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십오 분 뒤.
긴급 회의결과 일행 모두가 한꺼번에 한곳으로 움직이는 것은 좋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각자 나눠질 장소를 정한 뒤, 나갈 준비까지 끝마치고 다시 한곳으로 모인 그들이었다.
“우리도 이제 쫓긴다고 봐야 해. 다행히 이 동네와 무관한 곳에다 사업장을 만들어놨으니 망정이지, 어쩌면 그것도 버릴 뻔했어.”
“그럼 회강님은 그곳으로 준엽씨와 함께 가시겠다는 거죠.”
남연희의 물음에 회강이 눈동자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의 대답을 본 이필성이 입술을 씰룩거렸다.
“준엽만으로는 불안하니, 차라리 제가 같이-”
“그건 안 될 말일세. 자네가 여기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회강님의 말대로 최소한의 인원으로 은밀하게 이동하는 것이 맞아.”
유남의 말에도 이필성은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거긴 산속입니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일반 늑대라면 준엽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그 이상의-”
그의 말에 발끈한 차준엽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도 강화 늑대까지는 상대 가능해! 절대 문제가 없다고. 시간이 없는데 이미 결정된 것 가지고 추잡스럽게.”
“뭐! 너는-”
“그만 해요. 그러다 대문 쪽에서 몰래 우릴 엿듣고 있으면 큰일 나요.”
“연희 말이 맞아. 그만 싸우고, 나는 준엽이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나는 믿네. 그나저나, 혜원 어미는 개구멍 지나갈 수 있지?”
유남의 말에 푸짐한 몸집의 아줌마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예. 간신히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유남이, 짐을 들고 그를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자자,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나가는 거야. 총 세 무리를 흩어지고, 남연희와 여인들은 제일 안전한 곳으로 가고, 우리는 작업장으로, 그리고 회강님과 차준엽은 비상용 차를 이용해서 은신처로 이동하기로 했으니, 각자 눈인사는 해두라고. 언제 다시 볼지 모르니까.”
그의 말에 사람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어깨를 토닥이거나 작게 응원의 말을 전했다.
유남이 남연희에게 말했다.
“나가면 정찰조가 미리 봐둔 길을 알려 줄 테니. 목적지까지 이동하면 문자 보내고. 그 뒤엔 핸드폰은 바로 폐기한 뒤에, 전에 적어둔 번호로 새로 만들어. 꼭-”
“몇 번을 말씀하세요. 걱정하지 마시고, 꼭 무사하셔야 해요.”
“그래. 알았으니 어여가.”
유남의 손짓과 함께, 남연희는 여인들과 아이들을 데리고 창문을 넘어갔다.
십 분이 흐르고,
나머지 사람들 모두 어두운 골목으로 나와 있었다.
유남이 회강에게 다가가, 그의 오른손을 잡았다.
“회강님 덕분에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탈출부터 정착자금까지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허연 머리로 고개를 숙이는 그의 모습에 회강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렸다.
그것을 보던 유남이 싱긋 웃더니, 차준엽에게 말했다.
“잘 부탁하네.”
“유남 어르신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길까지 숙지했고, 식량도 두둑이 챙겼기 때문에, 은신처가 여의치 않으면, 둘이서 자동차 여행만 다녀도 한 달은 넘게 시간을 끌 수 있습니다.”
“그래... 네가 그리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차준엽이 고개를 숙였다.
“가보겠습니다.”
“그래.”
“회강님 잘 모셔라. 문제가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어.”
“지랄. 걱정 붙들어 매라. 그때 조폭 끄나풀 때만 빼곤, 요리조리 눈치 잘 보는 나니까.”
“그놈의 자신감도 좀 죽이고.”
“알았어. 나중에 보자.”
“... 조심해라.”
서로를 지긋이 보던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회강이 탄 휠체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함박눈이 내리는 추운 밤.
모두는 그렇게 뿔뿔이 흩어진다.
시골 동네로 봉고차 한 대가 들어왔다.
천천히 이동하던 차 안에는 차준엽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운전하고 있었다.
“회강님 말씀대로, 텅 빈 동네군요. 여기가 우리나라 최초로 거인이 출몰했던 곳이라더니. 결국, 이렇게 폐촌이 돼버렸네요.”
그의 말에 회강의 시선이 외관이 부서진 마을회관을 바라보았다.
’저 건물 옥상에서...‘
공포에 질린 채 울부짖으며 물건들을 던지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라도 여길 떠나겠다. 정부도 이사비용을 지원해준다고 한 마당에 이곳에 있는 게 바보지.‘
그러는 사이, 봉고차는 불빛 없는 민가들을 지나쳐 구석진 산길로 이동했다.
“그래도 눈이 이곳에는 덜 내려서 다행입니다. 안 그랬으면 회강님을 안고 먼 거리를 이동했을 텐데.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회강의 눈동자는 이리저리 움직였다.
’전에는 눈이 많이 내려서, 유의명님이랑 이곳까지 걸어왔는데...‘
아련한 과거를 떠올리며 회강은 상념에 잠겼다.
그리고...
“도착했습니다. 저기가 맞지요.”
차준엽의 큰 목소리를 들은 회강이 정면을 바라보았다. 자동차 헤드라이트로 집이 보였다.
’전보다 더 허름해졌군.‘
회강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동안, 안전띠를 푼 차준엽이 문을 열고 나간다.
“곧 열두시니 대충 정리만 하고 오겠습니다. 어, 추워.”
탁.
문을 닫고 뛰어가는 차준엽이 사라지고, 회강은 잠시 눈을 감았다.
’이곳밖에 떠오르지 않았어.‘
이들에게 부담도 덜 주면서, 있을 만한 장소가 회강의 기억 중엔 이곳이 유일했다.
’영교 때문에 이 주변을 군부대가 정리했었지.‘
거기다 폐촌이 되면서, 사람들이 없는 데다가, 자가 발전기를 지니고 있는 숨기 좋은 곳이 바로 박정근이 머물렀던 이곳이었다.
’거기다, 집주인이 찾아와도 문제가 없는 장소니 금상첨화다.‘
이곳을 떠올리기 전까지만 해도, 영교일로 전우애가 쌓인 철동이나, 가장 친분을 오랫동안 유지했던 유의명의 집으로 찾아갈까 했지만, 그는 최변인을 떠올리고는 그 즉시 포기했다.
’병원에서 곧바로 최변인에게 연락이 갔을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배신자 새끼가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거처를 확인할 테지.‘
결국, 고민 끝에 회강은 이곳을 떠올리고 오게 된다.
운전석으로 차준엽이 들어와 손을 비비며 말한다.
“으 추워. 회강님, 기다리셨죠? 자가 발전기 상태 보니 죽이던데요. 거기다 태양광 발전기까지 있어요. 인터넷이야, 제가 가져온 거로 하면 되니, 한 달 아니 그 이상을 여기서 머물러도 될 것 같아요.”
그의 말을 들은 회강은 속으로 안도했다.
’다행이군... 하지만,‘
회강의 시선이 차준엽에게 향했다.
“거기다...”
’자정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자가 사람들에게 불안하다는 소리를 듣는 이유가 바로 정신이 너무 산만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러 복합적인 지식이 필요한 일들에는 최적의 능률을 보여주지만, 집중력 부족으로 중요한 순간마다 꼭 한두 번은 큰 실수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회강은 눈동자를 양옆으로 움직였다.
’그만 말하고, 어서 짐부터 옮겨라.‘
하지만 자신의 눈치가 정말 좋다고 자랑하던, 차준엽의 시선은 회강이 아닌 뒤편을 향해 있었다.
“이게 회강님의 눈동자를 읽어줄 기계로, 제가 어제 거리를 걷다가 만난 과거 동창에게 받은...”
’아니, 설명보다 우선 일을 하라고.‘
회강은 답답한 마음에, 조금 전보다 더 빠르게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러나, 차준엽은 그의 눈동자가 아닌 턱에다 손수건을 가져다 댄다.
“이런이런. 그새 또 침을 흘리셨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칠 일 전 시장에서 산 이 마스크라면 ...”
회강의 눈이 대각선 오른쪽 아래로 이동했다.
’헉. 열한 시 사십구 분!“
자정까지 자신을 옮기고, 가져온 배터리와 히터기를 연결하는데 만해도 빠듯한 시간임을 알기에 회강은 더욱 필사적으로 눈동자를 움직였다.
‘쇼핑 이야기 그만해! 어서 움직여야 한다고!’
그리고...
그들은 첫날을 차 안에서 잠들게 된다.
*5*
-진화 시즌2 시작까지 십 일 남았습니다.
하늘 위에 떠 있는 글씨는 보던 회강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이는 그뿐만이 아닌, 그의 일행에 속한 모두에게 볼 수 있는 표정이었다.
’드디어, 십 일만 있으면...‘
자신이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에, 그의 마음이 초조해질수록 시간은 더디게만 흘러가는 듯했다.
’무조건 진화는 하게 되어있어.‘
문을 통과하기 직전에 무산되었던 것을 아는 그였다.
’설사 다시 해야 한다고 해도, 순식간에 해결할 자신이 있다.‘
-미각에 관련된 모든 숙련도가 한계 단계까지 올랐습니다. 최초이며, 이와 관련된 모든 요소의 숙련도 상승률이 올라갑니다. 최초 달성 보상은 시즌 2가 시작되면 주겠습니다.
-히든 미션 *떨어진 돌도 다시 본다*를 성공했습니다. 메인 미션 [석기2]가 개방됩니다. 선택의 방에 추가합니다.
-탄압당하던 60이 넘는 일행을 구한 뒤, 그들과 함께 한 달이 넘도록 생존하고 있습니다. 보상으로 메인 미션 [무리]를 개방합니다. 선택의 방에 추가합니다.
-백 개의 핵심 지식을 얻음과 동시에 이를 주변인에게 아낌없이 가르쳤습니다. 메인 미션 [교육]을 개방합니다. 선택의 방에 추가합니다.
-뛰어난 청각으로 들은 소리 중 10개를 완벽하게 따라 했습니다. 메인 미션 [소리]를 개방합니다. 선택의 방에 추가합니다.
...
그동안 회강이 차근차근 노력한 결과물들이 그를 더욱더 빠르게 성장시키고 있었다.
’나중엔 몇 가지 방향 중 한 곳에 집중해야 할 때가 다가오겠지...‘
그렇게 추측하는 이유는, 수렵 2의 최고 난도를 수행한 자들이 최종적으로 얻은 미션 명칭에 따라서 상승하는 요소들이 달랐기 때문이다.
-[파괴]를 성공한 자들은 싸움과 신체와 관련된 요소의 단계가 대폭 상승한다.
-[유지]를 성공한 자들은 도구와 지능과 관련된 요소의 단계가 대폭 상승한다.
-[공존]을 성공한 자들은 전체적인 요소의 단계가 소폭 상승한다.
’이런 경우는 한 번만 일어난다는 보장이 없어, 아무리 생각해도 몇 번 더 이런 선택의 순간들이 내게 다가올 것이다.‘
회강은 한계치까지 오른 능력치보다 더 높은 단계가 없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으면, 새로운 시즌을 시작할 이유가 없다. 그냥 이대로 현상 유지만 하는 식으로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
그래서 더더욱 기대되는 그였다.
’분명히 뭔가가 있을 거다. 시즌이 시작되자마자, 다시 치고 나가기 위해선, 다른 요소들의 단계도 미리 올려야 한다. 다다익선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최대한 준비해야지.‘
잠시 쉬고 있던 회강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왼팔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연습을 꾸준히 했더니, 진화가 멈추는 바람에 발꿈치 아래로는 감각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 위는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됐다.‘
-왼팔의 움직임이 더 큰 회전과 파괴력을 실은 돌멩이를 던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왼팔로 균형을 잡으니, 전보다 훨씬 민첩하게 움직인다.
-왼손으로 막고 오른손으로 공격할 경우, 상대에게 더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왼팔 사용에 대한 지식은, 조폭들과의 전투를 겪으면서 한층 더 정교한 몸놀림으로 상대들을 격살할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였다.
’만약, 양의가 왼팔을 흔들어주지 않았다면, 지금에서야 간신히 움직이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아저씨, 우리 프라이드치킨 먹어요. 네?]
자신의 팔을 흔들며 환하게 웃는 양의의 모습이 회강의 머릿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열흘만 있으면 된다... 그때 내 예상대로 회복하지 못한다 해도, 어떻게든 빨리 회복하자. 그래서 찾아가는 거야...‘
굳은 다짐과 함께, 그는 왼팔에다 무거운 돌을 묶은 덩굴을 매달았다. 그리고 흔들기 시작했다.
’하나. 둘. 하나. 둘.‘
속으로 구령을 세며, 회강이 연습을 시작했다.
그러자, 그것을 지켜보던 유인원들도 움직이고,
”우끼.“ ”우끼.“
한동안 유인원들의 단결된 기합 소리가 숲 안에서 울려 퍼졌다.
*6*
-진화 시즌2 시작까지 육 일 남았다.
-오늘부터 진화의 다섯 가지 주요 변화 중 하나를 적용하겠다.
-<1> 오늘 새벽까지 적용했었던, 모든 이들의 일괄 게임 접속은 폐지된다. 변이 억제 가능 일, 혹은 시간이 필요한 이들만 자정 전까지 선택해서 접속하면 된다. 또한, 접속한 자를 강제 공격해도 진화 속으로 끌려 들어가지 않는다. 단, ??? (너의 지능이 낮아서 확인할 수 없다.) 할 것이니 주의해라.
핸드폰에 표시된 메시지를 지켜보는 최변인의 안색은 어두웠다.
”강회강 그 새끼 때문에 짜증 나 죽겠는데, 이 쓰레기 같은 게임도... 에잇.“
쾅.
바닥에다 핸드폰을 집어 던진 그는, 몸을 일으켰다.
”기분도 엿 같은데, 술이나 먹으러 가야겠다.“
그가 외투를 걸치고,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지잉.지잉.지잉.
들려온 진동 소리에 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금이 간 액정 위에 떠오른 번호를 바라본 최변인은 핸드폰을 주워들었다.
”제대로 잡지도 못한 새끼들이 왜 또 전화야. 아. 왜. 어. 어.“
짜증만 가득했던 그의 표정이 서서히 변해갔다.
그리고 그의 입가에 미소가 맺힌다.
”그러니까, 영교가 아니라 이거지? 그냥 단순히 섬에서 굴러먹던 놈들이다. 오호...“
최변인이 소파에 앉고선 다리를 꼬았다.
”오케이. 계약대로 돈은 반반. 선수금은 내 쪽에서 지급하지. 당신도 알지? 만약 이대로 강회강을 못 잡으면 그대로 끝인 거. 잘해야 할 거야. 나는 빠져나갈 구석이 있지만, 당신은 아니잖아. 지금 당장 일 시작해. 아! 자료 모이는 데로 나에게 보내, 아씨! 보내라면 보내. 뭔 잔말이 많아. 무조건 보내. 끊는다.“
툭.
소파 위로 핸드폰을 던진, 그가 손톱을 깨물기 시작했다.
톡.톡.
”아무래도 병원 놈들은 불안해서 안 되겠어. 자료 보내주는 대로 내 쪽에서도 손을 써야지...“
톡.톡.
지잉.지징.
”왔다.“
그가 바로 옆에 있던 핸드폰을 집어 든다.
최변인이 검지로 화면을 누르자, 노인을 비롯한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있는 사진이 금이 간 액정위로 나타났다.
”이 새끼들이 영교 흉내를 낸 놈들이라고.“
그는 다시 검지를 움직여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래. 나다. 자식들은 평안하신가? 돈이 필요하지 않아? 무슨 일이냐고, 지렁이 알지? 그래 그 지렁이 새끼. 내가 말이야 그 지렁이를...“
최변인의 목소리가 조금씩 줄어들더니, 싸늘한 미소를 입가에 문 채 소곤거렸다.
”잘라줄 도구가 필요해. 구해줄 수 있어?“
잠시 뒤,
”으하하하하.“
그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 작가의말
헉. 죄송합니다. 올린 줄 알았습니다. ㅜㅜ
단, ??? (너의 지능이 낮아서 확인 할 수 없다.) 할 것이니 주의해라.
를 추가했습니다.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