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의 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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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의 교단
집회소에 쉬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 왔다.
전형적인 악마의 두상과 외형인데 목소리가 무척 낯 뜨겁다.
귀여운 소녀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녀석을 보니 갑자기 락케와 제이노가 떠올라 1897번 차원에 나가 있던 락케와 제이노를 지옥으로 소환했다.
"뭐냐?"
"벨리알 님의 전언입니다."
"허, 벌써 내가 온 걸 알았나 보네."
"다크 로드를 타시면 흔적이 남습죠."
"일 처리 하나는 더럽게 빠르게. 이렇게 지극정성이면 우주 정복해도 했겠다."
"이걸···."
작은 구슬 하나를 받았다.
외형에 고어가 두루두루 쓰여 있다.
"타락 교단으로 전의가 가능한 구슬입니다. 작동 방법은 엄지로 잡고 권능만 주입하면 됩니다."
별반 할 일도 없고 머리도 복잡했는데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어차피 갑이 나고 타락 교단은 을이니까.
더군다나 이건 정확히 초대다. 타락 교단이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지만 이번은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구슬에 권능을 넣었다.
순간 주변의 환경이 단번에 바뀌었다.
'이건 지옥 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순간 이동 장치로군.'
구슬은 부서졌다. 일회용인 모양이다. 철저한 놈들이라고 생각했다.
구슬은 다크 로드와 같이 양자 터널 구조는 아니었다. 이건 순간 이동에 가까운 방법으로 대상을 강제 이동시키는 장치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두 마리 악마가 대기 하고 있었다.
계산적인 놈들.
8고리 타락 교단이다.
두 마리 악마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갔다.
교단의 최고 우두머리가 나를 찾는다?
평범한 악마는 꿈도 꾸지 못하는 일이다.
내 계급은 백작. 악마 중에서 가장 많은 부류가 백작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그만큼 흔하다는 거다.
백작 신분의 악마가 최고 수장의 호출을 받는 일은 솔직히 없다고 보면 된다.
말도 안 되는 사고를 쳤거나 아니지, 그러면 호출되기도 전에 소멸당하는 것이 먼저 일수도.
난 바알에 몰렉에 심지어 지옥 최상위 권좌에 앉은 루시퍼의 낙인을 받은 괴물 같은 존재다.
다른 교단의 견제만 없으면 지옥 내 어디를 돌아다녀도 될 만큼 막대한 지위를 가졌다.
제대로 돌아다니지 못하고 있는 건 타락 교단을 위시한 다른 교단의 지나친 견제에 있다.
4고리 때의 일을 생각해 보라. 엄청난 현상금이 걸렸음에도 나의 꼬붕이 되기 위해 중저급 악마들이 난리를 피우지 않았나.
따지고 보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나다. 하지만 반대로 그만큼 위험에 노출된 상태이기도 했다.
중립 지역인 교차로 악마 집회소를 쉬이 벗어나기 싫은 것도 귀찮아서이다.
모든 문제의 중심에는 늘 타락 교단이 있었다.
지혜 교단의 니베리우스가 거짓된 여왕의 티아라를 구해 오라는 조언이 지옥에서 내 가치를 올리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지혜 교단의 수장 몰렉은 내가 지옥에서 좀 더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방법을 알려 준 것이다.
가장 강한 적을 친구로 두면 자연스레 해소된다는 지극히 간단한 논리.
"여기로 들어가십시오. 저희는 여기까지입니다."
벨리알
한때 역천사였던 타락 천사. 무한한 권력을 상징하는 자. 거짓의 군주.
세상 모든 거짓을 지배하는 자. 그를 향한 수식어는 셀 수 없을 정도이다.
-삐이컥
거대하고 육중한 헬오어 금속의 문이 좌우로 열렸다.
앞에 나타난 것은 붉은 융단
붉은 길을 따라오라는 듯이 카펫처럼 깔려 있다.
한 교단의 수장을 만나는 일이다. 솔직히 떨림을 감출 수 없다. 나의 감정은 아직 인간의 틀 안에 있으니, 공포나 두려움의 감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나를 믿고 움직일 수밖에···.
커다란 왕좌에 장장 10m짜리 초 거구가 앉아 있다. 그 위엄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며 그를 보면 스스로 고개를 조아린다고 할 정도로 압도적인 위압감을 풍겨 내고 있다.
머리 양쪽에 솟은 긴 수소 뿔이 인상적이다. 그 위에 쓰인 왕관과 잘 어우러져 보인다.
얼굴은 악마 형상인데 상당히 날카로운 인상이다. 몸에는 왕만이 입을 수 있을 것 같은 찬란한 휘장이 달린 화려한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크기도 크기고 내뿜는 권능의 위력이 장난 아니었다. 바알의 식탁에 초대받았을 때도, 몰렉을 만났을 때도 이 정도 위압감은 받지 않았다.
그건 그들이 나를 맞춰줬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벨리알은 자기 권능을 부족함이 없이 내비치고 있다.
"날 보고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 놈은 네가 처음이다. 루시퍼의 낙인을 가지고 있다고 허세를 부리는 것이냐?"
【벨리알은 거짓말을 가장 싫어합니다. 오직 진실만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낙인 따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당신의 위압감에 사로잡혀 인사하는 것을 잠시 망각했을 뿐입니다."
간단히 묵례로 예를 대신했다.
"네가 타락 교단에 입힌 피해는 죽음으로 갚아도 모자랄 지경이다."
"그걸 한꺼번에 해결하기 위해 왕관을 가져왔습니다. 알고 계시잖습니까?"
"당돌한 녀석일세."
"서로 주고받는 룰이 가장 확실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나는 핵심을 먼저 찌르기로 했다.
"현상금 건 것은 저를 시험하기 위함이고 타 교단에 뒤처지는 것이 싫어서였지 않습니까? 만약 저를 처벌 할 생각이었다면 진정한 강자를 제게 보내도 보냈을 것입니다."
"너 같은 애송이 하나 처리하지 못한다면 교단의 위신 문제다. 같은 등급의 악마 처리는 그 비슷한 놈으로 해야지 수지 타산이 맞는 것이다."
"저한테 뭐 숨기시는 것 있으시죠?"
-쾅
"당돌한 놈. 넌 지금 누구 앞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따위 왕관에 내가 흔들릴 것 같더냐?"
"제 말은 그게 아니고 왜 저를 이렇게 포근하게 맞이하냐는 겁니다. 타락 교단 악마들이 반감을 일으킬 만한데요?"
"···."
핵심을 찔렀다.
"얼마 전에 칠죄종을 비롯한 악마들의 어전 회의가 있었다. 그날 루시퍼는 너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칠죄종은 루시퍼의 말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그 왕좌의 주인은 루시퍼이며 그 말은 충분한 신뢰성을 가지고 있지."
칠죄종은 늘 그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전력을 투사해 다툰다. 상대를 비판하고 약점을 잡고 늘어지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런 칠죄종이 어전 회의로 단합할 수 있는 것은 커다란 문제에 봉착했다는 것이다.
"한가지 질문이 있다."
"경청하고 있습니다."
"태초의 차원 지구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잘 알지?"
"물론입니다."
"태초 차원 지구가 바뀌게 되면 전 차원에 그 파동이 미치게 된다."
"이런 말 드린다고 노여워하지 마시길. 그 파동은 신성력으로 인한 것이니 선한 파동이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다른 차원에 갔다가 느낀 것인데 태초 차원 지구가 침습된 관계로 악의 파동이 다른 차원에도 미치고 있더군요. 생텀 의회는 어떻게 하든 이 지구를 원래대로 바꾸려 할 겁니다."
"그렇다. 그들이 지구를 다른 깨끗한 행성으로 교체하게 되면 엄청난 일이 일어난다."
"엄청난 손해라고 하시는 편이 맞지 않겠습니까?"
"한심한 놈. 우주에는 빛과 어둠이 있다. 그 균형은 지금까지 완벽히 유지되고 있지 어느 한쪽이 커지게 되면 균형이 무너진다. 선과 악의 싸움이 아니야. 우주 전체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생텀 의회에서 모르고 그 일을 추진 했겠습니까? 그들 나름대로 균형을 잡을 방안을 마련해 두었겠지요?"
"흥! 멍청한 소리. 내 앞에서 감히 의회 이야기를 꺼내다니! 그놈들은 악을 무너뜨리고 지배하는 것에 정신이 팔린 한심한 것들이다. 우주의 균형 따위를 생각했다면 은하계에 몰려와 저 난동은 부리지 않을 것이다."
벨리알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나도 수상쩍게 생각하고 있었던 부분이다.
"어떻게 하든 이 지구는 지켜져야 한다."
"천사와 전면전도 불사하겠다는 말입니까? 전면전이 일어나면 행성 하나 파괴되는 것은 우스운 일이고 그 행성이 지구가 된다면 상황은 더 심각해지는데요?"
"바로 그 문제다. 루시퍼가 제기한 문제이기도 했고.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골머리를 앓고 있다. 루시퍼는 네가 좋은 대안이라고 제시하더구나."
"제가 뭐 그리 대단한 인물이라고요."
"내 앞에서 끌까지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말 대답한 놈은 네가 처음이다. 다른 놈 같으면 바닥에서 이마를 떼지 못했을 것이다."
-팟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신하가 왕을 알현하는 왕궁과 같은 곳에서 초록빛이 감도는 화사한 정원으로 옮겨졌다.
갖은 색상을 뽐내는 화려한 꽃들이 눈을 즐겁게 했고 아주 잘 꾸며진 정원은 마음의 부담감을 씻어 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벨리알이다. 위압감은 온데간데없고 눈앞에 서 있는 이 귀공자는 누구인가 싶은 정도다.
압도적인 미남이다. 모든 미사여구를 가져다 붙여도 설명이 안 되는 귀공자다. 참, 사람이 아니지 악마가 생겨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는가 싶었다.
키도 훤칠하고 외모도 완벽하고 얼굴은 진짜 끝장이다.
"험, 내 얼굴에 뭐 붙었나?"
목소리까지···.
"솔직히 본모습일 때 보다 더 압도되는군요."
"이편이 대화하기 편할 것 같아서."
-짝
그가 손뼉을 치자 시종이 모습을 보였다.
"차와 다과를 준비해."
"명을 받들겠습니다."
여시종은 완벽한 인간 여성의 외모였는데 실상은 서큐버스다.
꽃냄새와 풀냄새 가득한 정원에 벨리알과 탁자를 두고 마주 앉았다.
솔직히 이게 말이 안 되는 현실이다.
벨리알이 왜 내게 과잉 친절을 베푸는 것일까? 지옥 사상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현상금까지 걸어 놓고?
"이런 과잉 친절은 조금 어색하군요. 누가 보면 이곳이 지옥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타락 교단에서 건 현상금은 이미 없는 것으로 돌려놨어. 피의 교단도 그렇고 타 교단에서도 더는 자네에게 시비를 걸지 않기로 했지."
이것 봐라?
"루시퍼의 제안입니까?"
"우리가 떠안고 있는 당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네가 적임자라는 사실 때문이다."
ITB에서 거짓된 여왕의 티아라를 꺼냈다.
기브 엔 테이크!
현상금을 없앴다는 말은 곧 이 티아라의 주인이 벨리알임을 말한다.
정확히 지혜의 교단에서 중재하여 현상금과 왕관을 바꾸기로 했으니까.
벨리알이 현상금을 없앴다는 말에 망설일 필요가 전혀 없었다.
거짓말 아닙니까? 진짜 맞습니까? 따위의 말을 꺼냈다면 이 자리 파투 난다.
이 거짓의 군주는 누구보다 거짓을 싫어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건네 드리겠습니다."
벨리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왕관을 받았다.
"우리 거래는 끝난 셈이군. 찾아온다고 고생했어. 손 좀 보여 주게나."
왼손을 내밀었다.
그는 손톱으로 손목 부위를 그었다.
"하, 낙인입니까?"
"나도 손을 걸쳤으니, 증거는 남겨야지."
이제 벨리알의 낙인까지 받았다.
"게헤나 역사 통틀어 악마 아닌 녀석 중에 가장 많은 칠죄종의 낙인을 받은 사례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 다음으로 너구나." "이렇게 제게 힘을 몰아 주시다가 문제가 생기면···."
"그건 루시퍼의 몫이다. 우리든 상관이 없지."
"그렇군요."
"지금부터 게헤나는 너의 집이자 무덤이 될 것이다. 그러니 마음 놓고 돌아다녀도 시비 거는 놈들은 없을 것이다."
"칠죄종 중 네 분의 낙인을 받았는데 누가 건들겠습니까?"
"그렇다고 태평하게 보낼 수는 없어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니까."
"밖의 상황을 말씀하시는군요."
"너의 목적도 우리와 같지? 지구를 지키겠다는 것 말이야."
"그렇습니다."
"태고의 악마 세 마리를 통제할 자신이 없지?"
"아직은 두근거림이 큽니다."
"놈들을 제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 네포라이어스를 찾아가 봐. 놈은 4고리에 있어."
"네포라이어스? 어떤 악마입니까?"
"혼돈의 섭렵자라 불리는 녀석인데 너에게 도움이 될 거야."
"잠깐 네포라이어스면 피의 교단인데요?"
4고리에서 피의 교단 소속 크림슨 베일에 핵폭탄을 떨구지 않았던가 그 일로 벨페고르의 권능으로 지어졌다는 최고의 위락 시설 커럽션 오아시스가 박살이 났다.
타락의 교단 일은 이렇게 해결 지었다고 해도 피의 교단이 남아 있다.
"파리 교단과 지혜 교단, 그리고 죄의 교단에서 찬조금 조로 협찬했다. 복구 비용으로 차고 넘쳐. 4고리 가기 전에 피의 교단에 들러 머리 조금 조아리면 더는 문제 삼지 않을 거다."
이젠 피의 교단으로 넘어갈 차례인가? 대체 이들은 무슨 작당을 했기에 갑자기 나를 신줏단지 모시듯이 하는 걸까?
아니 여긴 지옥이라고! 빚지고는 절대 못 사는 악마 새끼들이 판치는 곳이라고···.
내가 지금 다른 곳에 있는 건 아니지? 눈앞에 있는 악마가 벨리알 맞는 거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갑자기 지옥이 천국과 같이 생각될 정도로 말도 안 되는 파격적인 대우. 뭔가 심상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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