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나와 같은 이들.
*12*
마당에서 회색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치~~
삼겹살이 입에 침을 고이게 하는 소리를 내며 노릇노릇한 빛깔로 변하고 있었다.
그것을 모든 이들이 쳐다보았다.
그건 휠체어에 앉혀진 회강도 마찬가지였다.
‘먹고 싶다.’
구수한 향기가 콧속으로 들어와도 움직일 수 없는 자신의 현 상황이 그는 너무 원망스러웠다.
그런 회강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른 이들은 게걸스럽게 불판에 올려있는 고기를 집어 들더니 맛나게 쩝쩝거리며 먹는다.
그들 중 이필상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각자 벌려놓은 일들이 자리를 잡았으니 중국인이나 일본인 중 한 곳을 이곳으로 부르자는 겁니까?”
그의 말에 남연희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제가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양쪽 모두 대도시에서 숨어있는데, 조폭들의 추격을 피하는 데 많이 지쳐 보였어요.”
그들 사이로 한 남자가 끼어들었다.
“확실히, 분리된 데다가 촌뜨기에 불과한 우리 쪽 조폭보다는 연계가 잘 되어있는 그쪽들이 훨씬 더 무섭지. 물론 한국도 무섭긴 매한가지지만, 뭐랄까 약간 더 촘촘하다랄까? 그런 느낌?”
안경 쓴 삼십 대 사내의 말에 이필상이 피식 웃는다.
“아니 그리 잘 아시는 분이, 왜 항구에 있는 조폭 끄나풀도 못 알아봐서 다시 잡힐 뻔했습니까.”
“이필상! 너 이 자식 꼭 말을 그렇게 해야겠냐.”
“필상씨 준엽씨에게 말이 좀 심하셨어요. 사과하세요.”
“확실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사실처럼 이야기해서 그렇지. 남연희 너도 알잖아. 그날 차준엽의 말을 믿었다가 어찌 됐는지.”
“그건...”
이필상의 이야기에 남연희가 말을 흐렸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그의 말에 부정하지 못한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이들을 보던 차준엽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그래! 나는 제대로 배우지 못한 촌놈이라서, 저딴 대학물 먹은 놈과 달리 이것저것 주워들은 것만 말할 줄 안다. 하지만 당신들도 내 말을 듣고 이득 본 것도 많았잖아. 왜 맨날 나랑 최성국만 타박하는데. 왜!”
“준엽아. 어디가.”
“준엽씨!”
유남과 남연희가 불러보지만, 그는 대문을 통해 나가버렸다.
“필상아. 꼭 말을 그렇게 해야 했냐.”
“유남 어르신. 우리는 현재 조폭, 병원, 영교 이 세 가지 세력에게 쫓기고 있습니다. 게다가 메시지의 도움 없이 이번 일을 추진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스스로 확인도 하지 않은 정보를 사실인 양 말하는 것은 자제해야 합니다. 모두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어요.”
“그렇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듣던 회강은 이필상을 바라보았다.
‘틀린 말이 아니야. 주변인들도 생각해야지. 확실히 저자가 나보단 생각이 깊어. 좋은 리더다.’
같이 지낸 지 삼 주밖에 안 되었지만, 사려가 깊고 통찰력이 높은 사내였다. 회강도 현실에서 주변인과 이야기하는 이필상의 말을 듣고는 진화 속 자신의 행동을 고쳐나갔고, 덕분에 오십 명이 넘는 무리를 유지 시킬 수 있었다.
‘저런 자가 공황장애 때문에 사회에서 일하지 못했다니. 아쉽네... 하지만 만약 나였다면 남연희처럼 말했을 것이다.’
그의 귀로 갑자기 남연희의 고성이 들려온다.
“당신이 이래서 이기적이라는 말을 듣는 거예요. 우리가 좀 더 노력하면 충분히 그들까지 품을 수 있어요. 가능성이 있는 일을 왜 하지 말자고 하는 거죠?”
그녀의 말이 딱 회강의 생각과 같았다.
‘맞아. 능력도 없는 것도 아니고 또-’
“남연희씨. 저는 당신의 그런 생각이 더 이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뭐?’
회강의 시선이 놀란 표정의 남연희에게서 이필성에게로 옮겨갔다. 그는 오른팔을 주변 사람들을 향해 뻗었다.
“가능성 하나 때문에, 모두를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으십니까? 만약 일이 꼬여서 그들에게 잡힌다면 더 끔찍한 일을 겪을 겁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강회강님도 구하지 말았어야죠.”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가 전달되었죠? 은신처에 돈까지 제공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상당히 급하게 나오느라 제대로 된 자금도 챙기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린,”
목이 말랐는지, 잠시 침을 삼킨 그가 이어서 말했다.
“우린 변이 억제 가능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섬을 탈출할 때 비용을 지급하는 바람에, 그때까지도 마이너스였지 않습니까.”
‘마이너스? 진화가 이들에게 대가를 받은 거였어?’
몰랐던 사실에 안 회강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사이 이필상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상황을 보다 말릴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유남 어르신을 비롯한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대충 구해주는 흉내만 내도 손해 보지 않겠다 싶었지요...”
“헉... 그럴 수가.‘
그의 말에 그녀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동시에 회강의 마음도 덜컥 내려앉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게임과 달리 현실에서는 가치관이 다르다는 건가.’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회강의 마음은 착잡했다.
‘결국... 이들도 나와는 다르다는 건가.’
회강이 깊어진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남연희는 거칠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에요. 우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회강씨를 구해주려고-”
“우리가 왜 현실에서 강회강님을 구했겠습니까... 그러는 당신은 정말로 순순하게 그를 도운 겁니까? 조금의 이득도 바라지 않았다고요? 당신도 변이 억제 시간이 마이너스였지 않습니까. 우리보다도 더 심했던 거로 알고 있는데요.”
“그건...”
그녀의 눈동자가 아래로 내려간다.
“순수하지 못하다고 부끄러운 건 아닙니다. 우리 모두 생존을 중요시하는 이기적인 인간일 뿐이니까요. 중요한 건 그 과정에서 다른 이에게 피해를 최대한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만 지킨다면 저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선언하듯 말하는 이필상의 말에 모두의 눈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말이 회강의 가슴에 파고들어 왔다.
‘오히려 내가 이기적이었던 것일지도 몰라.’
그가 남을 구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두었듯이, 어떤 이들은 눈앞에 있는 일행들처럼 자신과 소중한 이들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삼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이 과연 틀린 걸까? 나도 죽기 싫어서 발악했는데...’
회강은 눈을 감았다.
‘생존을 우선시한 이들까지 싸잡아 비난한 내가 잘못이었어.’
자신의 잘못을 깨닫자마자, 그간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이 누군가의 방해로 오지 못했던 건 아닐까.’
‘그들 자신의 가족들을 건사하기도 힘든 상황이 아닐까?’
‘양의는 보육원에 강제로 보내졌을 수도 있어.’
‘모두 무사해야 할 텐데.’
정확한 정보도 없이 욕하고 비난만 한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된 회강이었다.
‘내가 매우 어리석었어. 그리고,’
회강이 눈을 떴을 땐, 그의 앞에서 일행들이 물건을 치우고 있었다.
‘이들에게 내가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자. 물론 지금 말고, 중국인들에 대한 결정이 내려진 뒤에 표현해야겠지.’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그들의 마음을 더욱 번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 뒤에, 양의나 이미소씨에 대한 행방도 물어볼 수 있으면 해야겠어. 또...’
상념에 빠진 그에게 붉어진 눈을 한 채 남연희가 다가온다.
“일어나셨어요. 맛나게 먹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싸우는 것만 보여줬네요. 제가 TV가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옮겨 드릴게요. 오늘 제가 보여드릴 프로그램은...”
‘일단은 남연희의 입부터 막아달라고 해야겠다.’
그는 그 뒤로도 2시간을 넘게 수다를 듣고 있어야만 했다.
밤이 다가오자, 모두가 자리에 모였다.
안방과 거실에 걸쳐서 앉은 그들은 말없이 가만히 앉아있었다.
유남이 일어서더니 두 손을 들고 손뼉을 마주친다.
짝짝.
모두의 시선이 모이자, 그가 입을 연다.
“자자. 모두 각자의 이야기는 들었을 테고, 어찌할 건지 투표를 통해 결정하도록 하세나. 기권은 없네. 알겠나?”
사람들이 고개를 끄떡이자, 유남이 손을 들었다.
“그럼 섬에서 해왔던 대로, 오른손 왼손 동시 거수일세. 오른손이 그들을 구하자, 왼손이 일단 이곳에서 완전히 자리 잡자, 이렇게 나누어지는 거야. 다시 말하겠네. 오른손이...”
잠시 뒤. 유남이 양손을 머리위로 들어 올린다.
“생각할 시간은 충분했으니까. 바로 투표를 하도록 하지. 셋을 샐 때. 동시에 손을 들자고. 하나~ 둘~ 셋”
결과를 확인한 유남의 눈이 커다래진다.
그리고 그건 종일 시무룩해 있던, 차준엽, 남연희, 최성국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그들 앞에 있는 사람들 오른손을 들고 있었다.
“우와와”
“꺄아악”
좋아하는 세 사람을 보며 모두 미소 지었다.
*13*
‘이상한 사람들이다. 특히 이필상 저자는...’
온종일 다른 이들을 설득하고 의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남연희의 의견에 반대하더니... 드라마에나 나오는 나쁜 남자 코스프레라... 온몸이 오글거린다.’
회강의 안위도 걸려있는 일이긴 했지만, 그들이 물어보지 않았다고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내 의견도 다르지 않으니까.’
그들의 의사결정을 보면서 회강은 느끼는 것이 많았다.
‘박정근님도 그랬고... 그동안의 나는 너무 독단적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인에게도 영향을 주는 일들이 많이 있었다. 그것을 그들과 상의도 없이 스스로의 생각을 우선해서 결정해왔다.
‘만약 내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화가 났겠지.’
그에 반해, 자신에게 조언을 해주고 응원을 해주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회강과 달리 옹졸하고 이기적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배려를 하지 못한 것 같아.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변인들도 그들의 고통을 나눠서 짊어진다는 사실을 잊었어.’
그의 눈앞에 웃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회강은 자신을 떠나간 이들이 너무 그리워졌다.
‘보고 싶구나... 아무튼 오늘 일과도 끝났으니-’
치지직 지직.
유남의 뒤편에 있던 TV 쪽에서 난 소리에 모두의 고개가 돌아간다.
‘누가 켠 거야? 자정이 거의 다 돼서 방송국도 다 종료했는데.’
그와 마찬가지인 사람들이 많았는지,
“누가 켰어?”
“아니. 너니?”
그의 눈앞에 있는 사람들도 고개를 돌려가며 물어보고 있었다.
그사이, 유남이 TV를 끄려고 다가간다.
“TV가 오래돼서 그런가. 갑자기-”
[안녕들 하신가.]
“으허억.”
커다란 비명을 지른 유명이 뒤로 넘어진다.
시야를 가리고 있던 그가 사라지자, 회강은 TV에서 익숙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더벅머리를 한 흰 가운을 한 노인. 과거 자신의 눈앞에서 자살했던 노인이 있었다.
[이 영상이 틀어질 때쯤이면 일 년 정도 흘렀겠지.]
“이 사람. 그때 그 사람이에요.”
“그 새끼다! 우리를 이 꼴로 만든 놈이야.”
“맞아. 이 우라질 새끼. 죽은 줄 알았더니 살아있었네.”
[아마 대다수는 이 진화라는 게임 때문에 변이되고 있다고 생각할 거야? 그렇지?]
“그래 이 새끼야.”
“무슨 원한이 있다고.”
몇몇 고함을 지르는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말없이 TV만 바라보고 있었다.
TV속 노인이 비웃었다.
[크크.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진실을 이야기해 주고 싶지 않지만, 딸의 유언에 따라 이번 영상에서 공개하도록 하지. 변이의 원인은]
말하는 노인의 입꼬리가 더욱 치켜 올라간다.
[너희 인간들이야.]
‘뭐... 뭐라고!’
“개소리!”
“음...”
[체르노빌 원폭 이후, 꾸준히 그 지역을 관찰해온 나는 놀라운 것을 발견했지. 그건 바로 사라지는 식물이었다.]
그가 손짓하자, 카메라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거기엔 나뭇잎, 줄기, 뿌리 모든 곳에서 벌레가 갉아먹은 듯이 군데군데 사라진 부분들이 보였다.
[처음에는 빛을 그대로 투과하는 식물로 추측했지, 이렇게 만져보면 나무줄기가 만져졌거든.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내 눈에 저 나무가 온전한 형태로 보이더군.]
카메라가 다시 노인을 비추고, 그는 왼손 검지로 자신의 눈을 가리킨다.
[내가 늙어서 미쳐간다고 생각했는데, 오래간만에 찾아온 내 딸도 보인다는 거야. 그런데 그 옆에 있는 아이는 보이지 않는다고 웃기지 말라고 하더군. 그때부터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심상치 않은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았지.]
그가 옆으로 이동했다, 거기엔 각종 실험 도구로 가득했다.
[그 뒤로도 여러 친한 이들에게 보여줬는데... 정부에서 관심을 가지더군. 나는 혼자선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흔쾌히 이와 똑같은 식물을 그쪽에도 보냈지. 그리고 미국에서 온 과학자들과 함께 연구를 시작했고... 그 결과는... 자네들의 휴대폰으로 전송될 것이야.]
노인이 눈을 감았다.
[그때 내 주장을 믿지 않았던 과학자 녀석들아, 내 딸이 자신의 몸을 희생해서 새로운 힘을 이용할 줄 아는 진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면 너희들도 다 죽었어. 그리고-]
[띠띠띠]
화면에서 비상소리와 함께 노인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진화가! 화야~ 화야~]
애절한 그의 목소리와 함께, 동영상은 정지되었다.
그리고...
TV에서 한 줄의 메시지가 나타났다.
-한 달 뒤, 진화 시즌 2가 시작됩니다.-
그것을 본 모두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리고 회강의 가슴속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드디어!’
- 작가의말
12월 5일 날 돌아오겠습니다.
그사이 다른 좋은 작품으로 마음을 정화하신 다음,
이곳으로 오신다면 여러분들이 바로 부처가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부처가 아니니 안 오시려나.
그러진 마시고. 다시 돌아와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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