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혈단심
항응이 백원과 만난지 열흘째 되는 날이 되자 복호사에는 수백의 손님이 찾아왔다. 복호사를 찾은 손님은 다름아닌 철혈방이었다. 철혈방주 철극과 우호법 장웅이 철혈방 정예 삼백을 거느리고 복호사를 찾았다.
철혈단심(鐵血丹心) 철극은 본명이 철무극이다. 젊은 시절 철무극은 의병을 조직해 토번의 침입군과 맞서 싸운 적이 있다. 그때 얻은 별호가 철혈단심이었다. 무명을 날린 철무극은 자신의 의형제 철혈도(鐵血刀) 장웅과 함께 철혈방을 만들었다.
철혈방의 세력이 점점 커짐에 따라 철무극은 자신의 야욕을 드러냈다. 필연적으로 촉의 땅에서 무공제일로 인정받던 명경대사와 마찰이 생겼다. 둘은 이름과 법호에서 한글자씩 걸고 비무를 진행했다.
명경대사는 명자돌림이라 경자를 걸고 철무극은 무자를 걸었다. 결국 백여합만에 패배한 철무극은 이름을 철극으로 바꿨다. 그후 철극은 야망을 숨기고 철혈방의 운영에만 힘을 쏟았다. 그런데 환갑이 거의 될 무렵 명경대사가 무공을 잃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여러 경로를 통해 명경대사가 무공을 잃은 것을 확인한 철극은 다시 야욕을 불태웠다. 하지만 예전과는 달리 뜻을 강호가 아닌 왕위에 두었다. 그렇게 인내심을 갖고 만반의 준비를 갖춰가는 와중에 좌호법 독고숭이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시체를 살핀 의원의 말로는 전신의 경맥이 전부 찢어졌다고 한다. 독고숭은 무공 하나만 따지면 철극보다 더 강하다. 물론 젊은 시절의 철극에는 못 미치지만 환갑이 훌쩍 넘은 철극보다는 확실히 강했다.
그리고 독고숭의 무공은 토번에서도 악명이 자자한 혈접장이다. 혈접장은 대수인으로부터 파생된 무공으로 웅혼한 내공이 없이는 시전할 수 없다. 독고숭의 내공이 얼마나 강한지 아는 철극과 장웅은 독고숭이 강한 내력에 경맥이 찢겨져 죽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독고숭의 시체와 멀지 않은 곳에서 토혈의 흔적을 발견한 철극은 둘이 양패구상을 했으리라 생각했다. 추적에 능한 자들을 찾아 흉수의 흔적을 뒤쫓았다. 흔적이 복호사로 이어진 것을 확인한 철극은 심혈을 기울여 키운 철혈기(鐵血騎) 삼백을 거느리고 복호사를 찾았다.
명경의 오만한 성정으로 절대 부상을 입고 자신을 찾아온 자를 철극에게 내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그 핑계로 복호사를 징벌하여 철혈방의 위명을 떨칠 작정이다. 철혈방은 너무 커져서 철극이 왕위를 노리지 않으면 큰 덩치를 유지하지 못하고 자멸해 나갈 것이다.
그런 면에서 철극은 패왕성의 항불을 무척이나 부러워했다. 항불의 패왕성은 철극의 철혈방보다 조금 더 일찍 세워졌다. 항불은 항우의 후손을 자처했다. 항우는 진시황이 세운 진나라를 멸망시킨 영웅이자 난세의 수호신 같은 존재이다.
패왕성은 오천의 정예병력을 유지하면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는 항우라는 정통성이 가져다주는 힘이다. 항우는 귀족출신에 직접 초나라의 왕이 되었던 자이다. 거기에 패왕성은 초기부터 수많은 전장을 헤쳐오면서 결속력을 다졌다. 오랫동안 평화를 유지해온 철혈방과는 달리 지금도 이권이 걸린 다툼을 간간이 해오고 있다.
남평의 한귀퉁이를 차지하고 여러 세력과 맞닿아있는 패왕성과는 달리 철혈방은 왕가를 제외하고는 세력으로 견줄 자가 없었다. 철극이 촉의 왕이 되지 못하면 철혈방은 내부로부터 붕괴할 것이다.
철극은 철혈방의 힘을 촉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릴 작정이다. 원래 이년정도 더 준비를 하려고 했지만 독고숭의 의문스러운 죽음은 철극의 결심을 앞당기게 하였다. 철혈기의 엄정한 기세에 아미파에 속한 다른 세력들도 복호사를 향해 움직였다.
아미파는 여덟개의 분파로 나뉜다. 이 여덟 분파는 승(僧), 악(岳), 두(杜), 조(趙), 홍(洪), 회(會), 자(字), 화(化)의 여덟으로 세력이 가장 강한 승의 대표가 바로 복호사이다. 즉 명경대사는 아미파의 장문인과 다름없는 존재이다.
여덟 세력 중 승문외에 홍문과 두문의 무공이 강하다. 자문과 화문은 머리를 쓰는 쪽이다. 이 여덟 세력은 아미파에 속하지만 무공은 서로 연관이 없다. 무공의 교류를 통해 장점을 받아들이고 단점을 버리지만 자신들의 무공특색은 고수해왔다.
여덟 세력이 다 모이자 아미파도 백오십명은 되었다. 승문과 홍문을 제외한 나머지 여섯 세력은 대부분 사람들이 밖을 나돌기 때문에 본산에 사람이 몇 없었다. 철혈방은 아미파의 사람들이 다 모이기를 기다렸다.
사람들이 다 모였다 싶었는지 철혈방의 수하 하나가 철극의 방문을 알렸다. 복호사는 산문을 활짝 열고 철혈방의 일행들을 안으로 들였다. 복호사의 어린 중들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자 철극은 속으로 탄복했다.
"하하, 이게 누구신가. 무극형제, 아니아니, 철극형제 아니신가. 어서 들어와 나랑 술 한잔 하시게나."
명경대사의 말에 아미파의 사람들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명경대사는 젊을 적에 술을 먹고 개를 삶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명경대사의 사부는 제자의 혜근이 깊다면서 한사코 비호했다. 그 덕에 명경대사는 쫓겨나지 않았다.
그러던 명경대사가 사부의 뒤를 이어 주지가 되자 사람이 바뀌었다. 술도 마시지 않고 고기도 입에 대지 않았다. 계율을 누구보다 엄격하게 지키니 사람들은 명경대사의 사부가 선견지명이 있다고 칭찬했다.
철극은 자신의 아픈 곳을 찌르는 명경대사가 증오스럽지만 내색을 하지 않았다. 철혈방을 사십년이상 운영해 오면서 겪은 풍랑이 적지 않다. 밖과 안의 적들과 칼과 혀로 싸우면서 어느정도 부동심을 연마해냈다.
"고승이 청하니 나같은 범부가 어찌 거절하겠소. 다만 오늘은 술을 마시러 온게 아니라 흉수를 찾아온 것이오."
명경대사가 눈을 껌뻑이자 주가 명경의 귀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술은 먹고 싶은데 다른 일이 있어 안 마신대요."
형주의 고함에 일동은 또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철극은 놀림거리가 되는 것 같은 느낌에 겉치레는 생략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본방의 좌호법 독고숭을 살해한 흉수를 복호파에서 숨기고 있소. 당장 그 흉수를 내 앞에 대령하시오."
"독고숭을 죽인 협객이 본파에 있대요. 얼굴을 구경하고 싶대요."
아미파의 몇몇은 땅에 쓰러져서 배를 그러안고 눈물을 흘렸다. 소월도 억지로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빨개졌다. 항응은 형주의 진지한 표정을 보며 일부러 철극을 놀리는 건지 아니면 진지한 건지 구분을 할 수 없었다.
"독고숭이 죽었소? 이런 재밌는 얘기는 술을 마시면서 해야 하는데."
명경의 말에 땅에 쓰러져있던 몇몇은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다. 그래도 직성이 안 풀리는지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흙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누운채 눈물과 콧물이 그렁그렁한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해괴했다.
"명경, 내 당신을 고승이라 여겨 여직껏 예로 상대하고 있소. 내가 칼을 뽑도록 핍박하지 마시오."
"주지스님이 술 얘기 계속 하면 칼 뽑는대요."
바닥에 쓰러져 있던 몇몇은 기력이 없는지 소리를 내지 못했다. 다만 간헐적으로 가슴이 크게 들썩거렸다. 웃고 싶은데 더 이상 웃을 힘이 없는 것이다. 철극은 사미승이 자신을 골리는 것 같아 화를 내고 싶으나 신분의 차이가 너무 나서 쉽게 화를 낼 수 없었다.
철혈기 삼백은 싸움을 앞두고 기세를 엄정하게 가다듬었다. 그리고 서서히 살기를 피워올리고 있는데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 살기가 가라앉았다. 엄정한 기세는 흐트러지지 않았지만 이대로 가면 기세가 한풀 꺽일 것이 명약관화이다.
철혈도 장웅은 머리가 좋은 자이다. 이대로 흘러가면 자신들에게 불리함을 인식한 장웅은 허리의 칼을 뽑아들었다. 도배(刀背 - 칼등)가 속가락 두개 두께가 되는 귀두도(鬼頭刀)가 장웅의 손에서 으스스한 빛을 뿜어냈다.
"복호사에 본방의 좌호법을 간악한 수단으로 잔혹하게 학살한 자가 숨어있소.무고한 자의 인명피해를 원하지 않으면 사내답게 앞으로 나서시오."
형주는 장웅의 말을 옮기지 않았다. 철극을 제외하면 명경대사와 대화할 자격이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몇몇은 형주가 입을 다물고 있자 얼굴에 실망한 기색을 띄었다. 바닥에 누워있던 자들도 얼굴을 닦고 일어섰다.
소월이 앞으로 한발 나서서 낭낭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독고숭은 토번 최고의 절기라는 혈접장을 익힌 고수인가요?"
장웅은 어린 아이가 나서자 대거리를 하기 싫었지만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자 억지로 입을 열었다.
"그렇소. 본파의 좌호법을 맡고 있소."
"제가 열흘인가 열하루인가 전에 말을 타고 달리는데 갑자기 혈접장을 익힌 어떤 사람이 나무뒤에서 매복해 있다가 암습을 하더라구요. 하도 은밀한 암습이라서 겨우 피했는데 옆구리에 스쳐 목숨이 위태로웠습니다."
"혹시 그 사람이 철혈방의 좌호법인 강호에 유명한 철혈독접 독고숭인가요?"
"본파의 좌호법이 그런 후안무치한 일을 할리가 없소.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함부로 모함하지 마시오."
항응은 소월을 뒤로 잡아끌고 앞으로 나섰다. 상대는 강호에서 인명을 해치며 살아가는 무인이다. 수가 틀리면 어떤 악독한 말로 소월에게 상처 입힐지 모른다. 강호는 입이 아니라 칼로 말하는 곳이다. 자신 때문에 저들이 찾아왔으니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가매를 암습한 자를 내가 단매에 쳐죽였소. 귀파의 귀한 호법인 줄 알았으면 손속에 사정을 두었을 터인데 그런 후안무치한 자가 철혈방같은 귀감이 되는 문파의 호법일 줄은 상상도 못했소. 상심이 크셨다면 내가 사죄하겠소."
항응의 인상착의를 보자 철방이 얘기했던 청성파가 찾은 방수가 생각났다. 아마 독고숭은 저자의 손에 명을 달리했을 수 있다. 독고숭이 죽은 현장의 흔적으로 봤을 때 독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저자의 가면을 보니 용독의 고수라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사람의 목숨은 당연히 목숨으로 갚아야 하오. 흑가면 당신은 철혈방의 분노를 피해갈 수 없을 것이오."
"나와 대화하는 당신은 사람을 죽인적이 한번도 없으시오? 그런 당신은 자신의 목숨으로 갚으셨소?"
"나한테 목숨빚을 가져갈 사람은 언제든 칼을 들고 찾아오기 바라오. 내 손안의 칼을 이겨내면 언제든 내 목숨을 취할 수 있소."
"독고숭을 일권에 죽일 수 있는 자도 언제든 나를 찾아오시오. 나를 이긴다면 언제든 목숨을 내놓겠소."
- 작가의말
원래 미인이 난세를 일으키거나 난세를 종결한다고 합니다. 난세를 일으킨 미인은 초선, 양귀비, 서시이고 난세를 끝낸 미인은 왕소군입니다. 서연이 맹창에게 시집가려 하자 난세가 시작되려는 걸 보니 소월이 몇년뒤면 대미인으로 성장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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