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대회
새벽이 밝자 항응과 지호는 복마동을 떠나 등봉현으로 향했다. 그 이유는 지호가 승복을 입은 항응에게 머리를 밀라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승복을 입고 머리를 기른 항응은 소림사내에서 바로 정체가 발각될 것이다.
지호는 소림사에 손님들이 많은 관계로 손님들이 떠난 후에 개혁을 시작하자고 말했다. 그래서 둘은 잠시 등봉현에 머물기로 했다. 삼년전 항응이 홀로 소림을 찾을 때 은자를 넉넉히 품에 넣고 출발했다. 등봉현에서 점심 한끼 먹은 후 은자를 한푼도 쓴적이 없으니 돈이 넉넉했다.
등봉현에는 비단옷을 파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항응은 회색으로 된 옷을 사입었다. 삼년사이 바뀐 건지 검은 옷보다 회색옷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신발도 두벌 사서 하나씩 신었다.
객잔에 자리를 잡고 두 사람은 음식도 방에서 시켜 먹었다. 항응은 그나마 괜찮지만 지호는 승복에 민머리로 누가봐도 소림사 중이라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지호는 승복이 아닌 다른 옷을 거부했다.
객잔에서 배불리 먹고 뜨거운 물에 목욕도 한 둘은 낮잠을 잤다. 둘은 한달씩 잠을 자지 않아도 끄떡 없지만 오랜만에 평평한 침상에 몸을 뉘이니 잠생각이 났던 것이다. 푹 한잠 자고 일어나니 저녁때가 되었다. 둘은 내공을 귀에 집중하고 객잔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주황실과 소림사가 연합으로 영웅대회를 열었다. 두번이나 자객들로 인해 피해를 본 시영은 무림문파들과의 연수를 염두에 두었다. 조광윤은 종남파의 속가제자들을 대거 영입했지만 황제의 안전을 맡길만한 무공고수는 없었다. 그래도 일부 제자들이 무장으로 성공하면서 주나라의 군사력이 하루가 다르게 강해졌다.
황제를 호위하려면 무공 실력과 충성심 둘다 중요하다. 필요할 때에 자신의 몸을 던져 황제 대신 죽을 수 있어야 한다. 시영 본인의 무력도 약하지 않기 때문에 예전에는 충성심만 보고 호위를 뽑았다. 하지만 만화궁의 호법들과 항응의 무위를 확인한 후 무공고수에 대한 필요성을 확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무림에서 명망이 가장 높은 소림과 연수해 영웅대회를 개최했다. 병장기를 사용하지 않는 비무를 통해 천하제일고수를 선정한다. 일등에게는 황금 백냥과 삼품에 해당하는 관직을 내리며 본인이 원할 경우에는 주나라에 임관할 수 있다.
영웅대회의 규칙은 아주 간단했다. 누구든 비무에서 세번 연속 이기면 통과이다. 통과한 자들은 소림에서 객방을 내준다. 한달의 기간동안 진행하며 초과(初過)를 통과한 자들은 본인이 원할 경우 천하의 수많은 영웅들 앞에서 비무를 통해 최강자를 가리는 것이다.
비무는 매일 오후 두시진씩 진행하고 소림의 나한들이 지켜보며 불상사를 막고 있다고 한다. 내일을 마지막으로 한달의 초과가 끝난다. 그러면 모레부터 일반인들은 소림으로 들어가 비무를 구경할 수 없다. 덕분에 내일 비무를 구경하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항응과 지호는 비무를 구경갈지 가지 말지를 상의했다. 항응은 가도 되고 안가도 되는 입장이었고 의외로 지호가 비무를 구경하고 싶어했다. 비무를 구경가기로 한 둘은 방에서 역용술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둘다 역용술을 잘 모르지만 마음만 먹으면 기가 움직이는 경지에 들어선 터라 몇번 연습하자 얼굴이 다른 사람처럼 바뀌었다. 하지만 얼굴이 너무 이상하게 변해서 마음에 드는 얼굴로 바꾸느라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다 객잔이 갑자기 조용해지자 연습을 멈추고 방에서 나갔다. 객잔의 일층에는 한 소녀와 몇명의 사내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소저, 혼자서 이렇게 큰 상을 쓰는것은 옳지 않은 일이오. 그래서 합석해도 되냐고 물었는데 다짜고짜 욕부터 하면 어찌하자는 것이오."
"형제, 빈상이 있는데 합석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오. 그리고 일행이 있다고 말했는데 거짓말 하지 말라며 윽박지르면 어찌하자는 것이오."
소녀의 목소리는 꾀꼬리처럼 영롱했다. 허리에 짧은 검을 패검한 것을 보니 무공을 익힌 무인 같았다. 여자치고는 키가 큰 편이었고 어깨가 넓고 허리가 잘룩해 무공을 익히기에 좋은 체형이다.
"소저 혼자서 일각동안 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다 확인했소. 일행이 있다면 어디에 있고 언제 오는 것이오? 그저 합석이 싫다고 했으면 순순히 물러났을 거지만 거짓으로 우롱(愚弄)하려 하니 화가 나서 따진 것이오."
"저는 분명히 합석하기 싫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쪽에서 자꾸 추근거리니 일행이 있다고 말했던 것 뿐이구요. 싫다고 했을 때 순순히 물러나시지 자꾸 억지를 부리면 저도 화가 납니다."
사내는 궁지에 몰리자 화를 냈다.
"처음부터 합석하겠다고 했으면 아무일도 없었을 것 아니오. 왜 일을 이리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오."
소녀의 꾀꼬리 같던 목소리에 서리가 끼었다.
"너는 처음부터 태어나지 않았으면 아무일도 없었을 턴데 왜 일을 이리 귀찮게 만드는 것이냐. 소림의 근처라고 내가 너를 죽이지 못할 것 같으냐."
소녀의 말이 떨어지자 네명의 사내는 무기를 꺼내들었다. 소녀는 넷이 손에 무기를 쥐기 무섭게 검을 뽑아 빠르게 찔러나갔다. 소녀의 검이 다시 검집으로 돌아갔을 때 네 사내는 오른쪽 어깨를 검에 찔려 전부 무기를 바닥에 떨구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큰 창피를 당한 넷은 무기를 주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채 도망갔다. 넷이 도망가자 구경꾼들은 갈채를 올렸다. 등봉현을 찾은 손님들은 소림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시비를 일으키지 않는다. 저 넷은 딱봐도 강호의 물정을 모르는 풋내기들이다.
구경이 끝나자 항응과 지호는 방으로 돌아왔다. 지호는 소녀의 검술을 칭찬했다.
"나아감과 멈춤에 법도가 있고 출검부터 납검까지 한호흡에 끝냈소. 어느 문파의 절기인지 참 궁금하구려."
"보타문에 속한 관음원의 자죽검입니다. 몇년전에 한번 견식한 적이 있지요. 아마 보타문을 대표하여 강호로 나온 여협 같습니다."
"관음원이라면 여승들만 있는 곳 아니오. 아까 그 여협은 머리를 길게 길렀던데 혹시 항시주가 잘못 본 것이 아니오?"
"문외제자일 수도 있죠. 누구처럼 중이 안되면 무공을 안 가르쳐준다 이러지 않으니까요."
항응은 삼년전 금강부동신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자신에게 중이 되라고 강요하던 일이 생각났다. 지호도 그때의 일이 생각나서 크게 웃었다.
"내가 듣기에는 남한에서는 거세를 하지 않으면 임관을 시켜주지 않는다고 하더군. 소림은 그래도 일말의 가능성을 남겼으니 관대하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오."
둘은 저녁을 시켜먹은 후 마음에 드는 얼굴을 골랐고 그 얼굴을 유지하는 연습을 했다. 이튿날 날이 밝자 소림사로 향했다. 소림사로 가는 도중 둘은 문제점을 발견했다. 현재 지호가 입고 있는 것은 소림의 승복이다. 그런데 소림의 승복을 입고 소림에 손님으로 찾아가면 의심받을 것이 분명했다.
사실 객잔에서도 지호를 보는 눈초리가 이상했지만 속세의 친척이 찾아와서 회포를 푸는 것이라 둘러댔다. 소림의 객방이 꽉 차서 그럴법도 하다고 객잔에서는 이해했지만 소림에서는 어떻게 둘러댈 거리가 없다.
하는 수 없이 둘은 산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월담했다. 저녁내내 연습했던 역용술은 아무 쓸모도 없었다. 지호는 거짓으로 사람을 속이지 말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며 이후 역용술을 사용하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항응이 보기에는 그저 자신들의 생각이 부족했던 것이지만 말이다.
비무장에는 비무를 구경하는 소림 제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지호도 크게 눈에 띄지 않고 비무를 구경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비무를 구경하면서 항응은 자신의 경지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함을 느꼈다. 비무하는 두 사람의 초식과 운기경로가 일목요연하게 보였다.
그때 얼굴이 중원인들과 확연하게 다른 구레나룻의 사내 하나가 비무장에 들어섰다. 비무를 하기 전에 자신의 출신과 비무에 사용할 무공명을 소개해야 한다.
"토번에서 온 구마자라 하오. 무공은 대법인(大法印)이오."
대법인은 중원에서 대수인이라 부르는 토번 최고의 무학이다. 무공이라 부르지 않고 무학이라 부르는 이유는 토번과 그 주변국가들의 대부분 무공이 대수인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대수인은 익히기 극히 힘든 무공으로 밀종에서는 익히기 쉽게 소수인을 비롯한 수많은 아류 무공들을 창안했다.
구마자의 비무상대는 곧바로 기권을 선언하고 항복했다. 그리고 누구도 비무대에 오르려 하지 않자 구마자는 큰 소리로 도발했다.
"중원에 영웅호걸이 하늘의 별보다 더 많다고 하던데 어찌 이 구마자와 손속을 겨룰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이오. 손속에 사정을 둘 것이니 아무나 나와 주시오."
거듭된 도발에도 나서는 자가 없자 구마자는 세번 이긴것으로 처리했다. 나한승이 초과를 통과했음을 선포하자 구마자는 크게 소리를 내어 웃고는 비무장을 떠났다. 곧 동자승이 구마자를 객방으로 안내했다.
지호는 구마자를 바라보며 항응에게 질문했다.
"저자의 무공을 어떻게 보시오?"
항응은 고민도 없이 답했다.
"지금 저 교만한 상태라면 일합에 쓰러뜨릴 수 있습니다. 정상적으로 실력을 겨루면 일합에 항복을 받아낼 수 있습니다."
같은 말인 듯 하지만 다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지금 구마자의 상태로는 힘을 충분히 써서 스러뜨려야 마음속으로 감복할 것이다. 하지만 겸손한 상태라면 힘을 줄여서 한수만 보여줘도 알아서 항복할 것이다.
"항시주도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저자의 대수인은 정도를 걷지 않았소. 운기경로가 반드시 거쳐야 할 몇개 혈도를 거치지 않고 이상한 곳으로 흐르고 있소. 대수인이 허접한 무공은 아닐테니 저자가 방문좌도를 걷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소."
"순환이 고르지 않고 균형이 깨졌더군요. 저 상태로는 하수들을 쉽게 상대할 수 있지만 고수를 만나면 쉽게 허점을 드러내죠. 그것도 모르고 저렇게 교만한 상태인 것을 보면 대수인을 익힌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구마자는 무공을 사용하지도 않았지만 항응과 지호는 이미 운기경로까지 확인했다. 제삼자가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면 허풍쟁이로 생각했을 것이다. 구마자가 찬물을 끼얹은 바람에 비무는 흐지부지하게 끝났다. 남은 자들은 대수인을 상대로 우승을 못할 바에는 차라리 체면을 구기지 말자고 생각해서 비무에 나서지 않은 것이다.
객잔으로 돌아간 항응과 지호는 푹 잤다. 아침에 일찍 깨어난 후 소림으로 향했다. 중원의 각문각파에서 온 자들이 소림에서 보내준 영웅첩을 들고 소림을 찾았다. 항응과 지호는 다시 한번 월담을 했다. 항응은 찾아온 손님들 무리에 섞였고 지호는 학승들 틈으로 파고 들었다.
- 작가의말
사실 유계흥이 이름을 유창으로 바꾸고 왕이 된 것은 썩 후의 일입니다. 하지만 소설의 진행을 위해 앞당겼습니다. 남한의 왕 유창은 실제로 거세를 한 자들만 관직을 주었습니다. 앞의 작가의말에도 언급한 적이 있는데 잘린 물건이 오백개나 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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