. 하지만 삼정홍과 표자는 한달에 몇번밖에 볼 수 없는 희귀한 것이다. 거기에 은자 한냥이 적은 돈은 아니라서 보통 거기에 거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오늘은 도박장에 액이 낀 날인지 한명의 손님이 삼점홍 두번에 표자 한번 해서 은자를 총 삼십냥 따갔다. 은자 삼십냥이면 편벽한 곳에 작은 장원 한채를 살 수도 있는 돈이다. 그러나 연속하여 세번이나 돈을 딴 손님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않고 또 표자에 두냥의 은자를 걸었다.
주사위 세개를 죽통에 넣은 장은 손을 덜덜 떨었다. 주사위의 장은 두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기교를 부리지 않는 정장(正庄)이고 하나는 손장난을 치는 천장(千庄)이다. 몇년전에 데리고 있던 천장을 큰도시의 도박장에 빼았긴 후 주인은 솔투를 주업으로 바꿨다.
주사위 정장은 도박장 주인의 먼 친척조카이다. 어차피 스물이내의 덧셈만 가능하면 되는 일이라 도박장 주인은 조카에게 주사위판을 맡긴 것이다. 하지만 은자 삼십냥이 걸린 문제라면 조카라도 목을 딸지 모른다.
도박장의 규정대로라면 처음에 은자 열냥을 잃는 순간 바로 주인을 호출했어야 했다. 하지만 손님의 재수없는 웃음에 화가 치솟은 정장은 호출을 보류했다. 손님이 주사위를 흔들기도 전에 삼점홍에 은자 두냥을 걸자 호출을 미루고 승부에 임했던 것이다.
삼점홍이 연속 두번 나오고 그다음 표자가 나오자 정장은 혼이 다 빠져나갔다. 자신이 귀신에게 홀렸거나 저기 은자를 걸고 재수없는 웃음을 짓는 놈이 요괴임이 틀림없다. 다행히 혼이 빠진 정장을 대신해 솔투를 진행하던 솔장이 도박장 주인을 이미 호출했다.
도박장 주인이 나타나자 정장은 고개를 푹 숙이고 주사위판에서 물러났다. 오늘 어떤 결과가 되던 자신은 일자리를 잃을 것이다. 사실 은자 열냥을 잃었을 때 호출했다면 그저 몇대 얻어맞고 끝날 일이다. 하지만 자신이 호기를 부리는 바람에 안정적이고 고수익의 일자리를 차버린 셈이다.
도박장 주인은 왼팔뚝에 검은 야차문신을 하고 있었다. 도박장 주인을 따라온 자들도 힘깨나 쓸 우락부락한 자들이었다. 도박장 주인은 주사위판에 앉은 뒤 죽통을 흔들었다.
손님은 정장이 주사위를 흔들기도 전에 은자 두냥을 표자에 걸었다. 그리고 다른 손님들은 구경만 하고 노름에 참여하지 않았다. 주인은 죽통을 흔들다 덮지 않고 그대로 판위에 주사위 세개를 쏟아냈다.
주사위는 이, 삼, 사로 구점 나왔다. 그러자 손님은 웃으면서 은자 넉냥을 표자에 걸었다. 이번에는 삼, 사, 육이 나왔다. 그러자 손님은 은자 여덟냥을 표자에 걸었다. 오, 오, 육이 나오자 손님들은 탄성을 질렀다.
손님이 은자 열여섯냥을 표자에 걸자 주인은 한발 물러서서 심호흡을 했다. 만에 하나 표자가 나오면 은자 팔십냥을 손해보게 된다. 주인은 다시 한번 은자 열여섯냥을 표자에 건 손님을 바라보았다.
손님은 청색옷을 입고 있었다. 당나라의 풍속에 따르면 일반 백성들은 황토색의 옷을 입어야 한다. 물론 의복에 대한 규제가 사라진지 수십년이 되지만 아직도 일반 백성들은 황토색의 옷을 입는다. 황토색 천이 가장 싸기 때문이다.
청색옷에 신발은 노루가죽으로 만든 고급 혜(鞋)이다. 머리에는 청색 영웅건을 두르고 있다. 옷을 격식에 맞춰 입은 걸 보면 어느 정도 신분이 있는 사람 같았다. 옥이나 비취, 마노로 된 장식품은 없었지만 잔잔한 웃음을 띄 얼굴에는 여유가 흘러넘쳤다.
최대한 티나지 않게 심호흡을 한 도박장 주인 흑야차는 죽통에 주사위를 넣고 흔들었다. 하지만 너무 긴장한 탓인지 전에 세번처럼 바로 주사위를 판에 보이게 내리지 않고 죽통을 엎었다.
곧바로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린 흑야차는 죽통을 들어올렸다. 죽통을 들어올리자 희한한 장면이 모두의 앞에 펼쳐졌다. 보이지 않는 손이 만지기라도 하는 듯 주사위의 면이 척척 바뀌더니 표자가 되어버렸다.
손님이 장난을 쳤음이 밝혀지자 험상궂은 흑야차의 얼굴이 진짜 야차를 방불케 했다. 하지만 흑야차는 내공으로 주사위를 마음대로 움직이는 고수에게 칼을 뽑아들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주인장, 내가 새로운 무공을 배우게 되어 한번 장난을 쳤소이다. 어차피 돈을 딸 생각은 없었으니 그 돈은 가져가시오."
손님은 싱글벙글 웃으며 전혀 긴장감 없는 어조로 말했다. 적반하장도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흑야차는 말문이 아예 막혀버렸다. 하지만 이대로 얕보이면 도박장에 어중이떠중이들이 꼬여들 가능성이 크다. 흑야차는 열리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원래 도박장에서 손장난을 하면 작게는 손가락 하나, 크게는 손 한짝을 내놓아야 하는 법이오. 형장이 악의가 없었다고 하니 내 이번만은 눈감아 주리다. 단 어떤 장난을 쳤는지 자세히 설명을 해야 할 것이오."
손님은 여전히 전혀 긴장하지 않은 어투로 대답했다.
"화골면장이라고 들어봤는지 모르겠소. 격산타우(隔山打牛) 장법중 거의 최고로 치는 수법이오."
손님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여섯점이 위로 향했던 세개의 주사위의 윗면이 여러차례 바뀌더니 삼점홍이 되었다.
"보시다시피 나정도의 고수가 아니면 불가능한 수법이오. 경지에 오른 자는 발로도 시전 가능하니 눈치 챌 가능성이 없다고 보면 되오."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에 손님들은 입을 쩍 벌렸다. 청의인의 손가락이 탁자를 두드릴 때마다 주사위의 점수가 계속하여 바뀌었다.
"주사위의 면에 따라 탁자와 부딪힐 때의 소리게 미세하게 차이가 나오. 물론 나 정도의 고수라면 어렵지 않게 분별할 수 있지."
흑야차는 청의인에게 포권을 했다.
"형장의 고명한 수단을 잘 보았소. 이 흑야차가 덕은 없으나 친구를 사귐에 인색함이 없소. 술 한잔 대접하고 싶은데 형장의 뜻이 어떤지 궁금하오."
대답은 청의인이 아닌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투량환주(偸梁換柱)의 하찮은 무공을 화골면장으로 둔갑 시키다니. 참으로 타고난 사기꾼이로구나."
- 작가의말
새로운 시작입니다. 좀 더 대중적으로 써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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