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장
*3*
혜원이 회강의 집으로 들어오면서 현실에서의 위협은 사라졌지만, 진화 속은 계속해서 그들에게 위협받고 있었다.
‘끈질긴 놈들.’
회강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유인원의 머리를 바로 찬다.
퍽. 후두둑.
단번에 즉사시킨 그는 쉴 틈 없이 손과 다리를 움직였다.
털썩. 털썩.
그의 주변은 하나둘 시체로 가득 찼고, 덩달아 그의 얼굴도 붉어졌다.
마침내 마지막 한 명이 쓰러지자, 그는 크게 입을 벌려 심호흡부터 한다.
”후웁. 하. 후웁. 하“
‘호구들도 모두 무사하고, 혜원이도 괜찮군. 그나저나 이들의 공격이 점점 정교해지고 있어.’
그의 시선은 사람 세 명이 지날 만한 크기의 통로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좁은 길목의 앞뒤를 동시에 공격해 올 줄이야. 그리고...’
회강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는데, 혜원의 게가 그들 위에서 죽은 유인원을 집게발로 조각내고 있었다.
‘만약 게가 여길 통과 못 해서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면, 위에서 돌멩이까지 날아왔을 거다. 그랬다면 호구들도 많이 다쳤을 거다. 특히 호파람이 이런 지형에 이리 취약할 줄은 정말 몰랐어.’
회강은 자신의 옆에서 축 늘어져 있는 호파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호파람이 제대로 움직이려면 주변에 공간이 충분해야 했는데, 회강과 호구들 때문에 호파람은 빠르게 움직일 수 없었고, 거의 선체로 그들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다행히 두꺼운 피부와 새로운 힘을 쓸 줄 알았기 때문에 체력이 고갈됐다는 것 빼고는 문제없었다.
‘적들도 호구 중 제일 강한 호파람의 약점을 알았다. 다음에도 이런 지형에서 공격해 온다면 몇몇은 죽을지도...’
고민하는 와중에도 회강은 자신이 쓴 무기들을 회수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적의 품에서 금을 발견한다.
‘고작 이딴 똥 때문에 다른이를 죽이려 들다니...’
부스스스.
바로 부숴버린 회강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상대의 머리에 창을 꽂았다.
푹.
‘맘 같아선 대기했다가 계속 죽이고 싶은데... 미션만 아니면 정말... 잠깐. 진행 중인 미션이 뭐였지?
회강은 메시지창을 불러왔다.
[장거리 이동] [개인] [빙하기 보상 보너스]
<내용>
-쫓겨나서, 혹은 너무 능력이 뛰어나서 등등의 이후로 벌어진 중세시대까지 사람들의 장거리 이동은 목숨을 걸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성공 조건*
1. 최소 지형 네 군데를 거쳐야 한다. (진행율 50%)
2. 최소 오십만 걸음 떨어진 곳까지 가야 한다. (완료)
3. 최소 백 가지 넘는 새로운 지식을 얻어야 한다. (진행율 83%)
4. 오로지 혼자서 여행을 해야 한다. 단, 호구는 같이 가도 된다. (회강님의 호칭엔 공존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진화가 중재한 돌발 미션을 진행 중일 때는 미션과 관련된 자와 함께 활동해도 됩니다. 다음부턴 알려드리지 않으니 기억해 주세요.)
...
’그래... 장거리 이동 미션. 이걸 잊고 있었어.‘
회강의 눈동자가 조금씩 아래로 향했다가 한 곳에 멈춘다.
’최소 사흘은 해안지대에서 서식지를 만들어 견뎌야 하는-‘
”카카.“
뒤에서 혜원의 목소리가 들리자, 회강은 생각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거기엔 어느새 원기를 회복한 호파람의 등 위에 짐을 올리기 위해 끙끙대는 혜원이 있었다.
”카카. 카카.“
’이런... 일단 여길 벗어나서 고민하자. 지금은 무기를 회수하고 이동하는 데 전념해야 해.‘
회강은 달려가서 혜원이 들고 있는 짐을 대신 들어줬다.
잠시 뒤.
회강일행은 피비린내가 가득한 곳에서 벗어난다.
좁은 통로를 벗어나자 도착한 장소에 들어선 회강은 얼굴을 찌푸렸다.
척척.
’같은 해안지대는 맞는 것 같은데, 여기는 왜 이렇게 땅이 질척거리는 거야.‘
걷는 와중에도 푹푹 들어가고 달라붙은 것들에 의해 움직임이 제한되었다. 이는 회강뿐만 아니라, 일행 대부분이 공통으로 겪는 어려움이었다.
단지, 끝이 날카롭고 기다란 여러 개의 다리를 가진 게만이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혜원이 어려워하자 집게로 잡아 자신의 등 뒤로 올려놓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게의 이름이 발발이라고 했던가... 부럽군.‘
회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사방이 죄다 이러네. 저기 끝까지 가야 하는데 저녁때쯤에 도착하면 다행이겠군.‘
저 멀리 보이는 금빛 해안가를 보며 회강은 힘차게 다시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푹. 철퍼덕.
예상보다 훨씬 더 깊게 들어가는 바람에 그는 앞으로 엎어지게 된다.
’젠장.‘
그가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얼굴에 묻은 흙은 잡았을 때, 멀리 있던 혜원과 발발이가 다가왔다.
”까까까.“
화가 난 그의 귀로 혜원의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회강은 흙을 세게 움켜잡던 손을 풀고 웃으려 애썼다.
’적응하느라 힘든 아이가 웃는-‘
갑자기 땅으로 깊숙이 들어간 오른발에서 물컹한 게 느껴지자, 회강은 반사적으로 전신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의 양옆으로 날카로운 검은빛을 띤 타원형 물체가 나타나 그의 허리를 공격했다.
콱.
”컥.“
”꺄악!“
간신히 양손으로 막는 데 성공한 회강은 강한 힘에 입술을 깨물었다.
탕탕탕.
그사이, 회강이 공격받자마자 호구들과 혜원이 타원형 물체를 공격했다.
하지만, 이리저리 금이 갔을 뿐, 회강을 조이는 힘은 줄어들지 않았다.
’젠장, 아까 유인원들이랑 싸우느라 힘만 소진하지 않았어도...‘
그의 양팔을 부들부들 심하게 떨리고 있었으며, 날카로운 날을 잡은 손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점점 다가오는 두 개의 날에 회강이 절망 어린 눈빛으로 그것을 보고 있을 때, 그를 구원해주는 손, 아니, 집게발 길이 나타났다.
꽈득. 꽈득.
양쪽을 약한 흰 빛으로 빛나는 집게발로 잡을 발발이의 눈이 반짝였다.
쩍.
순식간에 양옆으로 벌어지더니, 회강과 그보다 두 배만 한 타원형 물체 두 개, 그리고 검은흙이 묻은 흰 물체가 대지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회강은 벗어나자마자 놈을 지켜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건, 조개잖아. 매일 식사 거리였던 조개에게 죽을뻔하다니...‘
심하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는 사이, 발발이가 끝내 조개껍데기를 분리하는데 성공한다.
조개가 두 개의 촉수로 반항을 시도했지만, 그것은 호파람과 호돌이들에게 잘렸고, 혜원이 찌른 창에 검은 부분을 맞더니 몸을 축 늘어뜨렸다.
상황이 끝나자, 조개껍데기를 떨어뜨린 발발이가 빠르게, 조개 사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양 집게발로 살을 헤집기 시작했다.
’발발이가 먹잖아. 저거 먹어도 되는 건가.‘
꿀꺽.
그의 머릿속에는 너무 쫄깃했던 조갯살이 가득 찼다.
얼마 뒤.
그 자리에서 하얀 연기가 하늘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조개 형태의 포식자도 있다.
-익혀 먹었을 때가 더 맛있으며, 일반 조개보다 같은 양에 두 배 더 많은 포만감을 올려준다.
-조개 포식자의 껍질은 검은 대지에서, 눈밭 위에 썰매와 같은 역할을 한다. 또한, 탄성이 좋고 단단해서 방어용으로 쓸 수 있다.
-검은 대지는 다양한 형태의 먹이와 포식자가 공존하는 곳이다.
-검은 대지와 조개 포식자의 껍질로 만든 서식지는 만들기 쉽고 강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조개 포식자의 옆구리엔 돌멩이가 있는데, 매번 다른 모양 다른 색깔을 지닌다. 그중 검은색 돌멩이 가루를 식물에게 뿌리면 영양제, 붉은색 돌멩이 가루를 육지에 서식하는 괴물에게 뿌리면 독성물질 작용을 한다.
*4*
사실 회강은 메시지만으로 생활하는 게 좋았다.
생각하는 데로 바로바로 내보낼 수 있고, 혹시 자신이 잘못 작성했는지 다시 한 번 더 살펴볼 수 있어서 굳이 언어 능력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유치원생이 보는 앙증맞은 글자판을 하나씩 짚으며 발음연습을 시키고 있는 남혜원의 모습에 웃음만 나왔다.
”훗.“
”아저씨! 웃지 말고 연습하자고요.“
-나는 메시지만으로도 충분해 그러니-
”하지만, 메시지를 쓰지 못할 경우도 있으면요.“
-그땐 말하면 되지. 천천히 신경 써서 말하면 충분히-
”천천히 신경 써서 말할 상황이 아니라면?“
-그런 상황은 어차피 말보단 바로 행동으로 옮겨야 돼. 너도 말보단 행동을-
”아저씨! 평소에 연습해두면 좋은 거잖아요. 과거 영상 보면 목소리도 어떤 여자도 한 번 들으면 사르르 녹을 정도로 좋던데.“
-난 네 귀를 행복하게 할 의무는 없다.-
”저도 늙다리 아저씨 목소리에 큰 관심 없거든요.“
-그럼, 굳이 이런 건 안 해도-
”아저씨!“
-그만, 귀청 떨어지겠다. 계속 진화하다 보면 나아지겠지. 그러니-
”아저씨가 방송에서 그랬잖아요. 몸이 불편한 부위를 아무리 힘들어도 꾸준히 움직여서 고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소용없다고요. 설마 그게 다 거짓말이었던 거예요?“
”음...“
그들 뒤에서 과일이 담긴 쟁반을 든 이미소가 나타났다.
”오늘은 그만해.“
”아줌마!“
”너 찾느라 회사 업무가 밀려서 며칠 동안 제대로 잠도 주무시지 못한 분이야. 오늘은 이만 쉬게 하자. 응?“
”치... 알았어요.“
혜원의 머리를 쓰다듬은 이미소가 포크로 사과를 찍어 회강에게 건넸다.
”자, 이 집 주인인 회강님부터.“
-고마워.-
”그리고 우리 혜원이.“
”고맙습니다.“
아삭. 아삭.
이미소는 과도를 들고 오렌지를 자르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회강이 메시지를 띄웠다.
-권래나님 몸은 어때?-
”이제는 혼자 집에서 생활하실 수 있을 정도로 나아지셨어요.“
-다행이군. 그러고 보면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아.-
”네?“
-오 년 전만해도 권래나님이랑 이미소님이랑 사이가 많이 안 좋았잖아.-
그의 메시지를 읽은 이미소가 움찔한다.
”그... 때 그렇게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어요. 그렇다고 좋지도 않았지만...“
-뭐, 권래나님 성격을 떠올리면, 그분을 모시는 미소가 정말 대단해. 보살이야. 보살.-
”아... 그래요.“
-아무튼 권래나님을 보살펴야 할 텐데, 다음부턴 같이 오는-
그 둘을 번갈아 보던 남혜원이, 갑자기 강회강의 다리를 꼬집는다.
-왜 그래.-
”멍청이!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아니 이유를 말해줘야-
남혜원이 회강의 메시지를 다 읽지도 않고 이미소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줌마 이런 남자에게 붙어있지 마. 내가 이런 놈 만나봐서 아는데, 끝까지 답답하게 굴다가 떠나버린다니까. 아야. 아저씨!“
남혜원에게 꿀밤을 먹인 회강이 메시지 띄웠다.
-고작 열다섯 살밖에 안 되는 녀석이 뭘 안다고-
”연애 경험은 아저씨보다 위거든요.“
-나도 연애 경험이-
”모태솔로라고 방송에서 이강구 오빠가 말했거든요. 그 나이 먹도록 모태솔로라니 추잡해!“
”야!“
회강이 소리쳤지만, 남혜원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왜요 왜! 메시지가 아닌 말로 한 번 해보세요. 그러면 어떤 변명이라도 믿어 줄 테니까. 예전처럼 달달하게 말해 보시라니까요.“
”으... 이. 긍구...“
”풋.“
강회강의 모습에 이미소에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그때, 갑자기 현관문으로 회강이 고개를 돌렸다.
띠. 띠띠띠. 쾅.
부서질 듯 열린 현관문, 거길 통과한 김산수가 새파래진 얼굴로 회강앞에 도착한다.
”헉.헉. 회강님 큰. 큰일 났습니다.“
심상치 않은 그의 모습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고...
회강의 메시지가 허공에 떠올랐다.
-무슨 일이십니까?-
”사. 사람들이 지금 이리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호. 혹시 저와-“
남혜원에 말에 김산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네가 아니다. 돌. 돌을 달라고 아우성이야.“
-돌이라면 괴물에게서 나온 돌을 말하는 겁니까?-
”예. 그 모아놓은 돌이 있을 거라고 사람들이...“
”음...“
회강이 굳게 입을 다물자마자, 그들의 귓가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돌을 주세요.“
”회강님 변이되기 직전의 자식이 있습니다.“
”아이가 변이되기 직전입니다.“
”아버지를 살려주세요.“
”회강님!“
”강회강님!“
김산수가 심하게 떨리는 눈동자로 회강은 바라봤다.
”회강님...“
”큭.“
회강은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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