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원하는 악마들
나를 원하는 악마들
바알의 성에서 가장 자랑하는 특급 룸.
크로포드는 무엇이 신이 나는지 계속 주절댔다.
"이제 지옥에서 활동하는 데는 문제가 없겠군."
"문제없을 뿐입니까? 지옥의 장군은 지옥의 군단을 거느릴 수 있는 엄청난 계급이죠."
"군단? 난 군단이 없는데?"
크로포드는 의미심장한 눈웃음을 지었다.
"군단을 만드는 것은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여러 고리를 돌며 쓸만한 놈을 뽑아다 쓰는 건데 자체적인 군단을 조직 하는 방법입니다. 두 번째는 각 교단에 군단 요청을 하면 낙인의 힘으로 교단 악마를 모집할 수 있습죠."
"그렇군. 시간상 두 번째가 적절할 것 같네. 갑자기 나에 대한 분위기가 왜 이렇게 바뀐 거지?"
"루시퍼 님의 발언이 가장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전 회의가 열린 것은 무려 3년 정도 만에 처음입니다."
'여기서 3년 정도면 우리 쪽은 삼백 년 정도다. 아마 서전 임펙트 때 어전 회의가 열린 모양이군.'
이번 어전 회의는 예상하건대 현 태초의 차원 지구에 대한 문제일 거다.
"지구를 지키기 위해 칠죄종이 나에게 바라는 것이 많은 모양이군."
"주인님은 칠죄종 중 다섯 분의 낙인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건 게헤나 통틀어 두 번째의 일입니다."
"첫 번째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였다고 했다. 그놈은 몇 개를 받았지?"
"여섯 개입니다."
"칠죄종 중 한 명이?"
"그분은 좀 괴팍한 분이라···."
"누구데?"
"공포의 군주. 디아볼로스 님입니다."
"공포의 교단이네. 하긴 공포의 교단은 모습을 보인 적이 없긴 하네."
"게헤나가 습격받거나 칠죄종 중 어느 한 분이 소멸하여야 등장한다는 전설이 있어서. 과거 선악의 전쟁 때 모습을 보인 후 그 이후는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습죠."
"그건 그렇고 악마 둘 찾아야 하는데, 네포라이어스와 놉시라는 녀석들 알아?"
"이름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역시 악마 찾는 데는 위스퍼모어가 확실하죠."
"녀석은 뭐해?"
"얼마 전까지 파리 교단에 있었습니다. 교단 갈아타서 어디 쏘다니기 애매한 상황입죠."
"개구리 넌 괜찮고?"
"저야 아라곤 님의 사역마 아닙니까? 지금 어느 곳을 가던 환영입죠."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아라곤 님 아보림입니다."
"들어와."
족제비 아보림이 문을 열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과거와는 전혀 다른 행동. 게헤나에서는 계급이 모든 것을 대변한다.
"무슨 일인데?'
"사절이 한 분 뵙기를 청합니다."
"사절? 어디 사절인데?"
"죽음의 교단에서 보낸 사절입니다."
"죽음의 교단!"
게헤나에 와서 처음 등장하는 교단이다. 지금까지 어느 편 중에서도 속하지 않고 나와 직접적인 충돌 한번 없었던 교단이다.
파리, 피, 지혜, 죄, 타락 이번엔 죽음의 교단까지 총 여섯의 교단이 나와 연관이 되는 순간이다.
조금 황당하면서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칠죄종이 전부 나를 찾을 줄이야.
"주인님 만나서 손해 보는 일은 없을 듯합니다."
"만나 보도록 하지."
까마귀머리를 한 악마다. 특히 두 눈깔이 시뻘건 것이 오싹한 기분이 드는 악마였다.
대대로 까마귀는 죽은 인간을 영도하는 생물이라 하더니 이 까마귀에게서도 죽음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저희 주인님이 아라곤 님을 청하셨습니다."
"위리놈이?"
까마귀는 잠시 움찔했다가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렇습니다. 위리놈 님이 직접 청하셨습니다."
잠시 고민했다.
여기 온 목적은 두 마리 악마를 찾기 위해서다. 물론 금방 찾을 수 있는 놈들이고 어디 숨거나 도망가는 녀석도 아니다.
일에도 순서가 있는 법이다. 교단 수장이 직접 청한 일이다.
"수장이 직접 청한 일인데 다른 일 제쳐 두고서라도 만나 봬야지."
까마귀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고 닫혔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를 따라오시겠습니까?"
"물론."
전령으로 왔으니 되돌아가는 방법도 확실하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눈앞에 게이트를 만들어 냈다.
까마귀는 손짓으로 게이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먼저 앞장서겠습니다."
"개구리 넌 아까 내가 이야기한 악마 두 마리 어디에 있는지 알아 놔. 네 힘으로 안 되면 인맥 동원하든지 해."
"알겠습니다. 주인님. 걱정하지 마시고 다녀오세요."
헬 오어로 만든 거대성이다. 성은 매우 높고 웅대했다. 헬오어 특성이 먹빛이라 성 자체도 거무칙칙해 웅장미가 더 했다.
하늘 위로는 수만 마리의 까마귀 떼가 괴성을 토하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죽음의 성.
까마귀의 안내에 따라 접견실로 들어갔다.
위리놈. 죽음의 왕, 원래 파리 교단의 최고 훈장 수훈장을 받은 악마였다. 위리놈의 모습은 죽음의 왕답게 무시무시하다. 온통 검은색인 그의 몸은 헬하운드가 이빨로 물어뜯은 상처투성이며, 깊게 팬 상처는 여우의 가죽으로 꿰매 있다.
그는 구울로도 변신할 수 있고 실제 모습도 구울과 비슷하다. 인간의 생살과 피를 즐기고 그의 식탁엔 언제나 인육이 오르고 한 끼 때마다 뼈만 남기고 다 먹어 치운다.
이런 악마들이 버글버글한 곳이 게헤나다. 그는 칠죄종 중 가장 막내다. 파리 교단 소속이었다가 탈퇴하여 칠죄종이 된 이후 자신만의 교단인 죽음의 교단을 창시한 악마다.
칠죄종이라고 해서 천년만년 그 지위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그 자리는 언제나 위협받고 전투나 음모에서 패배하면 지위를 내려놓아야 한다.
키는 3m 정도, 몸은 구울이고 긴 팔에 누더기 피부를 걸친 알몸이다. 몸에서 역한 냄새가 난다. 그건 죽음의 냄새다.
그래도 칠죄종이고 게헤나에서 그들의 위신은 막강하다.
"칠죄종 중 한 분이신 위리놈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콧방귀 정도는 뀌어주는 편이 이롭다.
"네가 아라곤···. 이 모습이 보기 그러냐?"
성대가 온전하지 않으니, 목소리도 걸걸하다.
"전 상관없습니다."
칠죄종 알현실 중 가장 장식이 허접하다. 화려한 다른 칠죄종과 달리 위리놈의 알현실은 꾸미지 않는 날 것 그대로이다. 심지어 왕좌는 헬오어로 만든 단출한 돌의자다.
비단 카펫이 깔린 다른 칠죄종과 달리 돌바닥이 전부이다.
"오기 전에 식사했다. 근사한 놈으로 먹었다."
나는 갑자기 무슨 말인가 했다.
위리놈은 인간 남성으로 변했다. 준수하고 말끔한 신사다.
그제야 난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그가 변한 모습은 방금 먹은 사람의 모습인 거다.
"저를 뵙고자 한 것은?"
"다른 칠죄종도 너를 불렀다지?"
"이미 다 알고 계시잖습니까? 그분들의 낙인까지 받았습니다."
"따라와. 이곳은 좀 그렇지?"
완벽한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기에 거부감이 훨씬 줄어들었다.
그를 따라 복도를 걷는데 그가 신은 구두 덕분에 바닥 부딪치는 소리가 찰지게 났다.
그나마 꾸며진 곳이라고 해야 하나 가구와 테이블도 있고 그럴싸한 창문에 바깥 풍경도 보였다.
삭막한 곳이다. 까마귀 떼가 지나가는 걸로 봐서 고층이다.
"앉아."
뭐, 또 각인이나 주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궁금한 것 물어봐."
위리놈은 매우 직설적이다. 칠죄종이 이렇게 감질나게 상대를 맞이한 적이 있던가? 지옥의 대악마들이? 어전 회의 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
"갑자기 저에 대한 태도가 다 바뀌어서 난감해하고 있던 참입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싶긴 한데요?"
"회의는 길었지만 따지고 보면 별것 아닌 거야. 너에 대한 처우를 놓고 개인 이득을 셈한 결과지." "대충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습니다. 이용 가치가 상당하다는 결론이었겠군요. 서로 이득 나누려면 숟가락 하나라고 걸쳐야 하기에 낙인을 찍은 것이고···. 이것도 다 회의에서 결론이 난 일이겠군요. 저를 공동 소유로 하자고?"
"틀린 말은 아니야. 지옥에서 네가 무슨 짓을 하든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겠지."
"무슨 짓을 해도라···."
이거 상황이 정말 웃기게 되었다.
"혹시 서전 임펙트를 일으킨 장본인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뭐든 물어보라고 해서다.
언노운도 대답하지 않는 근원적인 진실. 모든 사건의 출발점.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존재는 루시퍼뿐이다. 그가 입을 열지 않는 이상 우리는 알 수 없다. 단 이거 하나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지. 악마가 관계된 것은 아니라는 것."
지상의 인간이나 심지어 몇몇 천사, 거기다 인간을 위해 날개를 꺾은 자드키엘조차 서전 임펙트의 시작점을 악마로 알고 있다.
위리놈이 거짓을 말하는 경우라면?
이런 자리에서 대가 없는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악마에게는 잘된 일이 아닙니까?"
"절대로 아니지. 오리혀 혼란만 가중했다. 서전 임펙트는 지구의 가이아를 포화 상태에 이르게 했지. 그것은 모든 악마가 꿈꾸는 꿈의 과실이다. 그걸 마시면 게헤나의 영원한 제왕으로 군림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싸움의 근원이 되었겠군요."
"물론이다. 하지만 네가 말하는 그 사건을 일으킨 자의 의도는 혼란이 아니었다. 그는 잘못된 세계에 대한 반감으로 리셋을 원한 것이지."
"리셋이라. 지금 생텀 의회에서 추진하는 일을 말합니까?"
"그런 셈이지."
"지구가 리셋 되면···."
"지금의 가이아는 새롭게 태어나는 인류를 위해 쓰일 것이며 세상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겠지. 새로운 인간 세상을 그들 스스로 창조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도 하나의 방법일지 모른다. 인류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새로운 터전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지금 인류는 삭제된다. 그리고 그들로 인한 미래의 인류까지. 어쩌면 언노운이라는 존재 또한 망각의 시간 속으로 침몰할지 모른다. 언노운의 존재가 사라진다면 나란 존재 또한 사라질지도···.
그걸 모두 감내하고 생텀 의회의 의도를 따라야 할까?
"어전 회의 때 제왕과 칠죄종은 어떤 결론을 내렸습니까. 날개와 싸워 현 지구를 지킬 것인지 아니면 무시할 건지?"
"당연히 날개를 저지한다."
"큰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겠군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지구가 날아가 버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 문제 때문에 네가 필요하다. 우리는 싸울 장소를 마련해 두었다. 하지만 태양계를 지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 우리가 전투를 승리고 이끌 동안 태양계를 지킬 악마가 필요하다."
"그 존재로 낙점받은 것이 저입니까?"
"그렇다. 루시퍼의 강력한 제안에 의한 일이다."
역시나 칠죄종이 나를 찾은 것은 다 이런저런 이유가 붙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너는 불안전해."
"물론이죠. 본신을 찾기 전이잖습니까?"
"다른 놈들은 어떤 선물을 네게 주었지?"
"선물 같은 것은 딱히···."
"순수하게 낙인만 주지는 않았겠지?"
"약간의 도움 되는 정보랄까? 태고의 악마를 길들이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이 있다고, 지구를 지키는 데 필요한 네필림의 본신이 다크 에덴에 있는데 그곳에 들어가기 위한 개구멍을 찾는 방법 정도랄까?"
"시시한 놈들. 그딴 것도 도움이라고 나중에 자기 몫을 더 달라고 손을 내밀겠지."
"제게 가장 필요한 것은 현 지구를 지키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구에 있는 네필림을 각성시키는 것도 필요하고 태고의 악마를 컨트롤하는 것도 필요하죠."
위리놈은 고개를 흔든다.
"아니지, 아니지.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너 자신이지 그런 떨거지들이 아니야. 네가 잘못되면 태고의 악마는? 지구의 네필림이 날개의 공세를 다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의문점은 회의 때도 나왔을 법한데요?"
"물론이다. 네가 혹 소멸하거나 잘못되었을 경우를 대비해 루시퍼는 또 다른 계획을 이미 준비해 놓았더군."
"어떤 계획입니까?"
"당연히 루시퍼만 알고 있지. 그런 것까지 우리에게 일일이 말해줄 만큼 활발한 놈은 아니니까."
"그럼, 제가 뭘 해야 하죠?"
"본신을 찾는 거다."
"음···. 직접적으로 물어봐도 될까요? 본체를 찾으면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부활 할텐데요?"
위리놈은 천천히 일어서 창가로 갔다. 밖은 해가 막 떨어지는 어두운 밤 그늘이 드리워져 있어 까마귀 떼와 어우러져 알싸한 풍경을 지어 내고 있었다.
낮이 없는 곳이라 풍경은 이렇게 고정된 것이다.
모든 것이 짜 맞춤 된 가공의 현실이다.
"내가 말이야. 결정적인 도움을 네게 줬어. 뭐, 일단 그렇다고 쳐. 대신 나도 얻는 게 있어야 하거든."
"기브 앤 테이크 말하는 건가요?"
"아니 그것보다 더 강한 믿음의 끈이 있어야 해."
"그 정도로 값어치 있는 정보라면야."
"솔직히 억압이나 강제로 네게 주술을 걸어봤자. 본신을 찾게 되면 무의미. 소용없는 일이 되지. 내쪽에서 할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도박뿐인 거다."
도박···. 위리놈의 도박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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