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장
*1*
눈을 뜬 회강이 제일 먼저 본 것은 김산수의 얼굴이었다.
그는 리장수와 함께, 뭔가를 보고 있었는데, 그의 표정이 너무 어두워서 회강은 선뜻 그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도대체 뭘 보고 저러는 거지.’
회강이 궁금한 마음에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큭“
격심한 통증이 배에서 느껴지는 바람에 다시 주저앉고 만다.
”회강님 일어나셨군요.“
환한 얼굴로 다가오는 김산수와 리장수. 그들은 일어서려는 회강에게 손을 뻗는다.
-제 손을 잡으세요.-
”제 손도요.-
-고맙습니다.-
그들의 부축을 받아 상체를 일으킨 회강이 그들에게 메시지를 띄웠다.
-벽에 균열이 없는 걸 보니까 아직 연구소 내부인 것 같은데, 몇 시간 동안 제가 의식이 없었습니까?-
“한 시간 정도 없었습니다. 그사이, 저희는 회강님이 깨어나실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뒤에서 괴성이 들려와서 어쩔 수 없이 움직이게 됐습니다.”
-괴성이라 표현했다면 이제까지 듣지 못한 소리였겠군요.-
“예. 남성의 함성이었는데, 그게 회강님이 계속해서 들었다는 놈의 목소리가 아닐까 생각하니 섬뜩하더군요. 그래서 리장수님과 상의 끝에 이동하기로 한 겁니다.”
-앞뒤 모두 불확실한 상황이라면, 더 나은 곳으로 이동하는 게 맞는 결정이지요. 잘하셨습니다.-
그의 칭찬에 김산수가 머리를 긁적이는 사이, 회강이 리장수에게 메시지를 띄웠다.
-다들 표정이 심각해 보이는데, 뭐 때문에 그런 겁니까?-
-꽃을 보았습니다.-
-꽃이요?-
-예. 그것도 삼 등급 괴물과 아주 유사한 형태의 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당장 이동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게. 꽃이 아주 작습니다. 거기다 말을 할 줄 알아서...-
‘꽃이 말을 한다고?’
회강의 시선이 그들이 보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곳을 본 회강의 눈이 동그래진다.
‘정말로 작은 꽃인데?’
이리저리 부서진 실험 장비들이 틈바구니로 꽃 하나가 튀어나와 있었다. 수십 미터의 키를 지닌 꽃 괴물들을 보다가, 삼십 센티미터 정도 되는 꽃을 보니, 마치 만화 속의 한 캐릭터를 그대로 재현해놓은 듯했다.
‘꽃 중앙에 앳된 남자아이의 얼굴이 있군.’
그 얼굴은 겁먹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싼 군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작 괴물은 저 꽃인데... 우리가 악당이 된 느낌이야.’
그가 쓴웃음과 함께, 메시지를 띄웠다.
-말은 간단한 의사소통만 할 줄 아는 겁니까?-
-아닙니다. 생각보다 능숙하게 말을 잘합니다.-
-능숙하게요?-
-예. 그것도 남조선 말을 할 줄 알더군요.-
리장수의 말에 회강의 시선이 감산수에게 향했다. 회강과 마주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잘합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북한 말도 이렇게 중간에 통역해주는 진화 시스템이 없었다면 대화도 원활하게 되지 못할 만큼 많이 벌어졌는데요. 대화 상대라고 해봤자 북한인들밖에 없지 않습니까?-
“저도 그게 이상해서 물어봤더니, 깨어났을 때부터 가능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우리나라에서 납치된 아이가 이곳까지 왔고, 실험 때문에...”
“음...”
‘실험이라...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우리나라 전역에 꽃 괴물을 뿌려놨을 놈들이야. 실험이라기보다...’
-깨어난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두 시간 전에 깨어났답니다.-
-그렇다면 실험이 아니라 사고에 의해서, 다른 지역처럼 생겨난 게 아닐까요? 저는 그게 더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데.-
“사실 저희도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전 꽃 괴물들과 달리, 말을 너무 잘합니다. 우리 인간들과 다를 바 없다니까요.”
‘말을 잘한다라... 그렇다면 지능도 우리와 다를 바 없다는 거고... 꽃 괴물들도 기생충을 통해서 배우는 마당에 한 번에 그것을 이룩한 존재가 있다는 것은...’
회강의 시선이 잠시 꽃을 향했다.
이제는 아예 눈물까지 글썽거리는 모습에 군인들이 사나운 시선을 거두고 있었다. 그리고 엄청 짧은 순간, 그 꽃에 맺히는 미소를 본 회강은 다시 시선을 김산수들에게로 돌렸다.
-저 꽃이 우리를 속이고 있다고 보시는군요.-
그의 말에 김산수와 리장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는 오히려 저 녀석이 우리를 공격하게 한 원흉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리장수님의 말에 동의한 저는 저 녀석의 처리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회강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회강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죽여서 후환을 없애야- 잠깐, 만약에 우리가 하는 추측들이 모두 틀렸다면 어찌해야 하는 거지.’
그의 머릿속에서 거인의 모습을 닮는 바람에 총을 맞고 죽은 피해자들의 사체들의 모습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는 죽이지 않았으면 죽었을 때니까.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그랬지... 만약 저 괴물도 피해자에 불과하다면 섣불리 죽여선 안 된다. 하지만...’
고심하던 회강의 눈에 꿈틀거리는 덩굴이 보였다.
‘덩굴도 크기가 생각보다 적군. 하긴 덩치가 작으니 다른 것들도 모두 적들 수밖에. 아 그게 있구나’
회강의 얼굴이 밝아지고, 김산수와 리장수의 앞으로 메시지가 하나 떠올랐다.
-좋은 방법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저 녀석을 데려가는 겁니다. 정말로 저 녀석이 원흉이라면 오히려 우리에게 좋은 일이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 두 사람의 눈이 동그래진다. 특히, 리장수가 손뼉을 치며 아주 좋아했다.
짝짝.
-놈을 인질로 삼자는 뜻이군요. 앞뒤로 괴성이 들리는 이 상황에 맞는 방법 같습니다. 저는 무조건 찬성합니다.-
환한 리장수의 표정과는 상반되게 김산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회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뽑는 순간 죽거나, 죽는다고 생각한 놈이 괴물들을 부르면 우리가 위험해집니다. 차라리 바로 죽여 버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제힘도 어느 정도 회복했고, 말하는 가운데, 낌새가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죽여 버리면 됩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진짜로 피해자일 수도 있고, 원흉이라면 상하이와 관악산에 있는 꽃 괴물을 처리할 방법을 알기 위해선, 저 녀석을 대상으로 실험하면 좋은데, 여기서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괴물들은 우리가 개성으로 가기 위해 이동하다가 어차피 만날 존재들입니다. 어쩌면 이미 저 녀석이 불렀을 수도 있으니 그건 제외하고 생각해보세요.-
“음... 그렇다면 저도 찬성하겠습니다만, 이번 사안은 모두의 목숨이 걸린 일이니 군인들에게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저도 찬성합니다.-
-맞아요.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두 분이 의견을 모으는 동안 저는 잠시 꽃과 대화를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예.”
“읏차.”
회강은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꽃에 다가가자, 울상을 짖고 있는 꽃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눈을 마주치자, 회강은 미소를 지으며 한 손을 들어 흔들었다.
-안녕-
“안녕하세요.”
‘존댓말까지 한다고?’
눈에 이채를 띤 회강이 메시지를 적었다.
-글도 매우 잘 읽는구나, 깨어나자마자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서?-
“네. 그게 특이한 건진 모르겠지만, 눈을 뜨자마자 저는 그럴 수 있었어요.”
-깨어났을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니?-
“사람들이랑 이상한 것들이 서로 싸웠어요. 이상한 것들이 이기고 난 뒤에, 사람들을 먹거나 끌고 저쪽으로 사라졌어요.”
꽃이 잎사귀로 가리킨 방향을 바라본 회강. 그의 얼굴은 살짝 굳어졌다.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인데-’
“걱정하지 마세요. 이곳까지 오실 정도면 저곳으로 간 괴물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꽃의 말에 움찔한 회강이 꽃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마치 내가 걱정하는 게 뭔지 아는 듯하구나.-
“조금 전에 저 두 아저씨가 꼬치꼬치 캐물었거든요.”
‘눈치까지 빠른 녀석이군. 인간과 다를 바 없다더니...’
회강이 잠시 메시지를 입력하지 못하자, 녀석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저는 어떻게 되는 거죠? 혹시 죽일 건가요?”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히는 모습에도 회강은 표정 변화 없이 꽃 괴물을 바라봤다.
-맨 처음에는 죽이려고 했다. 너도 우리를 보자마자 죽음을 생각했을 텐데?-
“네... 사실 사람 한 명이 저를 보자마자 죽이려고 했거든요. 그때 갑자기 뒤에서 이상한 것들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죽었을 거예요.”
‘마치 우리 양의와 비슷한 표정- 회강아 정신 차려라. 눈앞에 있는 건 괴물이다. 우리랑 같은 인간이 아니야.’
마음을 다잡은 회강.
-내 제안은 하나다. 우리와 함께 떠나자. 그러면 된다.-
“떠나요?”
녀석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다.
“하지만, 저는... 식물인데요. 벗어나면 죽지 않을까요?”
-그건 모르지. 애초에 식물이 말은 한다는 것부터가 이상하지 않니?-
“그건 그렇지만... 거부하면 죽겠죠?”
-너와 똑같은 종에 의해서 수천 명이 죽어갔기 때문에 어쩔 수 없구나.-
“그렇다면... 같이 가겠어요.”
꽃과 대화하는 사이, 다가온 김산수가 입을 열었다.
“모두 찬성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회강이 꽃을 바라본다.
-마음에 준비는 됐다면 말해라. 뿌리, 아니 밑 부분을 조종할 수 있으면 최대한 힘을 빼라.-
그의 메시지를 읽은 꽃의 얼굴이 굳어졌다.
“후.”
한숨을 길게 내쉰 꽃이 눈을 감았다.
“준비됐어요.”
‘그렇다면 나도...’
그가 천천히 손을 내밀었고,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옅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와락.
꽃의 줄기를 움켜잡자. 꽃이 부르르 떠는 게 느껴졌다.
‘길게 고통을 주지 말고 바로 뽑자. 하나, 둘, 셋!’
훅.
털썩.
“헉”
김산수의 신음이 주변에 울려 퍼지고, 엉덩방아를 찧은 회강은 부릅뜬 눈으로 한 곳을 바라보았다.
‘발... 꽃에 발이 있다니!’
그곳엔 두 개로 뭉친 발 모양의 뿌리가 버둥거리고 있었다.
- 작가의말
아자아자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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