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장.
*1*
박정근 집.
회강은 산에서 죽은 나뭇가지들을 가지고 내려오다가 서장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오빠가 과거의 모습을 되찾은 건 좋은데... 저는 얼마 전 오빠가 훨씬 좋았던 것 같아요.”
고개를 든 그는 집 마당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서장미와 남연희, 그리고 이필상의 모습을 발견한다.
남연희가 양파를 까다 말고 그녀를 바라본다.
“그래요? 어떤 점에서요?”
“음...”
서장미는 잠깐 고민하다가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심장이 뛰는 사람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런 것 같아요.”
-전에는 기계 같았나 봅니다.-
이필상의 메시지에 서장미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자신의 앞에 있는 마늘을 만지작거렸다.
“방송이나 자신이 맡은 배역에 필요하면, 이런 마늘 수십 개를 씹어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던 분이었어요. 정해진 시간 내에 자신이 정한 목표는 무조건 성공시키고, 남들에게도 그 성공한 방법을 가르쳐 주면서 따라올 것을 강요하던 분이었죠.”
“그건, 지금도 그렇지 않나요? 우리도 요즘엔 낮아졌지만, 일정 기간 요소 단계 상승률이 조금이라도 낮아지면 무리에서 나가게끔 계약을 맺어서, 어쩔 땐 온몸에 피가 타들어 간다고 느낄 정도로 초조해지는 경우가 있어요.”
“에이, 그건 남들도 다들 하는 거잖아요. 제가 수장이라서 더욱 크게 느끼는 건지는 모르지만, 발전하지 않은 사람을 데리고 있는 것만큼 끔찍한 건 없어요. 한두 명 때문에 전체 분위기도 흐리고, 자칫 잘못하면 나머지 사람들까지 죄다 지옥행 하는 거예요. 그건 뉴스에서도-”
남연희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 장미씨도 그분이랑 비슷한 말을 하네요. 거기다 요즈음 하는 행동들도 회강님과 비슷한 면이 많고요. 이래서 스승과 제자는 닮아간다는 말이 정확한 것 같아요.”
“제가 오빠랑 비슷하다고요?”
“네.”
“헐. 저는 아니거든요. 제가 우리 일행들에게 얼마나 잘해주는데요. 과거 회강 오빠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르죠? 우리 회강 오빠는요-”
“그만하시죠.”
갑자기 그들의 뒤에서 나타난 김산수의 모습에 세 사람이 몸을 크게 움찔했다.
“헉.”
“어머나. 놀랬잖아요.”
“애써 깐 내 마늘이...”
김산수가 마늘을 줍기 시작한 서장미에게 시선을 옮겼다.
“서장미씨는 과거 이야기로 이상한 말이나 돌게 할 거면, 여기서 나가주세요.”
“이상한 말이라뇨. 누구나 웃으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그건 본인이 스스로 자신에 관한 이야기나 해당하는 겁니다. 왜 당사자가 없는 곳에서 남의 이야기를 흘리는 겁니까. 애도 아니고... 쯧쯧.”
눈살을 찌푸린 서장미가 언성을 높였다.
“당신이야말로 최변인의 말을 이곳저곳에다 알려주던 개였지 않나요? 제가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을 때, 병실로 찾아와 최변인의 말을 전해주던 거 아직도 까먹지 않았어요. 아마 회강님에 대한 부정적인 말을 해달라는 인터뷰였던 것 같은데... 아닌가요?”
“음...”
그녀의 말에 김산수가 자신의 오른손을 꽉 쥐곤 입을 꾹 다물었다. 서장미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오빠는 넘어갔을지 몰라도, 저는 당신 절대로 못 믿어요. 그러니 당신이 어떤 말을 해도 나는 여기서 나가지 않을 거예요.”
“그러면 어째서 당신은 회강님이 자리를 비운 동안 최변인을 옹호하는 말을 하신 겁니까. 당신이야말로 회강님을 배반한-”
서장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성미 때문에 그랬어요. 성미가 두 손 모아 빌면서 나에게 애 아빠 방송활동 좀 하게 해달라는 데, 절친인 제가 어떻게 거절해요. 그리고 내용도 애 아빠니 선처 좀 해달라는 거였는데, 그게 우리 오빠에게 해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도 그자가 회강님에게 한 행동을 떠올리면-”
-그만-
“오. 오빠.”
“회강님.”
모두가 회강을 바라보며 얼어붙었다.
많은 양의 나무토막을 실은 지게를 내려놓은 그가 서늘한 시선으로 김산수와 서장미를 바라보았다. 그와 시선을 마주친 두 사람의 목이 움츠러들었다.
-유남 어르신이 아프셔서 누워계시는데, 큰소리로 서로 싸우면 어쩌자는 거야.-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이필성씨.-
-예. 회강님.-
-이 근처 죽은 나무들을 가져온 거니, 최성국에게 무리해서 산속을 돌아다니지 말라고 하세요.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열 마리 이상 되는 늑대 발자국을 발견했습니다. 음식이랑 물자도 모두 채워놨으니 방비를 철저히 하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 쓸모없는 사람들은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유남 어르신이 깨어나시면, 건강하세요라는 말 좀 대신 전해주세요.-
-예.-
이필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회강은 그의 어깨를 두드려 준 뒤, 주차된 차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나를 따라와.-
“예...”
“네...”
풀이 죽은 목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회강이 뒤를 따라오고...
이내 그들을 태운 승합차가 남연희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갔다.
차 안.
침묵이 깨진 건, 차가 관악산 부근에 다다랐을 때였다.
-장미야.-
“네...”
-내가 그렇게 무서웠냐?-
“아... 그게...”
-화내려고 그러는 게 아니고, 내가 아직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서 그런다. 내가 온전히 회복할 수 있게, 그 당시 나에 대해서 자세히 말해봐.-
서장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렇다면... 말할게요.”
-그래. 부탁한다.-
“오빠와 처음 만나거나 자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편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죠. 왜냐하면, 오빠는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미소 지으면서 좋은 소리만 하거든요. 하지만 조금이라도 친하거나 일로 만나는 사이가 되면 많이 달라져요.”
-어떻게 달라지는데?-
“그게...”
서장미가 슬쩍 회강의 눈을 마주치더니 바로 눈동자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악마.”
“응?”
그녀가 고개를 수그렸다.
“악마. 그게 오빠를 부르던 연습생들의 별명이었어요.”
그녀의 말에, 의자에 기대어 있던 회강의 상체가 세워졌다.
회강의 검지가 자신을 가리킨다.
-나를 악마라고 불렀다고? 정말?-
서장미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왜? 나는 그들을 때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부당한 대우를 한 적도 없었잖아. 큰 제약도 걸지 않았고, 오히려 김대식 회장님이 더 무섭게 대하지 않았나?-
“김대식 회장님은 몇 번을 반복해서 실수해도 그때만 화내지 나중엔 용서해줬잖아요. 하지만, 오빠는 아니었어요. 그냥 화나면 끝이었어요. 그것도 그냥 끝도 아니라, 이 바닥에서 영원히 아웃시켰죠.”
그녀의 말에 회강이 눈이 감겼다.
잠시 뒤.
-하지만, 그들은 그럴 만했잖아. 죄다 성폭행에 음주운전, 제일 약한 것도 학교 폭력이었는데, 인성이 안 된 것들을 왜 내 돈과 노력을 들여 지원해줘야 하지? 그리고 그런 자들을 다른 이들이 좋아하고 열광하게 할 순 없잖아? 그런 것 때문에 악마라고 불린 거라면 나는 언제든 그리 불려도 상관없어. 진심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면 모를까. 부모랑 합심해서 반항하는 쓰레기들을 내가 왜 봐줘야 하는 거야.-
“그런 애들만 아웃시킨 게 아니잖아요. 연습 시간 지각 세 번 이상하면 경고, 그 경고가 세 번 누적되면 아웃. 스태프들에게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면 경고, 그 경고가 두 번 누적되면 아웃. 실전에 들어갔을 때 네 번 연속 울렁증을 보이면 경고, 일 년 이내에 극복 못 하면 아웃. 그리고...”
그 이후로도 오 분이 넘게 서장미가 읊은 내용을 들은 회강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그렇게나 많았나?-
“네.”
-아직도 그걸 외우고 있다니 놀라운데.-
“오빠 회사에 있는 준후랑 휘남에게 물어보시면 그들도 잊지 않고 욀 걸요? 그 당시 오빠 밑에서 관리받던 애들은 전부, 지금도 잊지 않고 있어요. 저도 음... 실수한 다음에 오빠가 경고라고 말하면, 그날은 온통 그 한 마디가 제 머릿속에 맴돌아서 괴로웠죠. 그때마다 계속 되뇌었죠. 아웃은 안 돼. 아웃은 안 돼. 라고...”
“흠...”
회강이 침묵하는 사이, 앞에서 쥐 가면을 쓰고 운전하고 있던 김산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제가 듣기론 회강님 관리하에 있던 사람들 모두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들었습니다. 최변인이 재계약 문제로 연예인들의 약점을 캐보라고 저에게 지시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남휘남과 박준후씨는 정말 바른 생활 사나이 그 자체더군요. 저에게서 보고받은 최변인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죠. 제가 보기엔 많은 지침이 모두 이 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한 습관들이기로 보이는군요. 수행하기 어려워 보이는 것도 별로 없고요. 제 생각엔 그것들을 딱히 무서워할 이유는 없어 보이는데요.”
“맞아요. 그 지침들 덕분에 오빠 밑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연예계 바닥에서 살아남아 아직도 활약하고 있죠. 그래서 모일 때마다 지금에서야 오빠의 행동이 이해된다면서 고마워하고 있어요.”
말하던 그녀의 얼굴이 흐려졌다.
“하지만, 그때 당시에 정말 무서웠어요. 우리를 친동생처럼 잘해주다가도, 갑자기 무표정한 얼굴로 변해서는 아웃이라고 말하는 오빠의 모습은 정말이지... 용서를 아무리 빌어도 오빠에겐 통하지 않았죠. 한번 아웃이면 그날로 회사엔 다시는 발을 들이지 못했어요. 아마 김산수님이 십 년 전 오빠에게 그 짓을 한 게 걸렸으면...”
“흠흠. 저는 운이 좋았군요. 제가 그때 걸렸다면 죽었을지도... 죄송합니다.”
회강은 김산수를 바라보다가 서장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말은 아웃이라고 했지만, 다른 회사에 지원한 녀석들 방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영상 보고 나아진 녀석은 내가 그 회사에 뽑아달라고 투자금을 주기도 했는데. 정말 몰랐던 거냐?-
“그랬어요? 그거 다 김대식 회장님이 뒤를 봐줬다고... 이번 모임에서 성미가 그랬는데...”
성미라는 말을 듣는 순간, 회강의 인상이 찌푸려진다.
-내가 성미에겐 당분간 거리를 두라고 말했을 텐데. 언제 또 만난 거야?-
“오빠가 거기 가고 사흘째 되던 날에 모임이 있었어요. 이건 일 년에 한 번씩 만나는 중요한 모임이라고요. 그리고 이제 막 신혼여행 간다고 하던 성미가 올 줄은 몰랐어요. 정말이에요.”
그녀의 말에 회강이 김산수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백미러를 통해 그와 시선이 마주친 김산수가 고개를 수그렸다.
“죄... 죄송합니다. 잠시 조는 사이에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뒤따라갔습니다. 그 뒤로 아무 일 없어서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경고다. 내가 모든 일을 보고하라고 했으면 그대로 해. 알았나.-
“죄송-”
이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서장미가 회강을 째려보며 입을 열었다.
“뭐야? 설마 김산수씨에게 나 미행하라고 시킨 거예요?”
-안전을 위해 그랬다.-
안전이라는 말에 잠시 말을 멈춘 그녀가 회강 쪽으로 몸 전체를 돌려버린다. 그가 움찔한 사이, 그녀의 작은 목소리가 차 내부에 울려 퍼진다.
“숨기는 게 뭐에요.”
-숨기는 거라니?-
“오빠가 아무 이유 없이 제게 강요할 분이 아니잖아요. 혹시 성미가 저를 해코지할까 봐 그러는 건가요?”
회강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오빠! 예전엔 이유도 항상 제대로 말씀해 주셨잖아요. 당사자가 알아야 제대로 해결된다고 하신 말씀 잊으신 건 아니죠?”
그녀의 말에 회강이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너의 말대로 솔직하게 얘기하마. 성미는 지금 너를 노리고 있다.-
“하지만, 성미는 저랑 친한 친구예요. 그것도 무려 십오 년을 함께한 사이라고요. 그녀 왜 저에게 해코지한다는 건지 이해가 안 돼요.”
-네가 TS 화재 사건의 진실을 이야기한다면?-
“에이, 그게 성미랑 무슨 상관이-”
-그녀도 내가 구해준 아이다.-
“네?”
-나는 너만 구한 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구했어.-
“하지만 그건 최변인이 성미를 비롯한 다른... 헉”
그녀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리기 시작한다.
몇 분이 지나서야 간신히 부들거리는 자신의 몸을 진정시킨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니죠? 제가 생각한 그게 아니-”
-맞아. 최변인 조성미 그리고 김대식 회장까지, 이 세 명이 거짓말을 했다. 그것도 한둘이 아닌 전 국민을 상대로 말이야.-
“거짓말... 그럴 리가 없어요. 그럴 리가-”
털썩.
그는 기절한 서장미에게 안아 들었다.
“장므야. 증므야!”
그가 서장미를 흔드는 사이, 김산수의 다급한 목소리가 차 내부에 크게 울렸다.
“거기 일일구죠. 여기 사람이 갑자기 쓰러져서요...”
“장므야. 일으나라 장므야.”
내부가 소란스러운 사이, 차는 주변 차들을 추월하기 시작했다.
*2*
도봉산 자락.
밭과 주택들이 보이는 한적한 일 차선 도로 위를 회강이 천천히 걷고 있었다.
“슴 사 오. 여그다.”
그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빨간 대문이 달린 1층짜리 주택이었다. 회강이 발뒤꿈치를 들고 안을 들여다본다.
넓은 마당 구석에는 허름한 집기들이 이곳저곳 가지런히 놓여 있었으며, 잡초 하나 없는 깨끗한 마당 한가운데에는 지붕까지 달린 작은 정자가 하나 있었다.
‘사람이 사는 것 같은데, 어디 갔나?’
그가 기웃거리는 사이, 그의 귓가로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누구세요?”
회강이 목소리가 들려온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십 대의 여성과 눈이 마주치게 된다.
그녀는 건강미가 넘치는 신체와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을 지닌 미인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순간 찡그려졌다.
“또 스토커인가. 귀찮게 하네.”
바로 몸을 돌리려는 그녀에게 회강이 손을 뻗으며 메시지를 띄웠다.
-저기 이미희씨 되십니까?-
“뭐야. 내 본명을 알고 있잖아. 어떻게...”
그녀가 중얼거리더니, 회강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다가 삼 미터 부근에서 멈추어선 이미희. 그녀가 회강과 눈을 마주쳤다.
“당신 누구죠?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겁니까.”
그러면서 슬며시 품에 손을 넣는 그녀였다.
회강은 오른손으로 얼굴에 쓰고 있던 하희탈을 잡았다.
스윽.
그가 가면을 벗자. 그녀의 눈이 동그래진다.
“다. 당신은!”
-오래간만입니다. 이미희씨. 만나서 반갑습니다.-
메시지를 읽은 그녀는 인사 대신 그의 팔을 잡아챘다.
“강 오빠. 우선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죠. 여기는 위험해요.”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하자, 회강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어? 어.”
쾅.
그가 대답함과 동시에, 발로 문을 찬 이미희의 손에 이끌려 회강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쿵.
빨간색 대문이 닫혔다.
- 작가의말
푹 쉬다 돌아왔습니다.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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