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장
같은 층.
그는 시커먼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한 여성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백 칠십이 넘는 키의 늘씬한 몸매를 지녔는데, 회강이 제대로 못 피할 정도로 빠른 손놀림을 보유한 여인이었다.
‘바디를 보면 운동신경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나와 같은 단계로 올라선 여자일 수도 있겠어.’
대원들이 자신을 바라보자, 앞으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웃었다.
“왜요? 제게 반했어요? 후후. 전번 준다고 하면 고민은 해보죠. 저도 바쁜 사람이거든요.”
‘자존감이 너무 강한 게 단점이자 장점이다.’
이름은 김혜림. 나이는 스물아홉으로, 유명한 스트리머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상하이에는 속옷 광고를 찍기 위해서 왔다가 일이 생겨서 이곳으로 숨었다고 했다.
‘뭐... 대원 중에 아는 자가 있으니, 정보는 확실한 것 같은데, 강화 늑대 정도는 무리 없이 잡는다는 말에는 완전히 믿을 수 없지.’
대원이 몰래 전달한 정보로는 워낙 허세가 강해서 문제가 됐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도 전투 실력은 상당해서 일반 늑대는 잡을 정도는 된다고 말해줘서, 약간은 안도한 상태였다.
‘그나저나, 바깥이 너무 조용해. 역시 이쪽에도 영교들처럼 정부에 손 뻗은 이들이 있는 건가?’
원래 계획은, 정부군이 전면에 나타나 시선을 끄는 사이에, 회강들은 정부 측이 알려준 루트를 통해 1층으로 잠입하는 거였다.
하지만, 회강은 그것을 완전히 믿을 수 없었고, 마침 관리실 직원에게 얻은 설계도면을 이용해, 지하수 쪽으로 침투했다.
회강은 핸드폰을 바라봤다.
‘열두 시 사십이 분이군. 이제까지 정부군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보면 뭔가-’
“헉.”
갑자기 거대한 검은 물체가 아래로 떨어졌다.
쾅.
거대한 폭음과 함께, 건물이 크게 흔들린다.
회강은 급히 얼굴을 창가에 붙여 아래를 내려다봤다.
‘헬기구나!’
뒤에서 윤상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헬기가 떨어졌습니다. 제가 보기론 군용-
회강의 메시지가 다 써지기도 전에, 또 다른 헬기가 아래로 떨어졌다.
쿵.
“이런!”
윤상수가 급히 창가로 몸을 움직였다.
두 사람이 내려다보는 곳에는 두 대의 헬기가 부서져 있었다.
부서진 동체에 불과 검은 연기가 치솟았지만, 다행히 거친 빗줄기가 내리고 있어서, 큰불로 번질 가능성은 적었다.
회강은 헬기의 마크를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봐도 군용 헬기야.’
“저들이 제시한 작전에는 헬기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예. 저도 알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정부 측도 내부에 첩자가 있다는 사실을 안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말도 안 하고 비밀 작전을 수행한 것이겠죠.-
“말이야 비밀 작전이지 우리를 미끼로 내세운 것 아닙니까.”
으드득.
번쩍.
번개에 의한 내부가 반짝이면서 일그러진 윤상수의 얼굴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더 괘씸한 건, 후퇴하는 헬기 숫자는 세 대. 총 다섯 대의 헬기만 동원했다는 겁니다. 이는 중요한 인질들만 구출하고 여러 층에 분산된 천이 넘는 사람들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글쎄요. 그냥 저 안에 타격대 전원이 있었다면, 충분히 탈환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속단은 하지 맙시다.-
“그나저나 큰일입니다. 이러면 적들이 크게 흥분한 상황일 텐데. 인질들이 무사할까요? 거기다 경계도 강화될 가능성이 높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 강회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럴 가능성도 있죠. 이제부터 81층까지 쉬지 않고 올라갈 겁니다. 그다음에 호텔에 있는 직원 전용 통로를 통해 인질들이 있는 111층부터 공략할지 아니면, 전망대가 있는 123층으로 바로 침투해서 중요한 인질들부터 구할지 결정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대원들을 준비시키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움직이려던 윤상수의 움직임이 멈춘다.
“근데, 저 여자는 어떡하실 겁니까? 자기도 위로 올라가겠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냥 기절시킬까요?”
회강은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데려갈 겁니다.-
메시지를 읽은 윤상수의 눈이 커졌다.
“정말입니까?”
-예. 무조건 데려갈 겁니다. 무조건.-
“하지만- 후. 알겠습니다. 회강님이 우리 모두를 위험에 빠뜨릴 결정을 하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그럼 이만.”
고개를 숙인 그가 떠나가고, 회강은 다시 바깥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불타오르는 헬기가 두 대나 있었지만, 단 한 명의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파악된 적들의 수만 총 삼백이 넘는다고 들었다. 그중 덩치가 큰 놈들이 삼십이 넘는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분명 인원에 여유가 있을 텐데... 느낌이 좋지 않아.’
회강은 창가에서 몸을 돌렸다.
‘세 가지 중 하나다. 위에서 큰 타격을 받아서 정비 중이거나, 혹은 반란이 일어났거나... 그게 아니면...’
그는 반달돌칼을 잡았다.
‘이미 거의 목적을 이루기 직전이라서 신경 쓸 필요가 없을 때거나... 마지막은 절대 아니길...’
하얀빛무리 하나가 휘도는 반달돌칼을 살짝 자신의 이마에 갖다 댄 회강은, 윤상수의 손짓에 빠르게 발걸음을 움직인다.
잠시 뒤, 그는 다시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삼십 분 뒤. 82층.
‘이번에도 이상한 곳이군.’
그가 작은 문을 열고 들어온 곳은 장난감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몸을 낮추고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간 그는 카메라들이 없는 단순한 창고임을 확인하자, 상체를 곧추세웠다.
우드득.
‘좁은 곳에서 오랫동안 있어서 그런가...’
그가 스트레칭하는 사이, 대원들과 김혜림이 나타나 회강과 똑같은 행동을 한다.
회강의 시선이 김혜림에게 향했다.
‘다행히 첩자는 아니었어.’
사실 회강이 그녀를 데리고 위로 올라온 것은 믿지 못해서였다.
호텔 직원이 연루된 사건이었기 때문에, 혹시 모를 침입을 대비해 세워놓은 적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그는 그녀를 데리고 이곳까지 온 것이다.
‘워낙 영교와 관련된 사람들의 직업이나 연령들이 너무 다양해서 혹시 이 여자도 같은 경우인가 했는데, 생각보다 잘 따라오는 데다, 다른 곳에 연락할 조짐은 없었다. 거기다 여기서 이것도 발견했으니...’
회강은 씁쓸한 미소와 함께, 구석에 떨어져 있는 포스터를 하나 바라봤다.
거기엔 환한 미소와 함께, 란제리만 입은 김혜림의 모습이 있는 포스터가 있었다. 중국말이라서 뜻은 모르지만, 그녀가 광고를 찍으러 이곳에 왔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화장도 안 했고 향수도 뿌리지 않았다. 추가로 빠른 손놀림과 좋은 체력을 생각하면 그녀의 말대로 운 좋게 쫓아오는 변이체들을 따돌렸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
회강은 다가온 윤상수에게 자신이 본 포스터를 가리킨 다음 창가로 이동했다.
바깥은 비가 간헐적으로 내리고 있는데, 이중 창문으로 되어 있어서 외부 상황을 파악하기는 힘들었다.
‘어쩔 수 없지, 우리가 할 일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자.’
회강은 창가에서 물러나 대원들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김혜림을 멀리 떨어지게 한 뒤, 그들만의 회의를 시작했다.
회의는 메시지로만 이루어졌다.
회강이 제일 먼저 의견을 내놓는다.
-바로 128층까지 가느냐 아니면 여기서부터 차근차근 인질들을 구출해가며 올라가느냐를 정해야 합니다. 그 뒤, 작전을 짜죠.-
그의 메시지를 본 오철동이 손을 들었다.
-제 생각엔 128층까지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전투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적들은 만만치 않은 능력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헬기까지 떨어뜨릴 정도면, 우리가 몰랐던 무기들을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저는 128층까지 간 후, 기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윤상수가 고개를 저으며 메시지를 입력했다.
-저는 반대입니다. 어디로 침투하던 우리뿐만 아니라, 인질들도 위험에 처합니다. 그래서 저는 많은 인질들이 모여 있다고 정부에서 알려준 111층부터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부 특정 인사보다 더 많은 생명을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대원들의 목숨은 고려하지 않는 겁니까? 우리는 고층에 있는 중요한 인질들만 지키고 있어도, 적들은 알아서 도주할 겁니다. 오히려 적들이 중요한 인질들을 가지고 협박한다면 중국 쪽에서 우리를 죽이려 들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까 헬기들이 떨어진 것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111층이 안전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삼백 정도 되는 적들은 공중에서의 적들의 습격을 더욱 신경 쓸 겁니다. 아무래도 아래보다 지붕이나 위층을 통한 점령 전이 시작될 경우가 더 까다로울 테니까요. 그리고 전자 장비를 끄는 바람에 내부사정에 어두운 우리입니다. 적들의 공격에 인질들과 적들이 아래층으로 이동했다면 우리가 간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차라리-
“뇌가 없는 사람들이네.”
회강을 비롯한 모두가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거기엔 대원들 사이에 껴서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김혜림이 있었다.
“난 또 뭔가 대단한 작전이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 탁상공론만 하고 있네요.”
그녀의 말에 대원들 모두가 움찔했다.
김혜림이 자신의 오른팔을 내밀었다.
“적들은 전망대가 있는 121층도 아니고 최근 만들어진 스카이로비가 있는 111층에 있지도 않아요. 그들은 이곳에 있어요.”
탁.
그녀가 검지로 강하게 찍은 곳을 본 윤상수가 중얼거린다.
“60층?”
“예. 거기에 죄다 몰려 있어요. 저도 사실은 57층 광고회사 사무실에서 도망치다가 따돌린 다음, 59층에서 숨어 지내다가 우연히 내려가는 사다리를 발견해서 6층으로 내려온 거거든요. 다행히 거기서 먹을 것을 찾아서 버틸 수 있었고요.”
철민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정부 측 말로는 모두 111층 위에 있다고-”
“노노”
김혜림이 가느다란 검지를 좌우로 흔들고는, 자신의 머리를 쿡쿡 찔렀다.
“저 정신병자 아니거든요. 확실하게 이곳에 인질들 모두가 뭉쳐 있어요. 잠시 인터넷 영상 찍을 때만 일부 인원들이 이동하는 거로 알고 있고요. 그리고, 적들은 삼 백 명이 아니에요.”
“예?”
“그럴 리가.”
“사진으로 봤을 때는 분명히...”
웅성웅성.
‘내가 잘못 들었나?’
가장 중요한 정보는 적들의 인원수였고, 이것만은 확실하다고 정부 쪽에서 공언한 상태였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회강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삼백이 아니면 혹시 그 이하인 겁니까?
그의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천이 넘어요.”
“네?”
“천명!”
중간중간 큰 소리가 흘러나오자, 윤상수가 일어나 손짓으로 제지 시켰다. 그사이, 철동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봐, 숨어다녔다고 하지 않았나? 혹시 도망치고 싶어서 그런 거라면-”
“닥쳐요. 제 친구가 저 안에 있어요. 그것도 어릴 적부터 같이한 소중한 친구라고요. 그리고 적들의 숫자는 제가 숨은 곳 근처에 다가온 놈들이 주절거려서 알게 된 사실이에요. 그들이 웃으면서 이 안에서 들어온 동료만 천 명이 넘는다고 중국말로 지껄이더군요. 제 귀로 똑똑히 들은 사실이에요. 믿어주세요.”
그녀가 눈물까지 글썽거리자, 철동이 말을 꺼내지 못한다.
그 대신에 그녀에게 말을 건 이는 이철민이었다.
“진정하시고, 혹시 그 외에 다른 정보는 없습니까?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훌쩍. 제가 중국말이 서툴러서 숫자밖에는 제대로 못 알아들었어요. 아, 대신 서둘러, 뚫어, 옮겨야 돼. 등은 자주 들었어요.”
그 뒤, 그녀는 철민과 함께 구석으로 이동했고, 나머지 대원들은 윤상수의 주도하에 조용히 다음 작전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보며 회강은 깊은 고민에 빠져 들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만으로 힘들겠군.’
적들의 수가 천 명이 넘는다면, 아무리 회강이라도 피해 없이 물리칠 수 없다.
‘그렇다고 전자 장비를 켜고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잖-’
[이 세상 모든 싸움은 상대를 얼마나 잘 속이는가가 가장 중요하다. 속이는 자만이 승리하고 그러지 못한 자는 패배한다.]
“큭”
그의 머릿속을 울리는 중후한 남성의 목소리에 회강은 비틀거렸다. 그런 그에게 윤상수가 다가온다.
“머리에 두통이 심하시면, 아, 혹시 기억이라도 돌아오는 겁니까? 그러면 일단, 여기서 휴식을-”
-아닙니다. 단순한 두통일 뿐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사람들을 구해야 합니다. 적들의 위치를 확인했으니, 다시 아래로 내려가서-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 네가 잘못이야! 이 머저리 같은 녀석, 회는 너와 달리 상대를 살필 줄 알았어.]
[아빠가 무서워 형.]
[괜찮아. 내가 말해준대로만 하면 너는 혼나지 않아.]
[헤헤, 역시 형이 최고야.]
‘누구?’
회강은 갑자기 자신의 앞에서 나타난 어린아이를 보는 순간, 극심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
“윽.”
결국, 앞으로 쓰러지는 회강을 부축한 윤상수가 다급하게 외쳤다.
“이철민, 어서와라. 회강님이 쓰러지셨다.”
“뭐!”
“회강님”
사람들이 몰려오는 가운데, 회강의 시야가 희미해졌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그는 앞으로 바라봤다.
그는 허공, 정확히는 눈앞에 떠오른 환영의 정체를 알아차리게 된다.
‘너... 너는!’
[형아! 안아줘!]
두 팔을 벌린 남자아이는 한 남성을 많이 닮아 있었다.
‘오광, 아니, 남궁민! 그가 왜-’
“악.”
머리를 움켜잡은 강회강이 몸을 윤상수가 부축한다.
“회강님.”
“정신 차리세요.”
툭.
회강의 몸이 축 늘어졌다.
“회강님!”
- 작가의말
일신상의 이유로 수정을 하지 못하고 올립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내일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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