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장
*1*
회강은 거실에 나와 멍하니 TV를 바라보았다. 거기엔 때마침 KS와 관련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이번에 KS 총수의 아내이신 오나래씨가 이번 경영권 승계를 반대하면서...-
그는 양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내가 저들, 아니, 저들로 의심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꿈을...’
처음은 상하이에서 환영처럼 겹쳐 보였었다. 그 이후로 점점 그들과 관련된 꿈의 길이가 길어지고 있었다.
‘세 번? 아니 네 번 꾼 건가. 모두 남궁민이 등장했고, 그리고-’
“윽.”
머리에 통증이 몰려왔지만, 그는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KS 회장과 닮은 사람과 저기 나오고 있는 오나래와 거의 비슷한 여인이 나왔었지. 마지막엔 나오는 자들도’
“악.”
심해지는 두통에 그는 옆으로 쓰러졌다.
‘나중에 생각하자. 나중-’
그가 극심한 두통에 편히 쉬려는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과거 정신상담사와 나눈 대화 내용이 스쳐 지나갔다.
[회강학생 절대로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하지만, 떠올리려고 할 때마다 너무 머리가 아파서 온종일 고통에 시달려요.]
[그래도 떠올리려고 포기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다음번에도 똑같이 기억을 잃는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저번에는 무리해서 떠올리려 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렇다고 현재 상황에 만족하며 지내란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잊지 마세요. 인간은 편한 걸 좋아해서 같은 방법을 쓰려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기억 같은 건 더더욱 그렇지요. 나중에 큰일이 생길 때마다 습관적으로 기억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생길 수 있어요. 그리되면 구해주신 분에게 큰 민폐가 될 겁니다.]
[매우 아픈데...]
[힘내시면 꼭 열일곱 살 이전의 기억을 찾으실 겁니다. 혹시, 모르잖아요. 떠올려 보니, 학생이 재벌 집 아들일지 모르잖아요.]
[하하. 선생님도 참. 농담도 황당하게 하시네. 재벌 집 아들이 무슨 강물에 떠내려와요. 어쩌면 저희 동네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그는 강하게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더는 그럴 수 없어. 내게는 지켜야 할 것들이 많다고.’
그의 머릿속으로 양의를 비롯해 호구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그들과 있었던 행복한 추억들까지도 같이 지나가고...
회강은 처음으로 극심한 두통 뒤에 기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는 외면하지 않겠어. 나와 다른 이들을 위해...’
피가 흐르는 자신의 입술을 닦은 그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남궁민, 오늘 시간 되면 만나자.-
“후...”
소파에 기댄 그.
지이잉.
-네, 가능합니다. 언제 어디서 만날까요.-
떨리는 눈동자로 한참을 바라보던 회강은 엄지를 움직였다.
-장소는...-
어김없이 오늘도 이미소가 과일을 들고 나타났다.
“자, 드시면서 이야기 나누세요. 저는 양의랑 같이 시장에 가볼게요.”
“고맙습니다.”
“고마워.”
“후후. 양의 옷 다 입었어?”
“네. 나가요.”
벌컥.
안방문을 열고 나타난 양의가 이미소에게 달려갔고, 둘은 손을 잡고 회강을 바라봤다.
-조심해서 다녀와.-
“예. 아저씨가 좋아하는 후라이드 사올 테니 밥 드시지 마세요.”
“양의야. 밥이 아니라 진지.”
“아. 맞다. 죄송요. 헤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이따가 봬요.”
“예. 빙판길 조심하세요.”
-위험한 일 생기면 바로 전화해.-
“예.”
“네.”
둘이 나가고, 남궁민이 손을 뻗어 포크를 잡았다.
푹.
“자, 형님부터...”
-고맙다.-
서로 과일을 하나씩 먹은 뒤, 대화가 시작됐다.
“형님이랑 단둘이 있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런가. 왜? 어색해?-
“아니요. 저는 형님을 처음 봤을 때부터 항상 편했어요. 뭐랄까 친형제를 만나는 것 같은 느낌?”
그의 말에 회강의 눈가가 잘게 떨렸다.
“그런데, 무슨 일로 연락하신 거예요? 혹시 제 어머니 일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아니니 정색하지 마라. 나는 예전에 병실에 혼자 누워있었을 때, 제일 오랜 기간 찾아왔던 너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을 뿐이야.-
그의 메시지에 굳은 표정을 푼 남궁민이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하하. 하도 친척 중에 도와주겠다며 접근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저도 모르게 예민하게 반응했네요. 그리고 그 일이야, 당연히 친한 형이 아파서 쓰러져 있는데, 방문하는 게 맞잖아요. 그러니 인사까지 하실 필요는 없어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만-”
-실종된 남궁회를 찾고 있다고 들었어.-
그의 말에 남궁민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 그걸 어떻게...”
-한 가지 일을 오랫동안 안 하기로 유명한 남궁민이 기자 일을 붙잡고 취재를 명목삼아 이 년이 넘도록 지리산 일대를 돌아다니면 뻔한 거 아닌가.-
“그렇게 티가 났나요?”
-당연하지. 그렇게 노골적인데 누가 몰라.-
“후... 역시 그렇군요. 최대한 숨긴다고 했는데...”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은밀하게 하는 거야? 대놓고 KS의 삼남인 남궁회를 찾는다고 말하면 되잖아.-
“그건... 죄송합니다. 사정상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역시, 소문이 맞는 건가.-
그의 메시지에 남궁민의 얼굴이 확 굳어진다.
“소문이라면...”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솔직히 나도 긴가민가했다가, 요즘 들어서 네 어머니의 행동을-
벌떡.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남궁민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옆에 있는 외투를 잡는다.
“형님,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무래도 제 상태가-”
-내가 도와주마.-
자신의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본 남궁민이 멈칫한다.
-내가 구해준 사람 중 지리산 주변 요직에 있는 자의 자식들이 있다. 그리고 같이 토벌하면서 승진한 이들도 있고, 번개 팀에 지리산 쪽 관공서 사람과 친분이 있는 자들도 많아. 그리고 그들과 은밀하게 접촉해서 일을 처리해줄 사람도 있고. 그러니, 내게 맡기지 않겠어?-
메시지가 사라지고, 남궁민은 우두커니 서 있다가 회강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가는 붉어져 있었는데, 그의 입에서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부탁... 드리겠습니다.”
-그래. 남궁회와 관련된 자료가 있으면 보내줘라. 네가 찾아간 사람과 그들과 한 대화 내용도 기억나는 대로 적어서 보내주고.-
“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모르는 거냐.-
“네?”
-정말, 실종된 형의 얼굴을 모르나?-
“예... 실종 된지 십 년이 넘게 지났거든요. 그 정도 시간이면 누구나 다-”
-사진은 있을 텐데. 가족사진도 없어? 누군가 일부러 없애지 않는 이상 사진 한 장이라도 남아있을 거 아냐.-
그의 말에, 남궁민의 몸이 벼락 맞은 듯이 움찔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몸이 너무 안 좋네요.”
-그래. 조심해서 가라. 자료는 꼭 보내고.-
“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잘 가라.-
고개를 숙인 그가 현관문을 나섰다.
그가 나간 곳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회강이 눈을 감았다.
“미끼는 뿌릇으니... 바능이 으긋지.”
*2*
-스스로 서식지를 만들었습니다. 사흘 동안 포식자와 추위에서 견뎠습니다. 새로운 지형 해안지대가 지식에 추가됩니다. 이곳과 관련된 열 개 이상의 지식을 습득하셨습니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셔도 됩니다.
-이곳의 검은 대지는 현실에서의 갯벌과 비슷하다. 따라서 검은 대지의 명칭은 갯벌로 바뀐다.
‘됐다.’
그는 진흙 범벅이 된 자신의 양손을 바닷물에 씻으며 방긋 웃었다.
‘역시 사람은 지식을 잘 쓸 줄 알아야 한다니까.’
짧은 기간 이었지만, 적들이 부활하는 사흘이라는 제한 시간 동안, 그는 새로운 포식자와 관련된 지식을 얻었다.
-마석을 조개 안에 넣으면 하루 만에 괴물로 만들 수 있다. 일등급 원형날조개는 유인원의 발목 정도는 순식간에 잘라버릴 만큼 강한 공격력을 가지고 있다.
-이 등급 원형날조개는 유인원의 하반신을 순식간에 자른다면 천천히 갉아먹는다.
-이 등급 원형날조개가 사는 서식지는 진흙, 동물 뼈, 그리고 조개껍질이 섞인 벽으로 만들어져 있다.
-조개 안에 돌들은 짧은 시간 안에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이것을 이용해서 그는 서식지를 만들고, 적들을 한 번 더 손쉽게 물리치는 성공 한다. 그 뒤로, 이렇게 성공 메시지를 받은 것이다.
‘맘 같아선 조개들을 모두 괴물로 만들어 버리고 싶지만, 그럴 순 없지.’
잘못하면 삼 등급 괴물로 발전할 수 있어서, 회강은 갯벌에 있는 이 등급 괴물과 일등급 괴물 일부를 하루라는 시간을 투자해서 정리했다.
‘적들도 있지만, 다른 이들이 통과할 수도 있으니까...’
“카카.”
뒤에 들려온 혜원의 목소리에 회강은 벌떡 일어선다.
‘가자. 마지막 지형으로!’
그는 힘찬 걸음으로 혜원과 호구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사흘 후.
아래를 내려다본 회강의 눈이 동그래진다.
‘우와. 대단해.’
뜨거운 바람이 밀려오는 가운데, 끝이 보이지 않는 숲이 그들 앞에 펼쳐져 있었다.
특히, 그들 바로 앞에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숲이 있었는데, 그 숲은 회강 걸음으로 만 걸음은 족히 걸어야 할 거리까지 펼쳐져 있었다.
‘신비로운 광경이다.’
“카카.”
그의 팔을 잡은 혜원이 빨리 내려가자며 끌어당겼고, 고개를 끄덕인 회강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씩 숲에 다가갈수록 더욱 화려함이 더해지는 모습에, 자연스레 그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우와, 줄기도 반짝이네.’
스윽.
숲에 입구에서 줄기를 매만진 회강은 자신의 손에 가려진 줄기는 빛을 내지 않는 것을 발견한다.
-새로 발견한 나무는 햇빛이 없다면 반짝이지 않는다.-
-잎의 반쪽은 반짝이고, 반은 평범한 나뭇잎의 색깔을 띠고 있다.
-이 나무의 낙엽도 빛을 반사해서 땅바닥도 반짝이는 곳이 많다.
-커다란 나무가 많이 있음에도, 밑에 자생하는 식물들의 상태가 매우 좋다.
-이전까지 얻은 지식으로 종합해본 결과, 햇빛이 식물들의 성장요소 중 하나라는 걸 알았다. ([??]의 미션 개방 요건 중 하나를 개방했습니다.)
‘물음표가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살기 좋은 곳이다.’
주변에 열매가 달린 덤불들도 많았고, 괴물이나 맹수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작은 동물들까지 발견한 회강의 입가엔 미소가 가득했다.
‘정말 오래간만에 편하게 살겠구나. 아니, 이번이 처음이려나.’
항상 최고 난도의 미션만 해왔고, 적들이 즐비한 곳에서 살았기에 그의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슬슬 저녁이니, 서식지를 만들 준비를 해볼까.’
휙휙.
그의 휘파람 소리에 호파람을 제외한 호구들은 흩어졌다.
혜원은 회강과 같이 호파람 위에 있는 짐들을 내려놓고 주변에서 제일 큰 나무를 끼고 조개껍데기로 벽을 만들고 가죽으로 지붕을 얹어서, 해가 질 무렵에 작은 체구의 호구들까지 머물만한 서식지를 완성했다.
이후, 훈제한 고기로 간단하게 식사를 한 그들은 고된 산행에 지친 만큼, 일찍 잠자리에 들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잠자지 못 했다.
반짝반짝.
‘달빛이 이렇게 환할 줄은...’
최대한 몸을 움직여 빛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려 했지만,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빛이 들어왔다.
결국...
그들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태양을 맞이하게 된다.
‘자... 자고 싶어.’
그가 그렇게 비몽사몽 한 눈으로 열매를 따려 하는 데,
뎅. 후웅.
익숙한 소리를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손을 뺀 회강, 그의 손이 있던 자리에 작은 모양의 화살이 지나갔다.
자연스레 날아온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지만, 반짝이는 나뭇잎에 의해서 발견하지 못한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만 물러나자.’
결국, 혜원들에게 돌아간 회강은, 그들을 데리고 반짝이는 숲 밖으로 빠져 나온다.
다시 높은 곳까지 올라온 회강은 턱을 쓰다듬으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뒤에는 적들이 따라오고 있고, 앞은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 하는 환경과 그 환경에 적응한 유인원들이 살고 있어. 최소한 통과는 해야 하는데... 자칫 적을 만드는 순간, 골치 아파진다.’
호구들과 혜원을 보호해야 하는 입장인 회강의 미간은 좁아졌다.
그렇게 소중한 시간이 흘러가고 해가 제일 높이 떴을 때, 아래를 내려 보며 고민하던 회강의 눈이 동그래진다.
‘저들이...’
반짝이는 나뭇잎과 줄기 껍질로 만든 걸 걸친 자들이 회강에게 천천히 걸어온 것이다.
잠시 뒤.
-최초로 한 번에 다섯 개 이상의 진화 속 물건을 교환했다. 이제부터 상점의 방이 활성화되며, 진화와 거래를 할 수 있다.
-그림자 모양으로 대화를 나누는 새로운 의사소통 방식을 알았다. 몸짓, 소리에 이어 모양이라는 세 번째 의사소통 방식을 알았고, 여러 요건이 완성됨에 따라 [의사소통] 메인 미션을 개방한다.
회강은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됐다. 드디어 의사소통이다!’
“우끼끼끼.”
Commen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