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장
TS 회의실.
회강이 상석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이제야 오는군...’
문이 벌컥 열리더니, 유의명이 뛰어들어온다.
“회강님! 누가 우리 이름을 빌려서 인터넷에 정보를 뿌렸습니다. 어떻게 해야...”
점점 목소리가 줄어드는 그에게 회강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손만 뻗어 왼쪽을 가리킨다.
-의명님이 마지막입니다.-
“다들 모여 있었군요. 저는 연락을-”
-산수님을 제외하고 나머진 뉴스를 보고 온 겁니다. 유의명님이 제일 늦으셨군요.-
“그렇습니까? 제가 오늘 속이 좋지 않아서 화장실에 있는 바람에 보고를 늦게 받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이유는 없지요. 어서 앉으세요.-
“예...”
머쓱한 표정을 지은 그가 자리에 앉자 회강이 쓴 메시지가 회의실 중앙에 커다랗게 떠오른다.
-이제 다 모였으니,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회의 내용은 이번에 공개된 동영상에 따른 우리 TS쪽 견해 발표 건과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겁니다. 이에 대한 의견이 있으신 분은 앞에 있는 버저를 누르신 후 말씀해 주세요.-
그의 메시지가 끝나자마자, 김산수의 이름이 허공에 떠올랐다.
“이번 동영상 건은 제가 한 짓입니다.”
“뭐라고?”
“그게 사실입니까?”
다른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유의명이 벌떡 일어섰다.
“아무리 회강님의 측근이라 하지만, 이렇게 무단으로 아무 상의도 없이 저런 정보들을 공개하면 어떡합니까!”
“죄송합니다.”
“죄송하단 말로-”
-그만 하세요. 현재 발언권은 김산수에게 있습니다. 그의 말을 다 들어보고 버저를 누른 다음 의견을 말해주셨으면 합니다.-
“음...”
유의명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더니, 천천히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김산수님 말씀하세요.-
“예. 원래는 다른 분들과 함께 의논하려 했지만, 아직 공개하지 않은 새로운 사실 때문에 부득이하게 인터넷에 동영상을 퍼뜨리게 됐습니다. 그럼, 제가 입수한 정보를 공개하겠습니다.”
그가 잠시 앞에 있는 기기를 조작했고, 이내 회의실 한쪽에 배치된 커다란 모니터에 동영상이 하나 재생되었다. 그리고 화면에 나타난 장면을 보고 회강과 김산수를 제외한 모두의 눈이 동그래진다.
“저자는!”
“최변인이 아닙니까!”
몇몇 사람들의 외침에 김산수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다. 관악산에 숨어 들어갔다는 최변인이 사실, 상대 쪽 기업들과 연계를 통해 우리 TS를 압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에잇!”
“제기랄!”
회의실에 있던 사람 중 삼 분의 일 정도가 벌떡 일어나더니, 자리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이미 걸렸는데 도망치려고? 설마 여기가 어딘지 잊은 건 아니겠지?-
같은 내용의 메시지가 그들 눈앞에 나타나자, 그들은 그 자리에 멈춰선 채 눈물을 터뜨렸다.
“윽.”
“회강님, 죄송합니다. 제 어미가 큰 병이 걸려서...”
“흑흑.”
“아... 전에 돈만 받아먹지 않았어도.”
“전 그를 사랑한 죄밖에 없다고요.”
그들의 모습에 나머지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유의명의 입가에 검은 손수건이 나타났다.
“회강님 제가 아끼던 사람들이 살피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당신이 연루되지 않았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단지, 잘못이 하나 있다면 그들을 너무 믿었다는 겁니다.-
그의 메시지를 유의명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지도 않고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그러자, 회강은 살짝 몸을 움직여 직접 그의 피를 닦아주었다.
-물론, 그게 당신 잘못은 아닙니다. 사람을 믿는 사람을 이용한 짐승들이 잘못한 겁니다.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마시고, 앞으로도 계속 자신의 사람을 믿으세요. 감시는 수장인 제가 하겠습니다.-
으드득.
“저는 지금이라도 저놈들의 면상에 주먹을 갈기고 싶은데, 회강님은 어떻게 참으신 겁니까. 그 오랜 세월을 어떻게...”
-그때는 약자였으니까요. 살고 싶으면 참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힘을 가지셨을 때도 참으셨지 않습니까. 벌이라고 해봤자, 법의 범주 안에서 끝내주시고 용서까지... 큭. 저는 그리 못 할 것 같습니다.”
-저들이 아닌 주변 사람들을 떠올리면 참아지더군요. 사랑하는 사람들과 살려면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그들이 하나씩 하나씩 저를 떠날 테니까요. 그리고 저는 짐승이 되겠죠.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는 동물이니까요.-
“음...”
-아무튼 저는 기쁩니다. 각종 도청이나 불법 기기들도 수거를 완료했고, 내부 배신자들도 모두 잡아냈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기쁩니다.-
“그라면...”
“최븐인.”
낮게 깔리는 그의 목소리에 유의명이 움찔했다.
-이제 다시는 그를 놓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끝낼 겁니다. 그도 그리고 저의 과거도.-
메시지가 사라지고, 이내 울부짖던 이들도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뒤 모두가 사라지고...
흐트러져 있던 문서 하나가 덩그러니 회강 자리에 놓여있었다.
거기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었다.
-최변인 구속 작전-
*7*
회강은 우두커니 전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다.’
검은색 돌 지대 너머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곳이 있었고, 그 너머엔 온통 푸른 물밖에 없었다.
‘현실이랑 다르지 않아.’
휘이잉.
칼바람과 함께, 짠 내가 그의 콧속으로 파고들어 오자, 그가 얼굴을 찌푸린다.
‘강보다 여기 바람이 더 매서운 것도 마찬가지고. 그나저나, 어떻게 이 아래로 내려가지.’
몸을 둘러싼 가죽을 여미며, 회강은 주변을 살펴본다. 그의 앞에는 거의 수직과 다름없는 경사를 지닌 절벽이 있었는데, 줄 없이는 쉽게 내려갈 방법이 없어 보였다.
‘줄의 재료가 있는 나무나 덩굴들이 있는 것도 아니니, 내려갈 만한 곳을 찾을 때까진 계속해서 이동해야겠어. 그럼 오늘은 여기서-’
회강의 생각은 검은 돌들이 있는 곳에 나타난 한 그림자를 보는 순간 멈추게 된다.
‘저게 뭐지? 유인원인가?’
그가 눈에 힘을 집중하자, 시야가 순식간에 확대됐고, 그는 그림자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작은 체구의 유인원이다. 여성형에, 털도 나보다 거의 없고, 손과 발도 거의 없어. 새로운 진화형태인가? 아니면- 헛, 사라졌다.’
시력이 좋은지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자는 돌 뒤로 숨어버렸다.
그 뒤로 계속해서 주시했지만, 노을이 질 때까지 다시는 그가 찾는 유인원은 나타나지 않았다.
‘바람이 더 매서워지고 있다. 일단 오늘은 뒤쪽에 살펴둔 바위에서 자고 내일 여기로 다시 와보자. 만약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발견하지 못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거야.’
생각을 마친 그는 뒤로 움직였고, 고원지대에서 마지막 밤을 보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고원지대를 지나오면서 죽은 나뭇가지들만 모아서 만든 바람막이 울타리와 넓적한 돌들로 호구들과 회강이 잘 수 있는 장소를 만들었다.
그사이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지고, 울타리 바깥에서 모닥불을 지피고선 회강은 눈을 감았다.
회강이 눈을 떴다.
‘누군가 다가온다.’
조심스럽게 무기를 손에 쥔 그는 울타리 틈새로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본다.
‘저긴 밤에 피운 모닥불이 있었던 곳인데.’
짙은 안개로 인해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작은 체구의 유인원이 분명했다.
‘혹시, 어제 보았던 그 사람인가?’
회강은 모닥불 근처에서 움직이고 있는 상대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울타리를 넘어갔다.
다가갈수록 자신에게 등진 상대의 모습을 보던 회강은 움찔한다.
‘피부가 물고기 비늘과 비슷한데... 털은 확실히 현실 속 인간과 비슷한 수준이다. 역시 나보다 더 높은 단계의 진화 형태인 건가? 아니면 거인과 비슷하게 단순히 괴물이 된 걸까?’
궁금한 게 너무나 많았지만, 일단 상대가 의사소통이 가능한 존재인지부터가 우선이었다.
‘기습이 좋지만... 내가 다가오는 것도 모를 정도의 상대라면, 대화를 시도하는 게 맞겠지.’
회강은 혹시 모를 상대의 대응에 대비해 전신에 힘을 준 다음, 입을 오므렸다.
“휙.”
“카!”
상대가 괴상한 비명과 함께 앞으로 쓰러졌다. 그러고서 상대가 미동이 없자, 회강의 눈이 동그래진다.
‘뭐야!
회강이 황급히 다가가 상대를 뒤집었다.
’다행히 숨을 쉬고 있군. 그리고 어제 본 그 유인원이 맞네.‘
여성체의 몸에 특이한 모양의 손과 발까지 모두 어제 보았던 유인원과 같았다.
“풋.”
그러다 상대가 검은 재로 뒤덮인 모습을 보고 미소 지은 회강이, 상대를 바르게 땅바닥에다 눕혔다. 그리고 여분의 가죽으로 상대의 얼굴을 닦은 회강.
’앳된 걸 보니, 어린아이군. 그러고 보니 허리에 주머니가 있네. 그러면 플레이어거나, 혹은 그들과 같이 산다는 건데...‘
회강은 예전에나 쓰던 질긴 나뭇잎으로 만든 주머니를 벌려보았다.
’여기도 물고기를 구워 먹는군. 기술 수준은 나보다 못한 것 같고... 이건 뭐지?‘
안에 있던 물건들을 살펴보던 회강은 그중 한 개를 꺼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특이한 돌멩이랑 다른 빛인데.‘
그가 동굴에서 가져온 돌멩이와는 달리, 노란빛으로 반짝이기는 했지만 스스로 빛을 내지는 못했다.
유인원의 주먹만 한 돌멩이를 이리저리 만져본 회강은, 이내 흥미를 잃고 그것을 주머니 안에다 넣는다.
’색이 예뻐서 보관해 놨나 보네. 혹시 모르니 나중에 그게 뭔지 물어보자.‘
주머니를 다시 그녀의 허리에 차준 회강은 몸을 일으켰다.
“으가가.”
기지개를 켜며 자연스레 신음을 내뱉는 그.
’그럼, 불을 피우고 음식을-‘
뎅.
순간 귓가에 들려온 익숙한 소리에, 회강은 고개를 앞으로 숙였다.
쉬익. 꽈직.
그의 등을 스치고 지나간 검은 촉의 화살이 울타리에 부딪히자, 안에서 자고 있던 호구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삐삐. 컹컹. 휙휙.
그사이 바닥에 있는 아이를 들어 올린 회강은 눈앞에 아른거리는 그림자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열 명은 넘어-‘
“우끼!”
쉭쉭쉭쉭.
갑자기 전방에 나타난 검은 점들의 모습에 회강의 상체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검은 촉의 화살들을 피한 회강은 입을 오므린다.
“휙휙.”
그의 휘파람에 호구들이 자신들이 지나왔던 곳으로 뛰기 시작했고, 회강이 뒤따라 움직였다.
쉭쉭.
지그재그로 뛰는 회강의 움직임 때문인지, 화살촉은 그를 맞추지 못했다.
마침내 그는 짙은 안개 속으로 무사히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조금 뒤...
그의 눈앞엔 하나의 메시지가 떠오른다.
*금에 미친놈들에게서 저를 구해주세요* [진화 중재]
<내용>
-남혜원이 속한 일행은 머물고 있던 동굴에서 금이라고 추정되는 물체를 발견한다. 처음에는 빛에 반짝이는 돌멩이라고 단순히 생각했지만, 지니고 있으면, 매일 조금씩 줄어드는 [업]의 양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이후, 그들은 현실과 가장 비슷한 [금]이란 명칭을 돌멩이에 붙이더니, 금을 캐는 데 주력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서로 금을 가지기 위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계속되는 싸움과 이를 말리던 남혜원의 부모가 현실에서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죽자, 이를 싫어한 아이는 금을 모두 없애기로 한다.
“싸우는 어른들 모두 미워!”
마침내, 아이는 그들의 금을 모두 자신만의 비밀장소에 숨기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돌아가신 자신의 부모가 준 돌멩이는 차마 그 안에다 넣지 못했고, 그걸 어른들에게 들키게 된다.
-자세한 내용을 전달할 능력을 지니지 못한 호구를 진화가 대신 중재 중입니다. 아이를 보호하시겠습니까?
그것을 본 회강은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이미 보호하고 있다! 이 음흉한 녀석아.‘
-사랑합니다. 회강님. ♥
메시지를 보는 회강의 입가에 미소가 맺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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