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도단지
왠지 가라앉은 항응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소월은 부단히 노력했다. 영문은 모르지만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것 같았다. 소월이 정성들여 해준 맛있는 음식에 항응의 기분이 많이 풀렸다.
무릉도원은 폐쇄적인 곳이라 기술의 발전이 더딜것 같았지만 의외로 요리는 매우 발달해 있었다. 먹는 것 빼고는 별로 즐길 거리가 없었던 탓이다. 통제된 일상에서 음식은 많지 않은 즐거움중 하나이다. 그래서 무릉도원의 요리는 매우 맛있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은 항응은 오운답설의 이름을 줄여서 오답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뒤로 기분이 완전히 풀린 항응은 소월에게 월녀검을 가르쳤다. 소월은 경공에는 재능을 보였지만 검법은 진전이 느렸다. 항응은 인내심을 가지고 차근차근 가르쳤다.
구결을 몇번 읽어보고 명상 한두번 하면 기본적인 것은 다 이해되는 항응으로서는 소월의 늦은 진도가 답답하기만 했다. 모든 걸 독학으로 하면서 다른 사람과의 교류가 거의 없다시피한 항응이기에 자신의 뛰어남을 모르고 있었다.
검을 수련하다 지친 소월이 잠에 들자 항응은 선기불신으로 내공을 모았다. 구보를 단전으로 삼았을 때는 구보의 기운이 약하고 선기불신을 단전 주변에만 시전해 내공이 모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강한 내단을 보유하고 전신으로 선기불신을 사용하니 단전 주변으로 내공이 모이기 시작했다. 강한 내단의 흡입력에 의해 내공이 모이는 속도가 무척이나 빨랐다. 단전에 모인 자신의 내공을 확인한 항응은 내공심법을 하나도 읽어두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내공을 수련하는 내공심법은 단전의 내공을 움직여 여러 혈도를 거치면서 내공을 불려나간다. 동시에 내공의 기운을 정순하게 만든다. 심법에 따라 그 특성이 갈리는데 정공이라 불리는 심법은 기운을 정제하는데 더 주의를 기울인다. 반대로 마공이라 불리는 심법들은 기운을 불리는데만 집중해서 내공이 정순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궁여지책으로 항응은 맹룡도와 선기불신을 동시에 시전했다. 맹룡도에는 수백가지의 운기법이 있다. 항응은 맹룡도의 운기법으로 단전의 내공을 밖으로 내보내는 동시에 선기불신으로 그 기운을 회수했다.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일이라 수십개의 운기법을 사용하고 나자 피로가 몰려왔다. 모닥불에 나무를 던져넣은 후 피풍의를 꼼꼼히 여미고 잠을 청했다. 새벽에 묵구가 나뭇가지를 넣어줘서 중도에 깨지 않고 통잠을 잘 수 있었다.
날이 밝자 아침을 간단히 먹고 출발했다. 오운답설과 적구의 기세싸움은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항응과 소월이 올라타자 둘은 순식간에 속도를 올려 서로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다행히 이른 아침이라 관도에 사람이 없어서 사고가 나지는 않았다.
항응은 산길이 나오자 말들을 제지시켰다. 두 말은 서로에게 뒤쳐지려 하지 않고 앞서려 했다. 결국에는 둘 때문에 항응과 소월은 말을 타고 나란히 걷게 되었다. 둘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따스한 햇살을 즐겼다.
그런 둘을 멈춘 것은 길 한복판에 가로로 쓰러진 통나무였다. 통나무 밑둥을 보니 도끼로 찍은 자국이 한두개가 아니었다. 인위적인 냄새를 풀풀 풍기는 상황에 항응은 코웃음을 쳤다.
두 사람이 말을 멈추자 일곱명의 장정이 둘앞에 나타났다. 그중 둘은 칼을 들었고 나머지 다섯은 몽둥이나 조잡한 창을 들고 있었다. 딱 봐도 어중이떠중이 느낌이 확 났다.
"가진 재물의 반만 내놓아라. 그러면 우리가 통나무도 치워주고 곱게 보내주겠다."
항응은 피식 웃고는 휘파람을 불었다. 약간 올빼미소리를 닮았지만 올빼미소리보다 훨씬 날카로웠다. 얼마 안 지나 앉은키가 소월보다 더 큰 묵구가 혀를 빼물고 달려왔다. 묵구의 덩치에 놀란 일곱은 뒤로 세걸음이나 물러섰다.
일곱으로부터 적대적인 기운을 읽은 묵구는 이를 드러내고 상대를 위협했다. 묵구의 위협과 날카로운 송곳니에 일곱의 기세가 한풀 더 꺾였다. 칼을 든 두명 중 덩치가 더 큰 자가 앞으로 나섰다.
"우리는 종남파의 제자들이다. 저따위 덩치만 큰 개는 칼 한번 휘두르면 목숨이 날아나니 잘 생각하고 결정해라."
하지만 덩치의 떨리는 목소리가 그를 배신했다. 항응은 이야기로만 들었던 일을 처음 겪으니 호기심에 지켜봤지만 곧바로 흥미를 잃었다. 이야기꾼의 이야기에서처럼 흥미진진하고 긴박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적구의 등위에서 신형을 날린 항응은 길을 가로막은 통나무를 주먹으로 가격했다. 항응의 쇄산수(碎山手)에 정통으로 맞은 통나무는 수백개의 조각으로 나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항응이 몸을 돌리자 일곱 산적은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머리를 땅에 박고 오돌오돌 떠는 모습에 사연을 모르는 사람이면 동전 몇닢 던져줬을 것이다.
불화검을 사용하면 통나무를 깔끔하게 두개로 자를 수 있다. 벽산권(闢山拳)을 사용하면 통나무를 부수지 않고 통째로 날려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항응이 굳이 둘보다 수준이 낮은 쇄산수를 사용한 것은 무공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이것이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땅에 떨어진 칼 중에서 더 예리한 칼을 주어든 항응은 산적들에게 고개를 들고 두손을 높이 들라 명했다. 산적들은 우물쭈물 하면서도 고개를 들고 두손을 번쩍 쳐들었다.
항응의 칼이 아름다운 호선을 그었다. 항응이 칼을 버림과 동시에 여섯명의 산적이 왼손을 부둥켜 안고 땅을 뒹굴었다. 한번의 칼질로 여섯의 왼손 새끼손가락을 잘라버린 것이다. 홀로 손가락을 잘리지 않은 산적은 다시 머리를 땅에 박았다.
몸을 낮춘 항응은 작은 소리로 산적에게 속삭였다.
"지난번에 네 손가락을 자른 자가 너에게 한번 더 걸리면 목숨이 위험할 것이라 경고 했을 거야. 하지만 넌 그 경고를 무시했을 것이고 그래서 너는 죽게 되는거야. 왜 죽었는지 모르는 억울한 귀신이 되지 말라고 친절히 가르쳐주는 것이다."
항응은 산적의 뒤통수에 있는 사혈에 내공을 주입했다. 산적은 경련도 없이 그대로 몸이 무너졌다. 아무런 외상도 없어 겉보기에는 편안히 죽은 호상(好喪)으로 보였다. 몸을 일으킨 항응은 목소리를 높여 남은 여섯에게 경고했다.
"다음번에 또 나쁜짓을 하다 걸리면 목숨을 잃을 것이다. 지금 죽어버린 이놈처럼 말이다. 나는 자비로워 시신을 그대로 남겼지만 성격 나쁜 놈을 만나면 팔다리 하나를 못 찾을 수도 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착하고 성실하게 살거라."
몸을 뒤로 훌쩍 날린 항응은 적구의 등위에 올라탔다. 적구와 오운답설의 뒤를 따르는 묵구가 여섯 산적의 앞을 지날 때 혀로 입가를 핥았다. 묵구는 아무 생각 없는 습관적인 동작이지만 지켜보던 산적들은 바지에 오줌을 지렸다.
여섯의 손가락을 자르고 하나의 목숨을 취했다. 항응과 소월의 분위기는 살인 때문에 다소 무거워졌다. 항응이 직접 손을 써서 사람을 죽인 것은 처음이다. 무릉도원에서 장주 일족의 죽음에 간접적인 책임이 있지만 이번과 비교할 수가 없다.
침묵을 지키던 항응은 입을 열어 소월에게 상황을 설명해줬다. 강호에는 불문율들이 있다. 생사투가 아닌 이상 남자의 고환을 공격하지 않고 여자의 가슴을 공격하지 않는다. 강호에서 악행을 저지르는 자를 만나면 제압한 후 왼손 새끼손가락을 자른다.
이미 왼손 새끼손가락이 없는 자는 최소 두번째 악행이기 때문에 목숨을 취하는 것이다. 예외적으로 여자를 강제로 범하는 음적(淫賊)이나 말을 타고 약탈을 행하는 마적(馬賊)은 잡은 즉시 죽인다.
지역에 따라서는 간통한 남녀를 묶어놓고 돌을 던져 죽이는 곳도 있다. 그리고 살인죄를 저지른 자 역시 재판을 거치지 않고 즉참할 수 있다. 항응은 이러한 불문율에 따라 여섯의 손가락을 자르고 한명의 목숨을 취한 것이다.
항응의 이야기를 들은 소월은 강호가 자신이 상상하던 그런 강호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이미 강호에 두발 다 담그고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항응과 함께한 짧은 시간은 신나는 일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강호의 비정한 얼굴도 마주할 준비를 해야 한다.
"의형, 그럼 의형의 별호는 뭐예요? 강호의 협객들을 보면 다 멋있는 별호가 하나씩 있더라구요."
"내가 그 생각을 못했구나. 너도 별호 하나가 필요하겠다. 강호를 주유하는데 상대방에게 말할 별호 하나 없으면 창피한 일이야."
"저는 소검(素劍)으로 할게요. 예전부터 생각하던 거였어요. 기회가 되면 의형이 제 검을 흰색으로 바꿔주세요."
검신의 색이 흰색인 검은 만련한철로 만든 검밖에 없다. 한철로 검신을 제작한 후에 매일 만번 이상 망치로 두드린다. 그렇게 한철속의 잡질을 제거하면 검신이 흰색이 된다. 매일 망치로 만번 이상 두드리는 과정에 대부분이 깨져서 아주 귀한 검이다. 황제나 왕 정도는 되어야 겨우 구할 수 있다.
"의매, 내가 자신 없어서 그러는 건 아니고, 보통 별호는 다른 사람이 지어주는 거야. 의매가 내 별호를 지어주었으면 좋겠어."
잠시 고민하던 소월이 입을 열었다. 눈동자가 돌아가는 모습이 뭔가 꿍꿍이가 보였다.
"흑살천랑과 적전추풍의 주인이라는 의미에서 흑적지주(黑赤之主)가 어때요?"
항응은 소월의 집요함에 한숨을 쉬었다. 두 이름이 끌리지 않는 건 아니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항응은 진지한 어조로 대답했다.
"소검 소협, 별호는 장난이 아니오. 조금 진지해 주기 바라겠소."
소월은 미리 생각해 둔게 있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그럼 장난은 그만 치도록 하겠소. 절세신응이 어떠시오? 소협의 마음에 드시오?"
항응은 가면속의 두눈이 가늘어졌다. 소월은 항응의 눈을 보고 웃고 있음을 알아챘다.
"절세신응 소협, 이 소검의 인사를 받으시오."
항응은 곧바로 정색을 하며 말을 받았다.
"소월아,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닌데 너무 부끄러운 별호라서 우리 둘만 알고 있자."
소월과 이런저런 장난을 치면서 살인에 대한 충격이 많이 가셔졌다. 다시 밝은 분위기로 돌아온 항응을 보며 소월도 마음이 놓였다. 다음에 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자신이 항응을 대신해 응징할 생각이다. 그러니 무공을 좀 더 열심히 수련할 필요가 있다.
저녁이 가까워 질 때 즈음 해서 둘은 종남파를 방문할 수 있었다. 종남파는 정식제자가 스무명 정도밖에 안되는 소문파이다. 대신 속가제자가 수백이나 된다. 방문을 알리는 항응에게 종남의 제자가 어디에서 온 누구냐고 질문했다.
"개주에서 온 절세신응이라 전해주시오."
- 작가의말
揮刀斷指, 칼을 휘둘러 손가락을 자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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