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장 돌아오다. -1-
회강은 최변인이 웃는 모습을 보는 순간 한 가지 사실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분명히 카메라가 있다. 그러지 않고선 저렇게 활짝 웃을 녀석이 아니지.’
재수 없는 면상에 주먹을 날리고 싶었지만, 꾹 참고선 회강도 최변인처럼 활짝 웃었다.
‘어떻게 알고 사람들을 끌고 왔는지는 모르지만... 이젠 얼마 전의 내가 아니야. 더는 내가 고개를 숙일 이유가 없어.’
당당한 강회강의 모습에 최변인이 흠칫하는 사이, 놈의 등 뒤로 카메라와 함께 회강에게 익숙한 이들이 나타났다.
그 중 유명해와 이강구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형님 안녕하세요. 장미야 안녕. 김대식 회장님도 안녕하셨어요. 아 조성미님도 있었군요. 안녕하세요.“
이강구가 일일이 사람들을 마주 보며 인사하자, 강회강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어색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회강은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얼굴을 찌푸렸다.
‘여러 번 같은 일을 겪고도 또 이러다니.’
유명해에게 메시지를 내민다.
-오늘 쓰러진 환자가 있는 병실에 카메라를 들고 오다니, PD님은 생각이 있는 겁니까.-
그의 메시지를 읽은 사람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유명해가 어색하게 웃으며 최변인을 바라본다.
”그게, 원래는 안 된다고 간호사와 의사가 막았는데, 최변인인님이 갑자기 나타나더니, 괜찮다면서 저희를 끌고 이리로 왔습니다.“
그의 말에 최변인이 움찔했지만, 회강의 시선은 유명해에게 고정돼 있었다.
‘이 사람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유명해를 보는 회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번에도 자신보다 발언권이 높은 사람의 말을 순순히 따른 모습이 전에 군부대 사건과 많이 닮아있는 것 같은데. 아닙니까?-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민감한 사건을 강회강이 말하자, 유명해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분위기가 냉각되자, 서장미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회강의 곁으로 다가온다.
”오빠 갑자기 왜 그래. 나는 괜찮아. 어째서 간호사와 의사분들이 막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낮에 진찰해주신 분이 괜찮다고 하셨어. 아마 다른 환자랑 착각을-“
회강의 날선 시선으로 서장미를 바라보자,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장미야 TS의 기본 정신을 잊은 거야? 사람이 중요하다다. 그런데-
[사람이 중요하다? 개뿔~. 지랄하지 마! 네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 줄 알아? 아냐고!]
”큭!“
뒤통수에 강한 통증을 느낀 회강이 비틀거렸다.
틈이 보이자, 김대식이 그의 손에 들린 음료수병을 낚아채더니, 비대한 몸을 뒤뚱거리며 최변인에게 달려간다.
”이건 내가 버림세. 변인 성미야 가자.“
”하지만, 이때가 아니면-“
”어서!“
김대식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본 최변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성미의 손을 잡았다.
”그럼 저희는 급한 일 때문에 빠지겠습니다.“
”네.“
”가보세요.“
그들이 멀어지자, 회강이 몸을 일으켜보지만,
”아.. 안-“
[차라리 여기서 죽어버려!]
다시 들려온 환청과 함께 강한 머리에 강한 두통을 느낀 회강이 무릎을 꿇었다.
”오빠! 괜찮아!“
”회강님!“
유명해 피디와 서장미가 부축해 보지만, 회강의 팔은 힘없이 덜렁거렸다.
‘아... 안 돼...’
그의 의식이 어둠 속으로 잠겨 들었다.
*8*
최변인 전용 밴.
차가 출발하자, 그제야 김대식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의 옆에 앉아있던 최변인이 투덜거린다.
”조성미 메시지로는 사건에 대한 기억은 없다면서요. 그런데 왜 거기서 도망치듯 빠져나온 겁니까? 이참에 강회강을 이용해서 다시 제가 나갈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김대식이 관자놀이 부근을 주무른다.
”회강이가 나를 보고 대형이라고 하더구나.“
그의 말은 들은 최변인이 눈을 부릅뜬다.
”정말입니까...“
”그래...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가슴이 지옥 밑바닥까지 내려갔었지.“
”음... 저라도 도망쳤을 겁니다.“
두 사람의 어두운 표정을 지켜보던 조성미가 고개를 꺄우뚱한다.
”왜 대형이라는 말에 두 사람이 민감하게 반응하시는 거예요? 듣기론 팔 년 전까지 기억만 돌아왔다면서요. 그전에 우리가 그 새끼를 처리하면 되잖아요.“
그녀의 말을 두 사람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김대식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너는 내가 녀석의 손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모습을 보고 뭔가 깨달은 것이 없나? 네 남편 될 놈이랑 똑같은 칭호를 얻은 데다가, 비슷한 전투와 관련된 요소 단계를 보유한 나다. 그런 내가 놈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하지만, 경호원들이랑 같이 제압을 하면-“
”멍청한 년! 예전에 대형이라 부르던 시절에 강회강이 얼마나 날아다녔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냐! 항상 네년은-“
삿대질하는 김대식의 팔을 최변인이 잡고선 아래로 내린다.
”그만하시죠. 그때는 많이 어린 아이였습니다. 게다가 임신한 여자입니다. 좀 봐주세요. 성미 뭐해. 어서 사과드리지 않고.“
”죄송해요.“
그녀가 한마디 말만 하고 눈을 감아버리자, 김대식의 몸이 크게 움찔한다.
”저, 저것이-“
”죄송합니다. 성미가 사정 설명 없이 화만 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제가 대신 사죄드립니다.“
”음...“
김대식이 고개 숙인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이가 생긴다고 하니까, 이제야 정신을 차렸구나. 확 변했다는 매니저의 말이 틀리지 않았어.“
그의 말에 최변인이 쓴웃음을 짓는다.
”제가 부모가 된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제가 전에 부모에게 버림받은 걸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부모처럼 무책임한 인간이 되는 것만큼은 죽어도 싫습니다.“
”그래... 그런 무책임한 쓰레기들과 같은 인간은 되지 말아야지. 다음 달에 결혼한다고 했나?“
”예. 아이도 생긴 마당에 시간만 끌면 오히려 손해 아닙니까. 주변 사람들이, 아이 낳기 전에 최대한 안정적인 환경을 만들어 놓은 게 좋다고 그러더라고요.“
”맞는 말이야. 거기다 칠삭둥이라고 속일 수도 있으니, 나중에 조성미가 활동을 좀 더 빨리 시작할 수 있겠어.“
김대식의 말에 눈을 감고 있던 조성미가 상체를 둘 사이로 들이밀었다.
”정말이죠? 그럼 언제 복귀시켜 줄 건데요? 지금 확답을 주시면 안 돼요?“
그런 그녀를 두 사람이 째려보자,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죄송해요...“
”네가 고생이겠어.“
”아닙니다. 그동안 제가 바람피운 것보다는 훨씬 나은데요.“
그의 말은 들은 김대식이 잠시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있다가, 눈을 비비고선 최변인을 바라본다.
”허. 거참. 자네 그동안 말썽만 피우던 최변인이 맞는 건가? 말투도 싸가지 없게 하더니 이젠 그러지도 않고 말이야.“
”만나는 사람마다 그러던데, 회장님에게 들으니 확 와 닿네요. 근데, 회장님,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뭔데 그러나.“
”그게...“
잠시 고개를 숙인 그가 가슴에 달린 물방울 모양의 은빛 브로치를 매만지다가 고개를 젓는다.
”아닙니다. 나중에 제가 따로 알아보고 도저히 모르겠으면 그때 물어보겠습니다. 우선, 강회강이 기억이 돌아온다는 가정에 따라 우리가 어찌해야 할지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회사로 가서 과거 법무팀 분들도 모아서 함께 방법을 찾아보죠.“
그의 말에 김대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다. 그들도 강회강이 돌아오면 무사하지 못할 테니, 적극적으로 도움을 줄 거다. 그럼, 내가 제 일 법무팀원들에게 연락할 테니, 너는 그동안 강회강을 누명 씌우는데 동참한 사람들에게 경고해라. 여차하면 알지?“
그의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최변인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앞에 있는 단추를 누르며 외쳤다.
”김산수!“
그러자, 단추 옆에 있는 스피커폰에서 김산수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예! 무슨 일이십니까.“
”강회강 기억이 돌아왔으니, 몸조심해라. 괜히 걸려서 큰일 당하지 말고. 그리고 주차하고 난 뒤, 녀석과 단 한 번이라도 마주친 사람들은 알아서 서울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해. 말 안 들으면 전화하고.“
”... 알겠습니다.“
그의 대답을 들은 최변인이 몸을 뒤로 젖히며 중얼거렸다.
”이번 고비만 넘기면 된다... 이번만 넘기면 된다...“
TS 본사 주차장.
김산수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칩을 바라보며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다.
”한번이 아닐 텐데... 후후.“
그는 칩을 움켜쥔 후, 자신의 차에 올라탄다.
”그럼, 이걸 전달하러 가볼까나.“
그가 액셀을 밟자, 차가 앞으로 나아가고, 이내 주차장에서 사라졌다.
*9*
흔들리는 회강의 시야에 낡은 스니커즈 운동화를 신은 작은 발이 보였다.
‘누구지?’
강회강이 궁금해하는 사이에, 현실에서 들었던 환청과 똑같은 여자 목소리가 들려온다.
[죽은 거겠지? 콜록콜록.]
기침 소리와 함께, 피 묻은 방망이를 질질 끌며 여성의 발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뒤, 그가 상체를 일으켰다.
”왜, 그 애가 내 머리를- 윽.“
한쪽 팔로 머리를 부여잡은 그는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일어서는 데 성공한다.
”콜록콜록.“
짙은 연기에 몸을 아래로 수그린 그는, 왼손으로 눈앞에 떨어져 있는 손수건을 잡고 입에다 댄다.
네발로 걷다시피 해서 이동하던 그의 귓가로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이리저리 홱홱 돌아가는 시야가 멈춘 곳은 전등이 껌벅이는 화장실이었다.
”살... 살려줘...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어디서 힘이 났는지, 회강의 몸이 벌떡 일어나더니, 그곳을 향해 빠르게 걸어간다.
화장실에 다다른 그는 누워있는 서장미를 발견한다.
”장미야. 장미- 콜록콜록.“
흔들어보지만, 이미 의식을 잃었는지, 깨어나지 않았다.
회강의 시야가 다시 홱홱 돌아가더니, 두 군데를 계속해서 번갈아 쳐다보았다.
한 곳은 불이 가득한 곳이었다. 거기 끝에는 비상구 빛이 살짝 보였다. 다른 한 곳은 불은 없었지만, 이미 연기로 가득 차서 시야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콜록콜록.“
기침한 그가 온몸에 물을 끼얹었다, 그러자 약간 흐릿했던 그의 시야가 분명해진다. 그는 그녀를 안고 일어섰다.
그리고 양쪽 중 한 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곳은 불이 가득한 곳이었다.
‘이래서 내가... 큭’
극심한 두통과 함께 그의 의식이 어둠 속으로 잠긴다.
*10*
Y 대학병원. VIP 병실 1003호.
회강이 눈을 떴다.
‘오전 일곱 시. 하루를 날려 먹었군.’
쓴웃음을 지은 그가 몸을 움직였다.
‘정상이군. 또다시 전신 마비가 되면 어쩌나 했는데...’
그는 주삿바늘을 뽑고선, 창가로 이동한다. 장대비가 내리면서 하얀 연기구름처럼 형성된 안개가 병원 주변에 자욱하게 깔려있었다.
‘그나저나 내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으면, 그 상황에서 나를 죽이려 든거지? 잘못하면 범인도 죽을 뻔한 상황이었잖아.’
얼굴을 찡그린 채 고민하던 그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도저히 모르겠어. 이제 기억이 돌아오는 타이밍이 빨라지고 있으니, 얼마 안 있으면 모두 돌아오겠지...’
상념에 빠져있던 그는 뒤에서 문이 열렸다.
‘누구지?’
몸을 돌린 그의 시선에 환자복 차림에 서장미가 보였다.
그녀를 바라본 그의 눈이 동그래진다.
‘눈물을 왜 흘리고 있는 거지?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스러운 맘에 회강이 그녀에게 걸어갔다.
-왜 그래. 무슨 일 때문에 우는 거니. 내게 말해라. 내가-
”오빠.“
-그래 어서 말해라. 어려운 일은 원래-
”오빠 때문이야.“
그녀의 대답에 회강이 흠칫했다.
-나 때문이라고?-
”그래, 이 나쁜 새끼야!“
분노에 찬 외침과 함께, 그녀의 손이 치켜 올라갔다.
- 작가의말
내일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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