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불식
단사영은 항응의 말에 입을 쩍 벌렸다. 육맥신검의 소상검만 놓고 봐도 중부, 운문, 천부, 협백, 척택, 공최, 열결, 경거, 태연, 어제, 소상의 혈도를 거친다. 하지만 내공을 저 순서대로 운기한다고 해서 소상검이 나가는 것이 아니다.
중충검은 아홉개의 혈도, 소충검도 아홉개의 혈도, 소택검은 열아홉개의 혈도, 관충검은 스물세개의 혈도, 상양검은 스무개 혈도를 사용한다. 총 서로 다른 아흔한개의 혈도를 거치면서 내공의 강약이나 흐름의 속도가 정확해야만 육맥신검이 시전되는 것이다.
여섯갈래 내공의 속도와 강약이 정확해야 하며 하나라도 빠지면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아 내공만 몸밖으로 빠져나간다. 자칫 실수하면 내상을 입을 수도 있는 것이 육맥신검이다. 단사평도 우연에 우연이 겹쳐 일양공으로부터 육맥신검을 얻은 것이다.
그런데 천룡사에 온지 이틀밖에 안되는 항응이 육맥신검을 하나씩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하니 단사영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항응의 손가락에서 기검이 자라는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오른손 식지로 뽑아낸 상양검을 항응은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아지랑이처럼 느물거리며 흐릿하게 보이지만 확실히 손가락에서 빠져나온 내공이 한뼘 정도의 기검을 형성하고 있었다. 단사영은 입에서 침이 흘러나오는 것도 모르고 상양검을 멍하니 쳐다봤다.
항응이 내공을 거두자 상양검이 사라졌다. 아쉬운 눈으로 항응의 손가락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단사영은 입가의 침을 승복의 소매로 쓱 닦았다.
"너는 되는데 나는 왜 안될까?"
"당신은 배운대로만 하려 했소. 하지만 나는 내공을 뽑아내서 기검을 만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소. 당신은 수단에 얽매여 목적을 보지 못했고 나는 수단을 잘 몰랐지만 목적이 명확했기 때문이오."
항응은 주지스님에게서 얻은 본질과 쓰임새의 깨달음을 단사영에게 알맞게 풀어서 설명해줬다. 단사영 또한 자질이 범상치 않은 자이다. 오랫동안 붙잡고 있던 화두에 실마리가 생기자 곧바로 정좌를 하고 명상에 들어갔다.
항응은 누군가 단사영의 깨달음을 방해할까 주위를 살폈다.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주지스님이 곁에 와 있는 걸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주지스님이 손을 휘젓자 일을 하던 학승들의 몸이 둥실 떠올라 멀어졌다. 학승들은 익숙하다는 듯이 주지스님을 향해 합장을 할 뿐 놀란 기색이 전혀 없었다.
이기섭물(以氣攝物)의 한수에 항응은 주지스님의 경지와 복호사의 명경대사의 석침대해를 비교했을 때 어느 경지가 더 높을지 의문을 품었다. 항응의 의문을 알아차렸는지 주지스님은 한마디 했다.
"태산의 꼭대기와 작은 뒷산의 꼭대기 중 어느 꼭대기가 더 꼭대기일까?"
길이 다르니 굳이 비교할 필요가 없다는 주지스님의 말에 항응은 고개를 끄덕였다. 본질이 다르고 쓰임새가 다르다. 그러면 굳이 같은 자로 잴 필요가 없다. 항응은 단사영의 몸이 부풀어 올랐다 쪼그라드는 모습을 흥미롭게 관찰했다.
명상에서 깨어난 단사영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먼저 항응에게 합장을 하여 감사함을 표현한 뒤 주지스님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자 원통(圓通)이 조사님께 뒤늦게 인사드립니다. 미망에서 깨우쳐 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하늘이 굽어살폈구나. 근래 천기를 살피니 흑기가 자미성을 침범하더구나. 곧 천하에 큰일이 생길텐데 네가 마음을 잡지 못하면 어쩌나 속을 태웠다."
"제자가 불민하여 걱정을 끼쳐드렸습니다. 이분 시주의 도움으로 제자가 작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조사께서 한번 봐주시기 바랍니다."
원통이 두손을 들고 운기를 하자 여섯가닥의 기검이 나타났다. 길이가 겨우 반뼘에 불과하지만 색이 선명하고 형태가 안정적이었다. 여섯개의 기검을 한참 바라보던 원통은 기운을 거두고 입을 열었다.
"그렇게 바랄 때는 얻을 수 없더니 정작 얻어보니 아무것도 아니군요. 미망을 깨고 육검을 얻은게 하늘의 뜻인가 봅니다."
"네가 얻은게 무엇인지 말해보거라. 단 신중해야 한다. 말(言)에는 힘(靈)이 있어 본질을 가린다."
원통은 합장을 하고 하늘을 쳐다봤다. 한참이나 하늘을 바라보던 원통은 마음에 드는 답을 찾아낸 듯 입을 열었다.
"순환불식(循環不息) 입니다."
원통의 대답에 주지는 만족했다는 듯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대우주든 소우주든 멈추는 순간 소멸된다. 소멸되지 않으려면 끊없이 움직이며 변화해야 한다. 탄생은 시작이 아니며 죽음은 끝이 아니다. 그저 거대한 순환속의 하나의 고리일 뿐이다.
항응의 내단속의 기운은 달이 차면 요동치며 밖으로 나오려 하고 달이 기울면 얌전해진다. 이것도 하나의 순환이다. 그리고 내단속의 기운이 잠잠한 듯 보이지만 내단안에서 부단히 순환한다. 달이 차면 그 순환의 균형이 깨지면서 여파가 밖으로 미치는 것이다.
내단속의 기운의 순환도 내단의 본질이다. 항응은 원통의 말에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주지스님에게서 혈도를 배우면서 맹룡도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이 했고 선기불신에 대해서도 조금 더 알게 되었다. 거기에 원통의 순환불식이라는 말에 내단의 본질을 더욱 명확히 깨닫게 되었고 선기불신의 쓰임새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릴 수 있었다.
본질도 흐릿하고 쓰임새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선기불신의 쓰임새에 새로운 인식을 가진
것은 내단의 본질을 더 깨달은 탓이다. 달의 기운이 강할 때 선기불신을 사용하면 자칫 항응 자신의 기운들이 내단의 순환에 휩쓸릴 수 있다. 내단은 고르게 퍼지려는 기운의 본질을 거스르는 역천의 물건으로 기운을 뭉치려 한다.
그렇게 되면 항응의 모든 기운이 내단으로 빨려 들어가 항응은 마른 시체가 되는 것이다. 내단을 가진 짐승들이 몸집을 불리는 것도 덩치를 크게 해서 신체의 일부라도 내단의 영향범위를 벗어나려는 것이다.
그러면 내단에 의해 신체의 기운이 빨리더라도 그외의 신체부위에서 그 기운을 보충해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무의식적으로 내단의 본질을 깨달으면 내단을 밖으로 토해내 달의 정기를 흡수하게 한다.
선기불신은 달의 기운이 약할 때 내단의 순환을 안정적이고 균형잡히게 바로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달의 기운이 강해지며 순환이 힘을 얻더라도 균형이 깨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달의 기운이 강할 때 선기불신으로 어줍잖게 내단의 순환에 간섭하다가는 일을 그르칠 수 있기에 총람에서 금한 것이다.
순환불식이 항응에게 준 영향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무공도 순환불식이 아주 중요하다. 공격은 자신의 순환을 이어나가 상대에게 영향을 끼친다. 반면 수비는 상대의 순환을 이루지 못하게 하여 상대가 나에 대한 영향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항응은 자신이 얻은 깨달음을 원통에게 전했다. 그리고 원통이 얻은 깨달음을 도로 전해받아 본질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이했다. 선행을 하면 공덕이 쌓여 언젠가는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말을 그닥 믿지 않았지만 순식간에 보답이 돌아오자 조금 더 선행을 베풀며 살아야 겠다고 다짐했다.
주지는 항응이 원통의 한마디에 깨달음이 깊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백팔배를 올릴까 하고 고민하다 포기했다. 이런 자를 자신의 앞에 가져다 놓은 부처님의 잘못이다. 결코 자신이 속세의 태를 완전히 벗지 못한 것이 아니다.
아마 부처님도 이 아이를 욕심낼 것이라 생각했다. 주지는 아까 하던 혈도 공부를 마저 하자며 항응을 불렀다. 원통도 항응과 함께 주지의 가르침을 받았다. 하나를 말하면 하나를 알아듣고 둘을 말하면 넷을 깨우치는 두 사람을 보면서 주지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주지는 며칠에 걸쳐 혈도에 대해 가르침을 내렸다. 가끔 이미 설명했던 혈도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설명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때마다 항응 아니면 원통이 몰랐던 사실을 깨우쳤다. 항응은 주지스님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것이 확실하다고 확신했다.
소월의 혈독은 항응이 아닌 원통이 치료했다. 항응에게서 받은 은혜를 갚겠다고 본인이 나선 것이다. 일양공에 대한 이해도 원통이 더 깊고 내공도 원통이 더 순후(純厚)하다. 그간 별다른 통증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치료를 받고 나니 소월은 몸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을 받았다.
원통이 치료하는 김에 일양공으로 체내의 잡기운들을 처리해준 사실을 모르는 소월은 그저 아픈게 나아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무공을 수련할 때 내공의 수발이 훨씬 자연스러워지자 소월은 수련에 더욱 재미를 느꼈다.
혈도에 대한 공부도 끝났고 소월의 치료도 끝났지만 주지는 항응에게 사흘만 더 머무르고 가라고 전했다. 항응과 소월도 영문을 따지지 않고 천룡사에 사흘 더 머물면서 점창산을 구경했다.
사흘이 지나자 작별의 시간이 되었다. 주지나 원통이나 항응은 담담했지만 소월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동네 할아버지처럼 친근한 생불에게 정을 많이 느낀 탓이다.
"내단이 양화(陽火)의 기운이라 한쪽으로 치우쳐서 균형이 깨져있다. 조속히 음의 기운을 가진 내단이나 영약을 찾아서 바로잡아야 한다. 해남의 땅에 해룡이 있다고 하는데 한번 찾아보거라. 사람을 해치는 악룡이니 손속에 주저함을 가지지 말거라."
항응과 소월은 상쾌한 기분으로 말을 달렸다. 마음속의 짐이던 소월의 상처가 완치가 되었다. 거기에 항응은 혈도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여 어지간한 상처는 손수 치료할 수 있다. 형의권은 운기법을 바꾸어 수련에 뚜렷한 진전을 보였다. 원공검법도 순환불식의 깨달음 덕분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다.
천룡사를 떠난지 두시진 정도 될 때 한무리의 사람들이 둘의 앞을 가로막았다. 선두에 나선 자는 봉황이 수놓아진 자색의 장포를 입고 수염을 길게 기른 자였다. 항응과 소월이 말을 멈추자 자색장포를 입은 사내가 입을 열었다.
"나는 대리국의 재상 동가라라고 한다. 그 두필의 말을 나한테 팔거라. 값은 후하게 쳐줄 것이다."
사실 서문에서 항응과 소월을 막아선 것은 원한 때문이 아니라 두필의 명마가 욕심났기 때문이었다. 억지로 둘을 잡아두고 사람을 보내 동가라에게 알렸는데 두사람이 빠져나간 것이다.
항응이 한손으로 성문을 들어올렸다는 말에 동가라는 수하의 고수들을 데리고 직접 나섰다. 동가라는 대리국 제일고수로 칭송 받는다. 물론 천룡사의 제자들은 제외하고 하는 말이었다.
동가라는 도사 출신이다. 도호는 자운(紫雲)으로 호풍환우가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단사평을 도와 대리국을 세운 후 여태껏 재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권세는 왕보다 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항응은 동가라의 기운을 가늠해보고 천룡사를 방문하기 전에는 쉽게 상대할 수 없었을 것이라 판단했다. 천룡사에서 얻은 깨달음이 아니라면 십중팔구는 동가라에게 패했을 것이다. 항응이 무공을 가늠하기 힘든 몇몇을 빼놓고 여직껏 본 사람중에 동가라가 가장 강하다.
항응은 오른손 검지를 치켜들고 상양검을 시전했다. 며칠간 혈도와 일양공에 대한 이해를 더 깊이 한 항응의 상양검은 색이 선명하고 형태도 조금 더 안정적으로 변했다.
단사평이 사용하던 육맥신검의 상양검을 확인한 동가라는 다급히 사과의 뜻을 표하고 말을 돌려 양지미로 도망갔다. 말을 달리는 동가라의 전신에서는 땀이 비오듯 내렸다. 재상부로 돌아간 동가라는 며칠간 시름시름 앓다가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 작가의말
객관적 서술을 할 때는 주지라 칭하고 항응의 시점으로 서술할 때는 주지스님이라 칭했습니다. 혹시 이런 서술이 불편하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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