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신
비구니들만 있는 관음원에 항응 일행이 머물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래서 보타문의 객방에서 쉬기로 했다. 소월과 검동은 하루종일 걷고 배를 타고 해서 피곤했는지 일찍 잠이 들었다.
항응은 자신에게 심마가 들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바로 심마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심마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심마에 빠진걸 몰랐을 때는 심마에 휘둘렸지만 심마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는 심마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었을 뿐이다.
보통 심마에 빠진 자는 곁에서 심마에 빠진 것 같다고 해도 듣지 않는다. 술에 취한 사람이 자신이 취한 줄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결선사태가 바로 심마에서 빠져나온 항응을 보고 감탄한 것이다.
항응은 자신의 마음속의 심마가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명상에 들어갔다. 하지만 곧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어났다. 해룡을 앞두고도 결코 물러섬이 없었던 항응은 자신의 심마의 일부를 확인하고 도망친 것이다.
심마는 비열하고 추악했고 나약하고 이기적이었다. 자신의 처지에 비관했고 다른 사람들을 증오했다. 약한 자들을 깔보고 조롱했으며 강한 자들을 시기하기 질투했다. 아름다운 것을 소유하고 싶어하며 동시에 그것들을 파괴하고 싶어 했다.
항응은 자신이 아직 심마를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인정했다. 우연과 필연이 겹쳐 무공의 경지가 높아졌지만 마음공부는 많이 부족하다. 항응은 다시 명상에 들어가 자신의 무공을 천천히 반추했다. 해룡에게 필살의 일검을 날릴때의 생각과 운기법을 일일이 회고하면서 그날 얻은 깨달음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이튿날 아침에 일찍 일어난 항응은 관음원에 가서 결선사태에게 인사를 올리고 떠나려고 했다. 물론 그전에 조언을 듣고 싶었다. 심마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그리고 심마가 발작 안하게 어떤점을 주의해야 할지 결선사태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었다.
아침 일찍 관음원을 찾아갔지만 이미 결선사태를 찾는 선객이 있었다. 결선사태는 마침 잘 왔다면서 항응을 반겼다. 그리고 먼저 온 손님한테 항응을 소개했다.
"시주, 이 소협이 바로 내가 추천해 드렸던 항소협이오. 해남의 해룡을 처단한 대영웅이시지."
"대영웅이라니 부끄럽습니다. 단지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어서 어쩔수 없이 감당한 것입니다. 다른 적임자가 있었다면 뒤도 안 보고 꽁지 빠지게 도망쳤을 겁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고려에서 온 김현이라고 합니다. 경주에 터를 잡고 있지요. 가문에 위급한 일이 생겨서 신니께 도움을 청하러 왔는데 대협을 추천해 주셨습니다. 부디 귀한 손을 빌려 우리 가문을 구해주시기 바랍니다."
"항시주, 명경이나 생불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내 말을 들어서 낭패는 없을 것이오. 그리고 고민하는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오. 회피하며 자기기만을 하지 않고 똑바로 직시하시오. 그러면 이세상 그 무엇도 당신에게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오."
결선사태가 해준 말은 사실 특별한 것이 없었다. 어찌보면 항응도 다 알고 있는 말들이다. 하지만 결선사태가 입으로 직접 말해주는 것을 들으니 마음이 놓였다. 자신의 마음공부가 부족해서 다른 사람한테 의지하는 것이라 생각되어 마음을 다스리는데 더욱 심혈을 기울이기로 결심했다.
김현의 가문은 고려의 경주에 자리잡고 있었다. 대대로 수많은 명사를 배출하여 그 명망이 고려 전체에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하지만 수개월전부터 가축들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더니 급기야 노복 몇이 죽어나갔다.
가축들이 죽을때는 축역(畜疫)을 의심했지만 노복들까지 죽자 급히 스님을 청해 법사를 치뤘다. 법사가 효력이 있었는지 한동안 잠잠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또다시 사람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덕망이 높은 스님이 와서 법사를 하며 지키고 있지만 요력이 점점 높아져서 스님도 오래 버티지 못한다고 했다.
고려 전체를 뒤져봐도 방도가 없자 김현이 오월국으로 가는 사신을 자처했다. 보타신니라 불리는 결선사태에게 도움을 요청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아침일찍 관음원을 찾아 부탁을 했는데 결선사태는 자신보다 더 적임자가 있다며 항응을 추천한 것이다.
김현은 고려 전체에서도 다섯손가락에 꼽히는 인재이다. 결선사태의 추천에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고 항응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항응 역시 이것저것 재지 않고 통쾌하게 응했다. 김현은 오월국의 왕을 만나서 사흘정도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사신으로서의 임무도 소홀히 할 수 없으니 칠일이나 팔일정도 후에 출발한다고 말했다.
항응은 자신이 머무는 객잔을 김현에게 알려주고 출발날짜가 정해지면 사람을 보내라고 말했다. 김현은 하루라도 빨리 출발하기 위해 급하게 작별을 고하고 항주로 향했다. 항응은 결선사태와 담소를 더 나누다가 배를 구해 항주로 돌아갔다.
항주로 돌아간 항응은 매일 도덕경을 붙잡고 두문불출했다. 검동도 항상 검을 손에 잡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소월은 처음에는 검동을 억지로 끌고 구경을 다녔지만 곧 재미를 잃었다. 그리고 방에서 소검의 검날에 씌울 가죽검집을 만드는데 몰두했다.
관음원에서 김현과 작별한지 사일째 되는 날 이틀후에 출발한다는 전갈을 받았다. 시간과 장소를 전해받고 항응은 짐말을 처분했다. 굳이 짐말까지 배를 태워 데려갈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전갈을 전하러 온 김현의 수하에게 말 세필과 개 한마리를 실을 공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약속날짜가 되자 고려의 배에 올랐다. 고려의 배는 해남도에서 봤던 수많은 배들보다 훨씬 크고 튼튼해 보였다. 김현은 고려가 삼면이 바다로 둘러쌓였고 북의 거란과 사이가 그닥 좋지 않기 때문에 조선술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항응은 김현이 끌고 온 여덟척의 배 가운데 가장 큰 배에 올라탔다. 해남도에서 보아왔던 수많은 배들과 달리 돛이 하나가 아니었고 선미에도 타가 하나 있었다. 왔던 일이 좋은 결과를 얻었는지 낯빛이 어두운 김현과는 달리 다른 사신단의 사람들은 밝은 얼굴이었다.
항응은 식사가 끝난 후 김현과 함께 철관음을 우려 먹었다. 김현은 배를 타고 여러곳으로 다니며 보고 들었던 재밌는 이야기로 일행의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소월은 고려에도 진주조개가 나는지부터 질문했다. 김현은 진주조개가 나는 곳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검동과 소월을 통해 해룡을 처단한 과정을 들은 김현은 깊은 감동에 빠졌다. 항응은 내단 생각에 또 한번 배가 아파왔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늘도 뭔가 생각이 있으면 자신에게 다른 보답을 해줄 것이다.
항응은 김현과의 대화에서 김현의 학식이 대단함을 느꼈다. 비록 항응이 가르치려는 선생들을 하루만에 돌려보냈다지만 그건 선생들의 수준이 낮아서이다. 진짜 학식이 높은 선비들은 돈을 받고 남을 가르치는 일을 수치스럽게 여기기 때문이다.
항응은 김현에게 도덕경을 보여주면서 함께 그 의미를 모색했다. 김현은 이이수필이라는 글에 감격하여 눈물마저 흘렸다. 비록 낭설이기는 하지만 공자가 노자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혹은 공자가 노자와 대담을 하고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등 노자를 공자보다 높게 보는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천년이 훌쩍 넘는 기나긴 시간뒤에 역사에 커다란 발자국을 남긴 위인의 자취를 접할 수 있게 되자 김현이 느낀 감격은 쉽게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죽간의 글을 쉬임없이 읽은 김현은 죽간을 손에서 놓으려 하지 않았다.
"불민한 제가 함부로 평가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이 죽간은 하루이틀 사이에 완성된 것이 아닌 듯 합니다. 보시면 글자마다 필체가 미세한 차이가 있습니다. 만약 이 죽간을 한꺼번에 완성했다면 필체가 균일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용된 먹물의 색이 똑같소. 거기에 마지막에 우득소오라고 적었소. 우연히 작은 깨달음을 얻어서 글을 적었다고 했는데 완성하는데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을 것이오. 필체가 조금씩 다른 건 큰 깨달음을 얻고 격동하여 그럴수도 있지 않겠소?"
"그건 아닙니다. 격동하여 그랬다기엔 아예 서법 자체가 다릅니다. 글을 쓰는 방식 자체가 몇번이나 변화했습니다. 제 부족한 소견으로는 오래 고민하며 쓰다보니 필체가 달라진 것 같습니다. 우득소오유초자는 아마 글을 완성한 후 마무리를 위해 남긴 글 같습니다."
"하지만 이이수필이라고 적었단 말이오. 그건 이 죽간을 완성한 자는 이이 본인이라는 것을 밝히고 싶었던 것이오. 나는 단순히 도덕경의 내용을 적은 죽간이 아니라고 생각되오."
김현이 꾀를 내어 글자들을 거꾸로 읽기도 하고 가로 읽기도 하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기도 했다. 심지어 사선으로 읽기도 했고 글자 하나하나의 필획을 따져 오행에 도입해 보기도 했다. 둘은 고려를 향하는 내내 죽간을 들고 연구했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답답해진 항응이 죽간을 물에 담궈보자고 제안하자 김현이 목숨을 걸고 막았다. 소월이 얻은 소검보다도 더 진귀한 물건이 바로 노자친필의 죽간이다. 거기에 널리 알려진 도덕경보다 삼백자 이상 적은 도덕경은 노자가 원래 표현하고자 했던 의미들이 더욱 명확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도덕경들은 자신이 뛰어나다 생각했던 우매한 자들이 마음대로 글을 추가하여 일부 의미를 흐리게 했다.
김현은 바다가 평정할 때마다 붓을 들고 종이에 죽간의 글을 옮겼다. 처음에는 글자만 옮겼지만 후에는 필체도 따라하려 했다. 하지만 죽간의 필체를 똑같이 따라했음에도 불구하고 김현은 만족하지 못하고 종이를 찢어버렸다.
고려에 다 도착할 즈음이 되자 김현은 죽간의 글씨 크기와 모양, 글자 사이의 간격까지 똑같이 종이로 옮길 수 있었다. 항응의 눈에 똑같아 보이는데 김현은 여전히 불만이었다. 그래도 마지막 한장은 찢지 않고 품속에 간직했다.
김현은 개성으로 가서 왕을 알현해야 한다. 그래서 항응 일행을 합포에 내려줬다. 수하 열을 함께 내려 항응을 모시고 경주로 향하게 했다. 서신에 항응에 관한 사실들을 소상히 적어서 가문의 환란을 없애는데 크게 의지하라 당부했다.
세필의 말은 오랫동안 갇혀있어서 몸이 근질거렸던 차에 말발굽에 불이 붙도록 달렸다. 김현의 수하 열명은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하며 겨우겨우 뒤쫓았다. 항응은 한참 달리다가 말에서 내린 후 안장을 벗기고 자기들끼리 뛰어다니게 했다. 김현의 수하들이 항응을 따라잡았을 때는 말들이 지칠대로 지쳐서 더는 이동하기 힘들었다.
일행은 경주에 도착한 후 김현의 본가로 향했다. 김현의 본가는 으리으리한 기와집이었다. 화려함은 없었지만 고풍스럽고 대가의 손길이 느껴졌다. 김현의 쌍둥이 동생 김빈이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 작가의말
고려로 갑니다. 참한 고려처자, 아니 고려청자 하나 구했으면 합니다.
글 읽는 독자 제현들 안녕하신가. 나는 다음작에 나올 천마의 둘째제자라네. 나의 할아버지는 집안 둘째였네. 그리고 아버지도 둘째였고 나도 형 하나 있어 둘째라네. 열두살때 과거시험을 봤는데 그만 방안(榜眼 - 장원 다음 이등)을 했네. 또 두번째냐 하고 화가 나서 조정의 부름을 거절했지.
내가 사부를 처음 만났을 때 사부가 나를 보더니, 절정까지는 무난하나 절정을 벗어나지 못하니 평생 이등할 팔짜구나 라고 하더군. 그래서 여직껏 항상 두번째였다고 신세한탄을 하니 내 이름을 이가 많다고 사이다(史二多) 라고 지어주셨네.
혹시 다음 작품을 보다가 천마가 나오는데 왜 사이다 없냐 할까봐 작가 양반이 나를 미리 캐스팅, 아니 배역을 준거지. 내가 사부의 둘째제자가 되는 순간부터 사이다가 나온다네.
그럼 사부를 만나기전 내 이름이 뭐냐고? 사이비(史二非) 였다네. 맏형이 죽자 너는 이제부터 둘째가 아닌 장남이다 이러면서 부친이 이름을 사이비로 고쳤네. 그럼 처음 이름이 뭐냐고? 사이고(史二高) 였네. 형이 있으니 두번째로 높은 사람이다 이런 뜻이지.
그럼 형은 왜 죽었냐고? 형의 이름이 도세자였네. 부친한테 개기다가, 아니 저항하다가 슬프게 떠났네. 장남의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거지.
작가양반이 천마 나오고 사이다 나오고 그럴 양반이 아니라고? 그건 틀렸네. 작가양반 별명이 뭔줄 아나? 이 양반이 소처럼 부지런하다고 해서 양반소이네. 천마와 나의 더블캐스팅, 아니 쌍두마차면 선작 오천은 기본으로 깔고 간다나.
내가 다음작품 나오는게 확정이냐고? 아직 계약서에 지장을 찍지는 않았지만 작가양반이 삼천 선호작의 위력을 가진 이 사이다를 감히 버릴 수 있을까? 그래서 사람은 명이 중요하네. 내가 사씨가문이 아니라 뻥씨 가문에서 태어났다면 배역을 받지 못했을 거네.
그리고 잊고 말 못한게 하나 있는데 사씨가문과 홍씨가문은 이성동본이라네. 이등사씨, 이등홍씨라고 하면 웬만한 별전쟁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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