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장
*8*
삼십 분 뒤.
통로는 사람 다섯 명이 통과할 만큼 넓었으며, 벽에 자그마한 균열은 보여도 사람이 불안감에 젖을만한 곳은 보지 못했다.
회강은 깔끔하게 정비된 통로를 둘러보며 미간을 좁혔다.
‘환풍구도 보이지 않는데 공기가 위보다 더 좋다니. 산소 발생장치라도 아래에 달아 놓은 건가.’
괴물들은 갈래 길에서 나타난 이후로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대신, 회강은 리장수와 군인들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끼며 그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리장수는 확실히 예술인은 아니다.’
그가 이렇게 확신하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이제까지 리장수가 전공했다는 조각과 관련된 예술 행위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말투도 군인 말투고...’
또한, 삼십 분 전 벌어진 전투에서, 나타난 뚱뚱한 인간이 뛰어오는 장면을 보고 멀어지라고 외쳐준 덕분에 회강과 다른 군인들이 놈이 폭발하면서 날아온 조각들을 피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전투가 끝나고, 군인들이 리장수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내기도 했지만, 회강은 리장수가 이곳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랬다면 미션을 이야기하면서 이곳으로 오자는 의견에 무조건 반대했을 것이다. 연구소 일원이 스스로 폭탄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갈지 없지 않은가.’
물론, 강경한 회강의 어투에 그를 비롯한 군인들 모두 그를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았지만, 예전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시선들을 받고 살아온 회강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었다.
생각에 잠긴 그에게 이익한의 외침이 들려왔다.
-저기입니다. 저기가 제가 말한 문입니다.-
”회강님 예상과 달리, 문이 열려 있습니다.“
-잠시만 대기. 제가 먼저 갔다 오겠습니다.-
사람들을 멈춰 세운 회강은 반쯤 열린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은 오 센티미터 두께의 검은색 철문이었는데, 이곳저곳이 찌그러져 있었다.
‘대부분이 안쪽에서 바깥으로 친 흔적들이다.’
회강의 시선이 안으로 향했는데, 거기엔 부서진 가구와 자제들이 보였다.
‘십 분에서 이십 분 사이로 괴물들이 나타나서, 연구소에서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우리에게 보내려다 사고가 났을 수도 있다.’
바스락바스락
안으로 들어온 회강. 이리저리 움직이던 그의 눈동자가 한곳에 머무른다.
‘이건 뭐지?’
벽에 그의 엄지만 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무언가가 반짝이는 빛이 하나 있었다.
자세히 보기 위해 다가가던 회강의 눈이 커다래지더니, 오른손을 휘두른다.
쾅!
붉은색 돌멩이가 안으로 파고들어 가고, 잠시 뒤.
그어어어.
연구소 안에서 그의 머릿속을 긁는 듯한 중저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음...“
그가 잠시 경직된 자신의 몸을 푸는 사이, 그의 일행들이 회강의 곁으로 뛰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헉 연구소가...“
-우리에게 괴물을 보내다 당한 건지, 아니면 애초에 이러 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벽에서 이상한 것을 봤습니다. 저곳을 공격하는 순간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더군요.-
”이상한 거라면...“
-눈. 그건 분명 사람의 눈이었습니다.-
”눈이라고요?“
김산수의 물음에 회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벽에 박힌 붉은색 돌을 잡은 회강의 오른팔에 힘줄이 솟아올랐다.
-작은 엄지만 한 구멍에 있었는데, 이것을 뽑으면-
후두둑.
콘크리트 돌가루와 함께, 붉은색 돌이 뽑힌다. 안을 바라본 회강의 눈이 부릅뜬다.
”없는데요?“
잘린 전선만 보일 뿐, 아무것도 없는 벽을 보며 김산수가 중얼거리자, 회강은 입술만 깨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분명히 내가 봤는데...’
”사람이 있을 만한 공간도 없는데요. 그리고 이상한 소리는 뭡니까?“
-낮고 굵은 사람의 목소리였는데, 못 들으셨습니까?-
그의 물음에 김산수가 고개를 젓고, 그와 눈을 마주친 사람들 모두 고개를 젓다. 회강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린다.
‘그럴 리가, 나는 분명 그 소리를 들었는데...’
이마에 손을 올린 회강에게 다가온 리장수가 그의 어깨를 몇 차례 두드린다.
-회강님이 너무 무리하신 것 같습니다. 쓰러진 뒤 일어나자마자 매번 앞장서서 전투를 치르셨지 않습니까. 중간에 쓰러지면 우리 모두 위험하니 이제부턴 뒤에서 계세요.-
”리장수님 말이 맞습니다. 호파람 위에서 쉬고 계세요. 저희가 앞장서겠습니다.“
그들의 말에 회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내가 착각했을 수도 있지...’
그렇게 회강은 호파람 위로 이동하고, 일행은 연구소 안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계속 움직이는 회강일행들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여기 또 시체가 있습니다.-
눈 주변에 피눈물 자국이 있는 시체에 다가간 리장수가 붉게 물든 옷을 뒤적거린다.
-이번에도 신분증이나 수첩 같은 건 없습니다.-
몸을 일으킨 리장수는 뒤에서 그를 지켜보는 자들에게 빈손을 보여주고는 다시 앞장선다.
맨 뒤에는 회강과 김산수가 호구들과 함께 따라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강회강이 자신의 오른손을 휘두른다.
벽으로 날아간 붉은색 돌멩이가 박힌다.
퍽.
자연스레 행렬이 멈추고, 앞에 있던 리장수가 다가온다.
-무슨 일이십니까?-
회강은 벽에 박힌 돌멩이를 뽑은 다음 안을 살펴보더니 얼굴이 굳어진다.
”음...“
-설마 이번에도 헛것을 보신 겁니까.-
리장수의 말과 함께, 다른 이들의 얼굴이 굳어진다.
김산수가 회강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그의 떨리는 팔을 잡아준다.
”혹시 이번에도 소리가 들린 겁니까?“
미미하게 회강의 고개를 움직이자, 김산수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진다.
”하필이면 이때... 분명 머릿속이 나아지고 있다는 좋은 증거지만...“
-정말로 아무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겁니까?-
그의 물음에 모두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회강은 고개를 숙였다.
”후.“
한숨을 길게 내뱉은 회강이 말없이 호파람에게 돌아가고...
일행은 리장수를 선두로 내세우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서가는 리장수에게 김산수가 다가온다.
-회강님이 과거 화재사건에서 다치신 머리가 완전히 낫지 못했습니다. 예전에도 하루에서 사흘 정도는 후유증에 저러셨습니다.-
-저도 어느 정도 방송에서 이야기를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눈앞에서 보니, 주변 분들도 고충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리장수의 말에 김산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회강님의 발목을 잡고 있었지요. 만약 혼자서만 진화를 플레이하셨다면 지금쯤 완전히 회복하도고도 남으셨을 겁니다.-
-하지만, 방송에서 나온 중국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으드득.
-그놈들은 지옥에서 꺼내주고 옷과 주거지까지 마련해 줬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하는 놈들입니다. 회강님이 가지신 지식만 이천 개가 넘습니다. 그것을 무료로 공유해 주다가, 다른 사람들을 구해주느라 주춤한 사이에, 자신들이 얻은 지식을 주려니까 배가 아파서 배신한 거거든요.-
-이천 개라... 무상으로 제공했다면, 저라면 엎드려서 감사의 절이라도 했을 텐데요. 혹시, 지금도 일행을 받고 계시나요? 남은 자리라도 있다면 말단이라도 들어가고 싶습니다.-
리장수가 미소 지으며 한 말에 김산수가 마주 보고 웃었다.
-하하, 저희는 말단 같은 건 없습니다.-
-말단이 없다고요?-
-예. 대신 뛰어난 능력을 지닌 자는 고기 한 덩이 더 얻습니다. 무기도 좋은 돌을 발견하면 우선해서 배분하고요. 하지만,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일행 미래를 결정하는 투표권은 남들과 동일하게 한 표씩 적용됩니다.-
-이거 남조선이랑 통일되면 적응하는데, 수년은 걸리겠습니다.-
-독일을 생각하면 더 걸릴 겁니다. 하지만-
갑자기 김산수에게 리장수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잠시만, 앞 모퉁이에서 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의 말에 김산수를 비롯한 뒤에 있는 군인들 전부 입을 다물었다.
이때.
후웅.
군인들과 김산수 리장수를 은빛의 선이 지나가더니 모퉁이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죽어라!“
낮지만 강렬한 외침이 들려옴과 동시에 모퉁이 부분이 무너지더니, 리장수를 향해 무언가가 날아왔다.
”악.“
”컥.“
리장수의 팔이 기형적으로 꺾이더니, 김산수와 함께 뒤로 뒹굴었고, 그들 뒤에서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올린 군인 두 명도 양쪽 벽으로 날아가 부딪힌 다음 몸이 축 늘어진다.
순식간에 벌어진 참상에 모두가 정지됐을 때, 뒤에서 회강이 외침이 들려왔다.
”피해!“
그제야 멍한 눈빛들이 정상으로 돌아온 군인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나타난 존재를 보고, 다시 넋을 놓게 되는데...
그들이 보는 곳엔 인간의 상체에 여러 모양의 팔들이 합쳐진 한 괴물이 있었다. 눈 부위는 움푹 들어가 있었고, 하반신엔 삼 등급 거인의 다리가 달려 있었다.
놈은 붉은색 돌멩이가 쌓여있는 돌무더기 옆에 서 있었는데, 놈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놈은 자신의 가슴에 박혀있는 반달돌칼을 뽑고선 입을 벌렸다.
”죽어라!“
”크윽.“
”악.“
군인들이 머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리자, 놈의 얼굴에 미소가 맺힌다.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놈의 목소리가 연이어 나오자, 군인들은 끝내 무릎을 꿇게 된다. 그러자 그들을 향해 피가 흐르는 반달 돌칼을 겨눈 놈이 팔을 휘둘렀다.
후웅.
맨 앞에 있는 군인의 머리를 향해 날아가는 반달 돌칼. 군인은 두 머리를 부여잡고 있을 뿐 움직이지 못했다.
이때, 그의 앞으로 강회강이 나타난다.
탁.
그는 손쉽게 맹렬하게 회전하던 반달돌칼을 잡더니, 바로 앞으로 뛰쳐나갔다.
반쯤 다가갔을 때, 놈의 몸이 살짝 빛이 나더니, 몸이 회전함과 동시에 팔들이 옆에 있는 돌멩이들을 잡았다. 그리고 놈에게서 많은 양의 돌멩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훙훙훙훙.
그에게 날아오는 돌멩이들을 보고 강회강은 움직이려다 멈칫한다. 그리고...
팍팍팍.
수십의 돌멩이들이 회강을 비롯한 주변을 타격했고, 동시에 통로 안이 먼지구름에 가득 차자, 뒤에 있던 김산수가 손을 내밀며 절규했다.
”회강님!“
”으하하하.“
낮고 강한 사내의 웃음소리가 통로를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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