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탈출
항응은 지호의 머리와 수염이 수북한 것을 확인하고 질문했다.
"지호스님, 머리와 수염은 어찌된 것입니까. 팔 치료하며 부작용이 발생한 것인가요?"
지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주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썪는 줄 몰랐구만. 항시주가 좌선에 들고나서 이년정도 흘렀소."
항응은 지호의 말에 깜짝 놀랐지만 이내 이해가 되었다. 자신은 대단한 경지를 이루었고 자연적으로는 수십년이 지나도 다 채우지 못할 것 같았던 단전을 꽉 채웠다. 원공검법과 같은 대단한 무공도 다른 무공들과 융합했다. 오히려 이년밖에 안 지난게 의외다.
항응은 머리와 수염을 기른 지호가 어색했다. 지금의 자신이라면 칼이 없어도 머리와 수염을 깨끗이 잘라줄 수 있다.
"지호스님, 밀어드릴까요?"
지호는 자신의 머리와 수염을 만지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오. 영생결의 수련이 끝나지 않아 밀어봤자 또 빠르게 자랄 것이오. 영생결을 완성하는 날 머리와 수염을 밀겠소."
항응은 밖으로 빨리 나가고 싶었다. 밖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의 경지라면 지호를 몸에 매달고서라도 공동을 탈출할 수 있다. 항응이 밖으로의 탈출을 제의하자 지호는 반대했다.
"항시주의 마음을 모르지 않지만 우린 시간이 좀 더 필요하오. 항시주는 자신의 무공과 경지를 더 정확히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소. 자신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알아야 후회를 남기지 않을 수 있소."
지호 본인도 영생결을 마무리 할 시간이 조금 필요하다. 항응은 지호의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본질을 알아야 그 쓰임새를 다할 수 있다. 분명 아는 것인데도 옆에서 지호가 깨우쳐주고 나서야 깨닫는다.
항응은 사고의 제한을 풀어버렸다. 물론 그전에 지호의 승복을 빌려 하체를 가렸다. 지호의 승복도 해질대로 해져서 하체만 가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항응은 굳이 자신이 뭘 할수 있는지 고민하지 않았다. 그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했다.
항응은 가고싶은 곳에 한호흡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동이라기보다는 그저 원래 자리에서 사라지고 새로운 곳에 나타났다고 해야 한다. 그 원리에 대해서 항응은 고민하지 않았다. 어차피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다. 감각와 인지의 범주이다.
지호가 휴식할 때면 둘은 대화를 나눴다. 같은 사물을 봐도 항상 다르게 생각하는 둘이라 서로에게 유익한 대화였다. 항응은 모든 일에 정답을 구해야 할 필요가 없음을 안다. 그리고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문제들도 많다. 그저 대화를 통해 자신의 사고의 폭을 넓히고 유연성을 기르면 된다.
지호가 영생결을 수련할 때면 항응은 방해하지 않기 위해 돌멩이를 허공에 띄우고 춤을 추게 했다. 땅에 떨어지면 소리가 나서 지호에게 방해될 수도 있기 때문에 돌멩이의 제어에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놀이로 시작한 일이 의외로 수련에 많은 도움이 되자 항응은 돌멩이의 숫자를 차차 늘여나갔다.
항응이 여든한번째 돌멩이를 들어올려서 수련하고 있는데 갑자기 지호의 함성이 들려왔다. 항응이 급히 달려가보니 지호가 자신의 손으로 머리와 수염을 밀고 있었다. 영생결을 끝내 완성한 것이다.
"이제 겨우 소성을 이루었네. 대성은 평생 이루지 못할 듯 하네. 내 수명이 아직 백년 하고도 이년 더 남았는데 그 시간안에 완성할 것 같지 못하다네. 아무래도 이 영생결이라는 것은 인간의 수련을 위한 책이 아닌 것 같네."
"지호스님, 위험한 책이니 없애버리지요."
"아직 책에 인연의 향이 남아있네. 이 책을 여기에 숨겨두는 것이 어떨까 생각하네."
지호는 영생결을 공동속에 은밀히 숨겼다. 공동을 탈출할 생각에 지호도 약간은 들떠있었다. 항응은 그런 지호에게 제의했다.
"지호스님, 우리 여기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글을 남기지요. 이 공동안에서 작지 않은 걸 얻었는데 그 보답이라도 해야죠."
지호는 잠깐 생각에 잠겨있다가 손가락으로 평평한 바위에 글을 남겼다.
少林微僧略窺佛心(소림미승약규불심), 소림의 보잘것 없는 중이 부처님의 마음을 대충 들여다 보다.
항응도 바로 옆에 손가락으로 글을 남겼다.
絶世神鷹偶得羽翼(절세신응우득우익), 절세신응이 우연히 날개를 얻다.
지호는 소림미승이라 자신을 낮췄으나 부처님의 마음을 들여다 보았다고 자신의 경지를 자랑했다. 항응은 절세신응이라 자신을 치켜세웠으나 우연히 날개를 얻었다고 자신의 경지를 겸손하게 표현했다. 짧은 글에서도 두 사람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났다.
"항시주, 올라가기전에 부탁 하나 드리겠소. 염치 없지만 나를 도와 소림을 바꿔주시오."
현재 소림사는 달마원, 반야당(般若堂), 나한당, 계율당, 지객당 이렇게 다섯개 조직으로 나뉜다. 지객당은 말 그대로 찾아오는 손님들을 접대한다. 계율당은 계율을 범한 제자들에게 벌을 내리고 강호에서 중죄를 저지른 제자들을 추격하여 나포한다.
나한당은 제자들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곳이고 달마원은 소림의 무공을 연구하는 곳이다. 지객당이나 계율당은 일부 제자들의 희생으로 대부분의 제자들이 사소한 일에 신경쓰지 않고 공부에 몰두할 수 있게 한다. 나한당이나 달마원 역시 소림에는 필요한 조직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반야당이다. 반야당은 소림이 아닌 천하 다른 문파들의 무공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곳이다. 소림제자들은 강호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 자신이 보고 들은 모든 무공과 초식을 반야당에 보고해야 한다. 그런 정보들을 모아 소림은 다른 문파들의 무공을 연구하여 파해법을 찾고 소림무공을 살찌우는데 사용했다.
"반야당을 통해 외부에서 들어온 무공들 때문에 소림무공들의 불심이 점점 사라지고 있소. 예전에 불심이 없는 자는 소림무공을 깨우치지 못했건만 지금은 위력만 중시하고 무공을 통해 불심을 단련한다는 의미가 점점 희석되고 있소."
"나는 이곳이 소림사인지 소림파인지 분간이 가지 않소. 무승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깨달은 학승들보다 훨씬 더 높은 대우를 받소. 물론 출가인이 대우를 따지는 건 경우가 아니지만 학승들에 대한 지원이 부족해서 점점 학승이 줄어드는 추세요."
지호는 평소와는 달리 진지하고 엄숙했다. 물론 눈과 귀를 닫고 자신의 수양에만 힘을 써도 된다. 그러면 지호 본인은 부처님에게 더 빠르게 그리고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자신만을 위한 것이고 부처님의 뜻을 제대로 받든 것이 아니다.
지호는 영생결의 소성이 가까워지자 나간후에 어떻게 해야 할지 많이 고민했다. 그러다 현재의 소림을 바꿔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젯밤에 혜능스님이 꿈에 나타나 웃어주었다. 오늘 영생결의 소성을 이루었으니 자신의 생각이 부처님의 뜻에 부합된다는 의미이다.
"지호스님은 제게 사부나 다름 없습니다.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그리고 굉후 그자는 꼭 저에게 넘겨주십시오. 부처님은 손속이 자비로우셔서 제대로 벌을 줄 것 같지가 않습니다."
둘은 강호제일세력인 소림사를 바꿀 웅대한 계획을 품고 공동에서 탈출했다. 동굴을 막은 바위들은 둘에게 장애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복마동 밖으로 나온 둘은 급격히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지호는 스님으로서 절대 도둑질은 안된다고 버텼다. 그렇다고 항응에게 옷을 도둑질해라고 말하지 못했다. 도둑질을 하는 것이나 도둑질을 사주하는 것이나 똑같은 죄이기 때문이다. 항응이 어디에 가면 옷을 구할 수 있냐고 물었지만 지호는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못했다. 알려주면 자신도 공범이 되기 때문이다.
어쩔수 없이 소림개혁의 웅심을 잠시 접고 복마동안에서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밖을 내다보니 소림에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었다. 지호는 이상하다는 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지금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농망기라서 향화객이 거의 없을 시기인데 참 이상하구나. 삼년사이에 도대체 무슨 변화가 있었던 거지?"
항응은 삼년이라는 말을 듣자 갑자기 얼굴 표정이 우울해졌다. 공동속에서 가면을 쓰지 않고 생활하는 습관을 길러 이제는 가면이 없어도 어색하지 않았다.
"항시주, 왜 갑자기 우울해 지신 것이오?"
"지호스님, 제가 이제 스물입니다. 십대와 이십대의 느낌은 확 다르죠. 공동에 떨어져서 상처를 치료하고 체력을 단련하고 잠깐 좌선을 했더니 나이가 확 꺾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이제 서른이오. 이립이 되었으니 소림을 위해 무언가 하라는 부처님의 뜻이 틀림없소."
"지호스님, 제가 어찌보면 소림에서 삼년이나 있은 것인데 소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네요. 소림의 건물들 좀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저기 갈색기와의 주변과 조금 떨어진 건물이 보이시오. 저기가 바로 우리가 처음 봤던 방장이 사무를 보는 건물이오. 방장실에서 동쪽으로 이백보 걷고 북쪽으로 백보 걸으면 승복을 나눠주는 곳이오."
"저기 보이는 마당이 널찍한 곳이 바로 나한당이 제자들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건물이오. 저 건물에서 서쪽으로 삼백보 걷고 남쪽으로 오십보 걸으면 승복을 나눠주는 곳이오."
"저쪽 귀퉁이에 오래된 건물이 달마원이오. 달마조사의 면벽동과 아주 가까이 있소. 달마원에서 남쪽으로 천보정도 걷고 다시 동으로 삼백보정도 걸으면 승복을 나눠주는 곳이오."
지호는 소림의 주요 건물들을 항응에게 일일이 소개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보니 밤이 깊어왔다. 지호는 좌선에 들었고 항응은 깊은 밤이 되기를 기다려 승복 두벌을 빌려왔다. 항응이 돌아오자 지호는 좌선에서 깨고 승복을 두손으로 받든 후 부처님이 내려주신 선물에 감사를 드렸다.
- 작가의말
"지호스님, 밀어드릴까요?"
지호는 불쾌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직은 아니오. 내 등은 아직 깨끗하오.”
생각해보니 전작의 당문호의 필살기가 토네이도이고 이번 글의 항응의 필살기는 어스퀘이크네요. 다음 주인공인 천마의 필살기는 메테오로 정했니다. 천살성을 타고 나서 작은 별들이 천마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한다는 설정입니다. 무협에 환상(판타지)을 심고 거기에 개연성까지 걱정하는 이 세심함, 본인도 감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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