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1*
회강은 눈을 뜨자마자 왼발로 놈의 급소를 차버렸다.
퍽.
“크억.”
손막삼은 칼을 끝까지 휘두르지 못하고 자신의 성기에다 두 손을 모으려 했다. 하지만 그는 그마저도 못한 채 눈을 부릅떠야 했다.
푹.
그의 뒤에 있던 사내가 손막삼의 등에다 칼을 꽂아버린 것이다. 그와 동시에 회강이 휘두른 오른손에 그의 얼굴 반쪽이 함몰된다.
털썩.
“형님! 이 개자식이.”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쓰러져 버린 손막삼의 모습을 본 수하가 칼을 찌른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후웅.
손막삼의 몸이 그에게 날아온 것이다.
퍽.
“크억.”
바닥에 엎어진 그가 자신의 상체를 뒤덮은 손막삼을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그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눈앞에 기괴한 두 개의 빛을 바라보며 매우 놀랐기 때문이다.
“헉.”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것처럼 이글거리며 흩어지는 빛의 정체는 회강의 두 눈동자였다.
그리고, 그게 그자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본 장면이었다.
우두둑.
사내의 목을 밟아서 부러뜨린 회강은 계단 위로 날듯이 올라갔다.
작은 방문을 나서면서 회강은 양손을 휘둘렀다.
“억.” “컥”
그러자 문의 양옆을 지키고 서 있던 자들이 쓰러졌다.
그들을 본 다른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반응하기 전에, 회강은 발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탁.
순식간에 십 미터의 거리가 좁혀졌다. 그리고 회강은 돌연변이 늑대처럼 사내들에게 양손을 휘둘렀다.
철썩철썩.
그의 손바닥에 맞은 이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맞는 순간, 너무도 강력한 손힘에 고개가 기이하게 뒤틀려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본 다른 사내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탈색됐다.
탕탕탕!
총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죽었나?”
총을 쏜 사내가, 회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회강과 시선이 마주친다.
-끝이냐-
“히익.”
갑자기 사내의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에 엉덩방아를 찧는 그였다. 그사이, 옷만 흠집이 나고 멀쩡한 회강을 본 다른 사내들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됐다.
“괴물이다. 괴물이 부활했다.”
“도망쳐. 진화 때보다 몸놀림이 더 좋아. 이대론 전멸이라고!”
“막삼 형님은!”
“시발. 죽었겠지. 살았겠냐. 어서 튀- 컥.”
“흩어진다. 그래야 살아.”
어느새 따라붙은 회강이 공격하자,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들 모두 뿔뿔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러나, 차근차근 하나씩 쫓아가며 한방에 목을 부러뜨리는 회강이었다. 마당에서 흩어진 자들을 다 죽인 그가 돌아왔을 때, 가냘픈 사내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회강님, 저기 차 안에 인질들이 있어요.”
사내의 말에 회강이 몸을 뒤로 돌리더니, 쥐 면상의 사내를 스쳐 지나갔다.
이때, 차 안에서 액셀을 밟은 사내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부웅.
그의 시선이 백미러로 향했다.
“후후. 이미 출발했으니, 안전-”
와장창.
우두둑.
목을 잡고 부러뜨린 회강이 사내를 박으로 끄집어내서 던져버렸다. 그러자 자동차는 자연스레 움직임을 멈추었다.
빛이 뿜어져 나오는 눈으로 이리저리 둘러본 회강은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귀가 움찔거리기 시작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의 눈이 떠졌다.
“없군.”
나직이 한 마디만 내뱉은 뒤, 오른쪽으로 이동해 닫힌 차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재갈이 묶인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과 회강이 눈이 마주치자, 그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모두 살아 있으면 됐다.-
허공에 떠오른 메시지를 본 이필상의 몸이 들썩인다.
“흐흐흐흐”
그러자,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로 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맙다. 지켜줘서. 이제 내가 지켜주마.-
이내 울음소리로 변했다.
“우어어엉”
몇 시간 뒤, 박정근의 거처.
팔짱을 낀 채, 태블릿 화면에 뜬 영상을 보고 있던 회강의 고개가 돌아갔다.
-네 말대로라면, 더 이상의 추적은 없을 거다?-
쥐 면상의 사내, 김산수가 자신의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예. 제가 돈이 급할 때마다 했던 짓입니다. 다른 자들을 구하는 대신 제가 직접 하면 중개료까지 수거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이 영상을 경찰에 공개해도 괜찮다고? 하지만 네 자식들은 보호자 하나도 없이 보육원으로 보내지게 될 거다. 정말 그래도 되겠나?-
“그게... 회강님이 베푸신 은혜 덕분에 이젠 괜찮아졌습니다.”
-내 덕분이라고?-
그가 반문하자, 무릎을 꿇고 있던 김산수가 갑자기 일어서더니, 이마를 방바닥에 닿도록 절을 했다.
회강이 말없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그간의 사정을 말했다.
“회강님이 영교 무리를 없애는 과정에서, 다른 사내에게 도망간 줄 알았던 애들 어미가 구출됐습니다. 알고 봤더니, 마누라의 친한 친구가 자신을 섬 쪽 다방 직원으로 속여서 놈들에게 팔아 넘겼다고 하더군요. 이제 아내도 돌아왔고, 보상금도 많이 받았습니다. 저는 이제 죗값을 치러도 아무 부담이- 으헉.”
그가 회강이 칩을 땅바닥에 내던지자 그가 비명을 지른다.
꽈직.
회강은 망설임 없이 칩을 밟아버렸다. 심하게 떨리는 두 손으로 부서진 칩을 모으면서 김산수가 울먹거렸다.
“회강님~ 그건 제가 가지고 있던 유일한 증거 영상입니다. 최변인을 보낼 수 있는데...”
-이딴 건 소용없다. 그리고 너도 계속 최변인의 연락을 받아라. 놈에게 이번 일은 실패했으며 병원만 쳐내고 몸을 사리라는 조언도 하면 무사히 넘어갈 거다.-
“하지만-”
회강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내 힘이 부족하다. 너를 지켜줄 여력이 없어. 그리고 간신히 제 정상으로 만든 네 가정을 보전해야지.-
“하지만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눈물을 흘리는 그를 담담한 표정으로 보던 회강이 몸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메시지가 김산수 앞으로 떠올랐다.
-앞으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만 주지 말고 살면 된다. 혹시 최변인이 의뢰하면 말해라. 내가 도와주마.-
“감사합니다. 흑흑. 제가 평생을 모시겠...”
눈물을 흘리는 그를 뒤로 한 채, 회강은 누워있는 사람 중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노인을 향해 걸어갔다.
-괜찮으십니까.-
그의 메시지를 읽은 노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괜찮네만. 난 아직도 멀쩡히 걸어 다니는 자네를 볼 때마다 신기하네... 그리고...”
노인의 눈이 이필상을 향했다.
“저 녀석의 혀도 돌아올 수 있겠다는 희망도 생기고 말이야.”
-걱정하지 마세요. 살아만 있다면, 노력으로 충분히 나을 수 있습니다.-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읽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유남이 회강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메시지를 띄우다니... 자네 이거 어떻게 하는 건가. 나는 몰라도 이필상이에게는 알려주면 안 되겠나.”
그의 말에, 방 안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회강에게 쏠렸다.
회강은 난감한 표정과 함께 메시지를 허공에 띄웠다.
-요번에 받은 보상인데, 교감 요소 단계가 각인 단계까지 간 자들만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대답에 모두의 얼굴에 멍해졌다.
“헉. 그것도 각인이야.”
“시발. 나는 이제 검은색인데...”
“쩝. 부럽다.”
여기저기서 한탄이 들려오자, 회강은 쓴웃음을 짓는다.
그 사이, 그의 말을 들은 유남은 고개를 젓고 있었다.
“정말 대단해... 나도 이제 곧 교감이 확산 단계라서 기대하고 있었는데... 각인이라니. 후. 부러우이.”
-이필상도 유남님처럼 인식단계라고 들었습니다. 일 년 동안 보상을 유지하겠다고 했으니, 노력만 한다면 충분히 이른 시간 내에 가능할 겁니다. 그러면 혀가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의사소통도 원활하게 될 테니까요.-
그의 말에 이필상과 옆에서 간호하고 있던 남연희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리고 유남의 표정도 부드럽게 풀렸다.
“그래... 노력하면 되지. 그러고 보면, 나도 참 어린애같이 자네에게 투정부릴 뻔했구먼. 그럼, 나도 어서 일해야지.”
-오늘은 쉬세요. 저도 장작 정도는 팰 줄 압니다.-
“에이, 무슨 경험도 없는 자네가-”
-잊으셨습니까. 제가 진화에서 어떤 존재였는지.-
회강의 메시지를 읽은 유남이 원래 자리에 도로 앉았다.
“그렇지... 잊고 있었어. 자네가 도끼질의 달인인걸... 후. 그럼 어서 일하러 가보게나. 나는 차준엽이 가져온 식량 손질이나 하겠네.”
회강은 몸을 일으킨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도무지 쉬질 않으시네요. 저보다 더한 고집불통이십니다.-
그의 메시지에 유남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자네도 늙어보면, 가만있질 못하는 심정을 알게 될 거야. 그러니 더는 머라 하지 말게.”
회강은 쓰게 웃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럼 장작 패러 가볼까.’
그는 도끼를 들고 하얀 눈으로 뒤덮인 세상으로 나아갔다. 그 뒤로, 김산수가 허둥거리며 따라나섰다.
“회강님 같이 가요.”
*2*
오늘에서야 진화2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선택의 방으로 들어온 회강은 움찔했다.
‘뭐야... 이곳이 선택의 방이 맞나?’
과거엔 온통 하얀 정육면체 모양의 방이었다면, 현재는 원형으로 되어 있는 큰 공간에 회강이 홀로 서 있었다.
‘다들 선택의 방이 변했다는 말은 안 했는데...’
벽면에는 여러 개의 문이 있었고, 각 문 옆에는 어떤 곳인지 알려주는 명패들이 붙어있었다.
[선택] [진화] [현실] [지식] [수련]
회강은 제일 먼저 선택이라 적힌 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그의 앞으로 하얀색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곳은 시즌 1 때 선택의 방에서 나온 문들이 있는 공간입니다. 최대 네 가지밖에 선택지가 없었던 과거완 달리, 이제는 다양한 선택의 문을 통화해 미션에 재도전하시길 바랍니다. 단, 한번 올린 난도는 [업]을 소모해서 내려야 하므로 신중하게 선택해 주세요.
그 외에 다른 문들에선 다음과 같은 설명들이 떠올랐다.
[진화]
-게임 속 미션 진행 상황 및 상태창이 있는 곳입니다.
[현실]
-현실 속 미션 진행 상황 및 상태창이 있는 곳입니다.
[지식]
-그간 진화와 현실에서 쌓아온 지식을 검색할 수 있는 곳입니다.
[수련]
-진화나 현실에서 강적을 만났을 경우, 당신은 이곳에서 적과 싸우는 예행연습을 할 수 있습니다. 단, 이곳은 정보 공유를 선택한 자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공유하시겠습니까? (Y/N)
회강은 마음속으로 감탄했다.
‘전에는 일일이 찾아보기 불편했는데, 현실 미션처럼 이곳에선 볼 수 없었던 문제점도 사라졌고, 거기다 싸움을 잘 못 하는 이들을 위한 공간까지... 대단하다.’
이제야 뭔가 제대로 돌아가는 느낌이 든 회강이었다.
그가 모든 것을 읽고서 진화라고 적힌 곳을 향해 걸어가려는데, 회강의 앞에 메시지가 떠오른다.
-안녕하세요. 회강님. 살아남으신 거 축하드립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회강은 자신과 대화한 그것이 보낸 것임을 깨닫는다.
-그래, 고맙다. 너도 내 업을 많이 먹어서 살이 좀 쪘겠구나.
-호호. 글쎄요. 아직도 저는 배고파서요. 혹시 공짜로 주실 순 없으신가요?-
회강은 코웃음을 쳤다.
-훗, 어이가 없군. 그나저나 무슨 일로 온 거지? 미션 때문인가?
-그건 아닙니다. 직접 축하하려고 왔어요.-
그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축하? 무슨 축하.
-원래는 진화의 방에 들어가시면 아시겠지만, 최초이니만큼 제가 성대한 축하를 해주고 싶었거든요.-
회강은 순간 눈살을 찌푸린다.
-그냥 하지 말지. 난 그런 거 질색이다.
그의 메시지에, 갑자기 허공에서 하얀 장갑을 낀 손이 나타나더니, 검지를 흔들었다.
-노노~ 최초이니만큼 무조건 제가 직접 축하해드리겠습니다. 그럼 하나. 둘. 셋! 얍!-
펑펑.
그의 양옆에서 폭죽이 일더니, 그의 앞으로 커다란 메시지 창이 하나 나타났다.
-축하합니다. 회강님은 최초로 *인간으로의 길로 들어선*이란 호칭을 가진 유인원이 되셨습니다.
-보상으로 질문을 하나...
메시지를 읽은 회강의 눈이 한곳에 고정되었다.
‘인간으로의 길이라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상태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만져지지 않는 허상을 휘젓고 나서야, 멍했던 정신이 돌아온 회강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무서워졌다.
-이게 무슨 의미지?
-모르시겠어요? 글자 그대로 인간으로의 길로 걸어가시게 된 거랍니다.
회강은 잠시 주저하다가, 이를 악물고는 질문했다.
-그럼 인간이 아닌 길도 있다는 뜻인가?
-역시, 우리 회강님 기억은 온전치 못해도, 저 호칭에 숨어있는 다른 의미를 알아내셨군요. 네, 그래요. 인간이 아닌 길도 있답니다.-
충격적인 글에, 회강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사이 새로운 메시지가 올라왔다.
-과거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다양한 갈래로 종들이 흩어졌듯이, 현 인류도 다양한 길로 갈라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회강님도 보셨잖아요. 다른 길로 들어선 인간들을요.-
-거인을 말하는 건가.
-예. 그자들은 빠른 성장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 방식은 같은 종의 피와 살을 먹어야 하는 거였죠. 이제까지 같은 종을 먹어서 정상인 동물은 없었습니다. 모두 심한 병해 죽고, 심하면 괴상한 모습으로 변형되었죠.-
-그 외의 사람들은 나와 같은 길로 가는 거지? 인간만 먹지 않으면 되는 거 아냐?-
-최초에 대한 보상지급이 완료되었습니다. 아쉽지만,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뿅.
“야. 야!”
메시지가 써지지 않아서 회강이 직접 입으로 외쳐봤지만, 진화는 반응이 없었다.
회강은 제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는 머릿속으로 그동안 자신을 스쳐 지나갔던 이들을 떠올렸다.
‘과연... 그들은 어떤 길을 걸을까...’
그리고...
-심신이 너무 불안정합니다. 현실로 돌아가 마음을 추스르세요.-
회강은 진화 속 세상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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