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산소림
만화궁의 제자들은 호만천의 죽음에도 감히 소리내어 울지 못했다. 흑풍혈로의 심기를 거스렸다가 화를 당할까 겁이 난 것이다. 항응은 복수를 완성했지만 후련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당연히 해야할 일을 끝낸 개운함만 조금 있었다.
홀로 소림사를 향해 말을 달리면서 항응은 깊은 사고에 잠겼다. 복수가 끝났으니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문득 흑풍혈로가 나타나자 무기를 버리고 땅에 엎드려서 항복을 하던 북한군의 병사들이 생각났다. 흑풍혈로를 거느리고 황제와 의형을 도와 천하통일을 하는 것은 어떨지 생각했다.
그 누구도 감히 맞설 엄두를 내지 못할만큼 강한 군대를 만들어서 피를 최대한 적게 흘리며 태평성세를 만들고 싶다. 향락과 사치에 물든 왕에게 내팽겨처져 힘들게 살아가는 백성들을 구원하고 싶다. 왕이 왕답고 대신은 대신답고 백성은 백성다운 세상을 만들고 싶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옥조가 작은 점으로 보였다. 옥조는 한시도 항응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날아다니는 것을 좋아해 낮에는 항상 항응의 머리위에서 날아다녔다. 밤이 되면 항응의 곁에서 꾸벅거리며 잠에 든다.
문득 항응은 커다란 깃발을 만들어서 옥조에게 잡고 날게 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호기군은 전장에 나갈때 깃발만 들고 무기를 지니지 않는다. 일반병사들에게는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이지만 또한 죽어나가기 쉬운 자리이기도 하다. 차라리 말귀를 알아듣는 옥조에게 들고 날아다니라고 하는게 훨씬 안전하다. 절대 멋있어 보여서 그런건 아니다.
밤이 되자 항응은 말을 멈추고 마른 땅을 찾아 모닥불을 지폈다. 해납백천 덕분에 항상 운기가 되는 항응은 잠자리를 크게 따지지 않는다. 소월과 검동을 데리고 다닐때는 둘을 생각해서 최대한 좋은 자리를 찾아야 하지만 혼자서 다니니 이런점이 편했다.
소금밖에 없지만 바삭하게 구운 새구이는 맛있었다. 가면을 벗은 항응은 누워서 하늘의 별을 쳐다봤다. 하늘에 별이 몇개나 있을까 궁금해서 별을 세는데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부친과 모친이 미친듯이 보고 싶었다.
이튿날 항응은 거의 점심이 다 되어서야 잠에서 깼다. 간밤에 크게 울고나니 마음이 시원했다. 가면을 쓰고 말에 올라탄 항응은 적구에게 소리 질렀다.
"자, 적구야, 숭산 소림사로 가서 이 절세신응의 위명을 알려보자꾸나."
마음껏 뛸수 있게 되어 신이난 적구는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렸다. 멀리서 바라보면 붉은 그림자와 검은 그림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흑풍이 혈로위를 달리는 것 같았다.
"적구야, 내가 너에게 별호 하나 지어주마. 적전추풍(赤電追風) 어떠냐. 너는 이제부터 적전추풍 적구인 것이야. 강호에서 허리에 힘주고 다니려면 별호 하나는 있어야 해."
인간은 목에 힘주고 다녀야 하지만 말인 적구는 허리에 힘줘야 한다. 항응의 말을 알아들은건지 아니면 마냥 신난건지 적구는 가뜩이나 빠른 속도를 더 빠르게 했다. 자신이 직접 비천등운을 시전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쾌감이 항응을 즐겁게 했다.
태원은 소림까지 천리가 조금 넘는다. 평범한 천리마보다는 조금 더 빠른 적구라면 하루에 도착해야 한다. 하지만 곧게 달리지 못하고 중간중간 속도를 줄여야 하기 때문에 사흘째 점심이 되어서야 소림사에 도착했다.
항응은 소림사에 찾아가봤자 쌀죽에 풀채만 나올것이 뻔한지라 등봉현의 객잔에서 점심을 먹었다. 전력으로 달리느라 고생한 적구에게도 삶은콩을 넉넉히 먹이라 당부했다. 항응이 던져준 동전에 점소이의 얼굴에 꽃이 피었다.
소림사는 소실봉의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말을 타고 갈 수 있었다. 산문을 지키던 지객당에 속한 중은 항응의 외견이 범상치 않은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대했다. 항응은 패왕성주 항불의 손자라 소개하며 중요한 일로 소림방장을 뵈었으면 한다고 얘기했다.
중은 안으로 소식을 전한 후 항응을 정자로 안내했다. 항응은 정자에 앉아서 소림의 풍광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윽하여 중이 다가와서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현재 방장이 중요한 일이 있어 당장 만나는 것은 어렵다고 합니다. 우선 객방에 짐을 푸시고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중이 말을 끝내자마자 항응은 화를 벌컥 냈다.
"내가 온 일은 주의 황실과도 관련된 일이오. 소림사가 주황실을 무시한다면 나는 이대로 돌아가겠소."
항응의 말에 대경실색한 중은 다급히 항응에게 사죄를 하고 다시 안으로 기별을 넣었다. 감히 항응에게 왜 일찍 주황실의 일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냐고 따지지도 못했다. 항응은 복호사나 천룡사와는 달리 세속적인 분위기에 물든 소림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흰 수염을 기른 중이 나와 항응을 맞이했다. 키가 왜소한 중은 지객당을 맡고 있는 굉자(宏慈)스님이었다. 항응을 방장실로 안내하면서 굉자가 이것저것 캐물었지만 항응은 구렁이 담넘듯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
천천히 걸어서 방장실로 도착하니 적지않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서른도 안되어 보이는 젊은 중 하나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굉자는 문내에 일이 생겨서 먼저 처리해야 하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방장스님, 우리는 도부(屠夫 - 백정)가 아니라 중입니다. 당연히 불경공부를 해야지 왜 허구한 날 무공수련만 시키는 것입니까.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소림방장 굉태는 머리가 아파왔다. 지호(智浩)라는 법명을 받은 이 젊은 중은 무공에 대한 자질이 뛰어나다. 그래서 다른 중들보다 더 엄하게 수련을 시켰는데 본인은 불경공부를 하겠다고 수련을 등한시했다.
"지호야, 어떤 사람은 중이 되고 어떤 사람은 도사가 되고 어떤 사람은 농부가 된다. 사람마다 적성(適性)이라는 것이 있다. 그건 부처님의 안배이니라. 너는 무공에 적성이 맞으니 무공수련에 조금 더 힘을 써야 한다."
"하지만 방장스님, 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것이 무공수련하는 것보다 더 좋습니다. 불경을 외우면 머리가 맑아지고 세상이 새로워 보여서 무척이나 좋단 말입니다. 그러니 자꾸 저에게 무공을 수련하라 강요하지 마십시오."
"이놈, 그래도 그렇지. 감히 장경각에 불을 지르려 하다니. 무공서적을 다 불태우면 먼저 입멸한 선승들의 얼굴을 어찌 보겠느냐."
"아마 소림의 중들이 무공을 수련하지 않고 본분을 되찾았다고 기뻐하시지 않을까요? 어젯밤에도 육조 혜능스님이 꿈에 찾아와서 눈물을 흘리셨어요."
굉태는 머리가 아파왔다. 무공을 싫어하고 무공수련을 피하려 애쓰는 지호는 이미 소림의 절기 세가지를 익혀냈다. 가장 이해하기 어렵다는 금강부동신(金剛不動身)과 가장 복잡하고 방대한 염화지(捻花指) 그리고 이제껏 익혀낸 사람이 없는 화엽공(花葉功)을 익혀냈다.
특히 화엽공은 구결이 달랑 열글자이다. 일화일세계(一花一世界) 일엽일여래(一葉一如來), 이 모든 중들이 아는 열글자에서 지호는 화엽공을 깨달은 것이다. 꽃 하나가 하나의 세계이고 잎 하나가 하나의 부처라는 말에서 화엽공을 깨달은 지호의 천재성은 소림의 모든 중들이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호는 무공수련을 아주 싫어했다. 쩍하면 혜능육조가 꿈에 나타나서 불경공부를 안한다고 호통을 쳤다면서 무공을 소홀히 하려 했다. 처음에는 지호가 거짓말을 하는 줄 알았지만 지호가 묘사한 혜능육조의 얼굴은 남화사에 있는 혜능육조의 불신의 얼굴과 똑같았다.
어린 아기때부터 소림사에서 자란 지호가 남화사에 있는 혜능의 얼굴을 알리가 없다. 그래서 어쩔수없이 불경공부를 허락했는데 점점 불경공부에 빠져서 무공수련시간도 빼먹곤 했다. 무공수련을 하라는 간섭이 심해지자 장경각에 불을 놓으려고 시도하다 장경각을 지키는 나한당의 제자들한테 발각되어 잡혀온 것이다.
"달마대사께서는 네 꿈에 나타나서 무공수련을 하라고 눈물을 흘리시지 않더냐?"
"아직 나타나신 적은 없지만 아마 그분도 불경공부를 하라고 하실걸요. 무공은 체력을 기르고 마음을 단련해서 불경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기위한 도구입니다. 무공수련에 더 힘을 쓰면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굉태는 자신을 가르치려 드는 지호때문에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계율당 당주 굉후(宏珝)에게 눈짓을 했다. 굉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엄숙하게 선포했다.
"소림의 제자 지호는 무공수련을 등한시하고 장경각에 불을 놓아 소림의 책들을 불태우려 한 죄로 복마동에 석달간 면벽회개의 처벌을 내린다."
지호는 일어나서 불호를 외쳤다. 밖으로 향하던 지호는 항응을 보고 말을 걸었다.
"시주, 인연인듯 한데 저녁에 복마동에 와서 얘기 나눕시다."
계율당에 속한 중은 지호가 소림사 망신을 더 시킬까 두려워 소매를 끌고 나갔다. 항응은 아미파의 누군가가 생각나서 저녁에 한번 찾아가볼까 생각했다. 지호가 나가자 항응은 소림의 방장에게 인사를 올렸다.
"후배 패왕성의 항응이 소림방장께 인사 올립니다. 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 그러는데 좌우를 물릴 수 있으신지요."
굉태가 눈짓하자 계율당의 굉후와 접객당의 굉자를 제외하고 전부 밖으로 나갔다. 곧 동자승이 차를 올렸다. 차를 단숨에 마신 항응은 찻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만화궁의 궁주 호비가 소림의 속가제자라고 들었습니다. 혹시 지금 소림에 머무르고 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접객당의 굉자가 굉태를 대신해 대답했다.
"호비는 오늘 아침에 소림에 도착해서 객방에 짐을 풀었소. 조용히 무공을 수련하다 떠나겠다고 하더군."
"혹시 석달전에 주의 황궁이 자객에게 습격당해 선황제가 붕어하신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그때 만화궁 부궁주 호불귀와 사대호법이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그리고 지금 만화궁의 또다른 부궁주인 호만천이 죽었고 만화궁은 해체되었습니다."
굉태와 광후는 굉자를 바라보았다. 접객당은 정보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굉자는 사실 북한과 요나라의 연합군과 주나라의 결과에 집중하느라 그쪽에 대한 일은 소홀히 했다. 분명 관련된 보고가 올라왔을 터인데 살피지 않았다.
굉자의 표정을 보고 연유를 짐작한 굉태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시주의 의도는 무엇이오? 왜 주황실에서 금군을 파견하지 않고 시주 혼자만 온 것이오."
항응은 전혀 흔들림이 없는 굉태에 대해 속으로 탄복했다. 황실을 암습한 자가 소림에 들어와 있다. 자칫하면 소림도 반역죄에 휘말릴 수 있다. 하지만 굉태는 침착한 척 하는게 아니라 실제로 침착했다. 강호제일세력의 수장은 아무나 가능한 것이 아니다.
"사실 만화궁을 징치하러 갔다가 놀라운 소리를 들어서 말입니다."
항응은 호만천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셋에게 들려줬다. 천인혈(千人血)을 취하면 피에 취한 요괴가 될 수 있음도 강조했다. 이야기 과정에 항응은 은근히 명경대사와 천룡생불 그리고 결선사태와의 친분을 자랑하면서 자신의 말에 무게를 실었다.
항응의 말을 듣고 고민하던 굉태는 갑자기 무릎을 쳤다.
"빨리 복마동으로 가야 하오. 시주의 말이 사실이라면 호비 그자가 노릴 사람은 지호밖에 없소."
- 작가의말
혜능이 죽은 후 이미 천삼백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시체가 썩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중국 남화사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혜능외에 명나라때 중의 시체도 보존되어 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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