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장
사흘 뒤.
회강이 휘두른 반달돌칼에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벌이 바닥에 떨어졌다.
“헉. 헉.”
숨을 진정시키며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두 무사하군.’
매캐한 연기 사이로 바닥에 떨어져 있는 벌들이 보였다. 꿈틀거리는 벌들을 보며 회강은 턱 끝에 맺혀있는 땀을 닦았다.
‘운이 좋았다.’
도망치던 와중에 화산 폭발이 일어나서 돌멩이가 날아오지 않았다면, 벌들의 공격에 반수는 차가운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우선 잔불부터 끄자.’
그는 넓적한 돌 판을 들고 땅을 뒤집기 시작했다. 그러자 호구들도 제각기 자신들의 발 등을 이용해 땅을 헤집었다.
매캐한 연기가 점점 주변에서 사라지고 불이 다 꺼지자, 그제야 회강들은 자리에 주저앉는다.
*함께 벌을 처리해주세요* 성공!
<보상>
1. [업] 10 +
‘세 번째니 삼십 일을 얻었구나. 저들을 보니... 이 짓을 더 해야 할 것 같은데....’
회강은 벌들의 사체를 모아놓고 함박웃음 짓는 거인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뭐... 이해 못할 건 아니지. 대화를 색으로 하는 자들이니까.’
-색으로 대화를 나누는 새로운 의사소통 방식을 발견했다. 이 방법은 색을 번갈아 선택해서 그 색을 띤 물체를 가리키고 손가락으로 형체를 만들어서 동사를 만들어 소통한다.
그래서 그들은 꽃과 식물을 항시 온몸에 두르고 있었고, 색다른 색이라도 발견하면 그 즉시 그것을 얻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한다.
‘이 때문에 벌에게 쫓기던 중이었지. 벌들의 색이 참 다양하거든.’
다양한 색의 몸통을 지닌 벌들의 몸통을 둘러싼 껍질은 꽃과 나뭇잎보다 오래가고 색이 진해서,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 충분히 탐을 낼만 한 물건이었다.
더군다나 그들이 색에 미칠 만한 이유는 또 있었다.
이들은 한 달마다 수장을 뽑는데, 그 수장을 뽑는 기준이 두 가지가 있었다. 가지고 있는 색의 다양성과 내구성이 그 기준인데, 이 두 기준으로 거인들이 각자를 비교해 수장을 뽑는 거였다.
수장이 되면 제일 맛난 꽃들이 뭉쳐있는 중심을 차지할 수 있고, 어디로든지 이동할 수 있다. 나머진 순위대로 지정된 꽃밭으로 이동해서 머물러야 했는데, 회강이 만난 무리는 저번에 꼴찌 해서 외곽에 밀려난 상태였다.
‘거의 꼴찌만 해왔다고...’
원래 회강은 그들의 그런 모습을 말리고, 그냥 안전하게 지내다가 지식을 교환한 뒤 이동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영역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인들의 모습을 보고, 잘못하면 공존 호칭이 사라질 수 있어서, 회강은 맨 처음엔 머물고 있다가 미션만 완수한 뒤 조용히 우회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맨 처음 쫓기게 된 벌들 무리를 정리하는 순간 뒤바뀌게 된다.
‘화산만 아니었어도...’
그의 시선은 새롭게 나타난 화산을 보고 있었다. 늪과 강이 있는 밀림에 가까운 숲이라서 불은 번지지 않았지만, 화산 쪽으로 가길 거부하는 호구들 때문에, 꽃밭을 지나서 위로 올라갈 수밖에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회강은 적극적으로 거인들이 색 수집하는 걸 도와주기로 한다.
*일등 하고 싶어요.*
<내용>
-원래 이곳은 모두의 이동이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하지만, 새로 유입된 유인원들의 도움을 받은 자들이 일방적으로 규칙을 만들고 이동을 통제한다.
반항이 심해지자, 그들이 내세운 규칙을 완화했지만, 애초에 유인원들의 도움을 받는 자들이 유리한 게임이었다.
현실과 비슷한 상황에 지칠 무렵, 그들 앞에 회강님이 나타났습니다.
“일등하고 싶어요. 도와주시면 뭐든지 할게요.”
<성공 조건>
1. 이들 중 한 명을 다음 수장으로 만들어 줘야 한다.
2. 죽어도 상관없으나, 아이는 지켜 달라.
<성공 보상>
1. 회강님의 소원을 하나 들어준다.
회강이 메시지창을 휘저어 사라지게 했다.
‘이제 곧 밤이다. 밥 먹고 자야지.’
흥건했던 땀도 강한 바람에 모두 날아갔고, 거인들도 정리를 마치고 모닥불을 피우고 있었다.
“우가가.”
‘으이구, 삭신이야.’
이리저리 몸을 두드리며 일어난 회강은 호파람에게 가서 등에 실린 짐에서 식량을 꺼낸다.
참깨 열매즙을 발라 구운 물고기가 주머니에서 나오자마자, 구수한 향이 사방에 퍼진다.
꿀꺽.
어느새 향기를 맡은 거인 중 아이가 그의 곁에 서 있었다. 그리고 아이를 데려온 거인도 코를 벌렁거리더니 휘둥그레진 눈으로 고기를 바라봤다.
그들의 존재를 알면서도 회강은 무시했다.
‘어제 고기를 공짜로 준 이유가 있지...’
회강은 이제까지 의사소통 미션을 제대로 진행하지 못했다.
사흘이나 지났음에도 진행하지 못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거인들은 새로운 걸 배우려 하지 않는다.
-이 무리는 색이 자신보다 적게 보유한 자의 말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회강이 그들의 의사소통 방식은 빠르게 익혔지만, 그들이 배우지 않는 이상 두 번째 의사소통 방식으로 등록할 수 없었다.
미션도 뛰어난 관찰 실력을 지닌 회강이 그들의 습성을 이해하고 다양한 색을 지닌 조개껍데기를 보여줘서 받을 수 있었던 거지,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이들의 오만해 보이는 표정과 태도에 싸움이 진즉에 일어났을 것이다.
‘한 번 이 맛에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지. 이걸 이용해 아이와 아이의 여성들부터 차근차근 의사소통을 알려 줘서 익히게 해야 한다.’
이미 회강은 짐승이나 유인원이나 맛있는 먹이나 희귀한 물건으로 상대를 유혹하면 넘어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회강은 순간 입가에 맺힌 비릿한 미소를 지우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우끼?”
먹이를 가리킨 그의 모습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는 두 거인에게 회강은 반복해서 먹이를 가리키고 먹는 시늉을 했다.
잠시 뒤.
“우끼?”
“으... 기...”
회강은 자신을 따라 하는 아이를 보며 미소 지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날, 아이 네 명과 여성 한 명이 그의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4*
이제는 구름이라고 불리는 옛 박정근의 집터 주변 산속에서 회강은 흡혈덤불 위로 주황빛 액체를 뿌렸다.
쏴아악.
처음에는 작은 부분에 검품이 생겼지만, 어느새 그 범위가 급속도로 번졌다.
삽시간에 쭈그러드는 흡혈 덩굴을 보며 김산수는 손뼉을 마주친다.
짝짝.
“효과가 있습니다. 왕류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의 칭찬에도 왕류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이제 하나 처리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진짜 죽은 건지는 몇 년은 넘게 관찰해야 알 수 있습니다. 식물 중엔 여건만 되면 죽었다가도 다시 자라는 경우도 있거든요.”
-맞는 말이다. 우선 일주일 동안 실험해서 효과가 있다면 발표하자.-
“일주일이요? 너무 짧은 건-”
-변이된 조개를 키우는 데만 한 달이 소요된다. 거기다 진주가 만들어지는 것은 추가로 한 달이 소요되고. 그사이 문제가 생기면 계속해서 정보를 알려주면 된다.-
“만약,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거라면-”
-우리나라 여론이 이상하게 흐르고 있다. 꽃 괴물을 살려두자는 말들이 나돌고 있어.-
“아마 마석에 대한 새로운 쓰임이 발견돼서 그런 거겠지요. 발전 효율이 석유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들었습니다. 석유 한 방울도 나지 않는 우리나라에선 단비 같은 소식 아닙니까.”
“맞습니다. 꽃 괴물을 통해 지속해서 안정적인 마석을 얻는 방법이니, 그들의 주장도 틀린 건 아닙니다. 줄어드는 인간의 영역이야 건물을 높게 지으면 되는 일이고, 농지에 나타난 흡혈덤불들은 제거하고 산에 위치한 꽃 괴물은 놔두는 게-”
유의명과 김산수의 말에 회강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꽃 괴물이 없는 곳에서도 괴물들이 꾸준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히,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해안가에 나타나는 괴물들 처리만 잘해도 충분해. 굳이 좁은 땅덩이에서 꽃 괴물이랑 같이 살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저들 말대로 나중에 마석의 용도가 더 밝혀지거나, 쓰임이 많아진다면 수입해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혹시, 방벽을 변화시킨 게 꽃 괴물이 아닌가 의심하시는 겁니까?”
김산수의 물음에 회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미 상하이의 모든 건물이 붕괴하지 않았습니까. 진화 안에서나 보던 식물들과 괴물들도 나타나고 있고요.-
“하지만, 동식물의 변화는 이미 꽃 괴물이 없는 곳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걱정하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유의명에 말에도 회강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그런 회강을 바라보던 왕류가 입을 열었다.
“형님도 변화가 너무 빨라서 걱정이시군요.”
그의 말에 회강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옆에 있던 김산수가 왕류를 바라봤다.
“변화가 빠르다니요? 꽃 괴물 주변이 더 빠르게 변화하는 걸 두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KS 계열사 연구진과 함께 조사했는데, 꽃 괴물 주변은 동식물뿐만 아니라 모든 게 달라지고 있습니다. 동식물들만 변하고 있는 평범한 곳들과 다르게 반경 오 킬로미터 이내의 곳들은 전체가 변하고 있었습니다. 인간들은 조사하지 못 해서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가 말을 흐리고, 김산수와 유의명의 얼굴이 굳어졌다.
“인간까지 변한다면 없애야겠지요.”
“예...”
“사실 이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진화 정말 인터넷 속 가상세계가 맞을까요?”
왕류의 물음에 모두의 몸이 움찔한다.
“회강님이 말해주신 지식으로 만들기는 했지만,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실험한 결과는 회강님이 말해준 것과 같았습니다. 누가 이미 알고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습니다. 이걸 만들어내는 순간, 진화에서 저에게 메시지를 하나 보내왔거든요. 물론, 회강님과 혜원이에게도 갔지만...”
그가 팔을 내밀어 보여준 태블릿 화면 안에는 한 줄의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최초로 현실에서 흡혈덤불 전용 제초제를 만들었다. 당신에게 보상으로...-
“저는 이것을 보는 순간, 여러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습니다. 진화가 현실이라면? 그곳처럼 세상이 변화하고 있는 거라면? 그리고... 우리도 변화하는 거라면 최후엔 진화 속 모습으로 변하는 걸까...”
왕류는 두 팔로 자신을 감싸 안았다.
“저는 진화에선 이보다 더 볼품없는 몸을 지니고 있습니다. 회강님이나 다른 분처럼 용기 있게 미션 난이도를 올리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두렵습니다. 세상이 변하는 것도... 제가 변할 미래의 모습도... 제 가정이 사실이라면...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고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새파랗게 질린 김산수와 입술을 깨문 유의명이 회강의 눈동자에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진짜라면 모두 없애브리면 됩니다.”
회강의 입에서 나온 낮은 목소리에 나머지 사람들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일주일 뒤.
회강은 북한산 자락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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