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장
*2*
덜그럭덜그럭.
소리가 나는 곳엔 아담한 크기의 꽃 괴물이 있었는데, 다리와 팔엔 철과 천으로 감싸져 있었다. 이제까지의 꽃 괴물들과는 달리 인간처럼 걷고 있었고, 심지어 예전에 유행했던 노래까지 부르고 있었다.
“불.장.난.~”
그런 꽃의 모습에 회강일행은 웃으며 보고 있었다.
회강은 맨 뒤에서 호파람 등 위에 누워 있었는데, 그의 곁으로 김산수가 다가왔다. 그가 회강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덩굴 자국이 보이지 않았지만, 혹시 몰라서 꽃이 있던 자리는 모두 불태웠습니다.-
-잘했습니다. 뛰어오느라 힘드셨을 텐데 호파람 위에서 잠시 쉬세요.-
그의 메시지에 김산수가 고개를 젓는다.
“아닙니다. 계속 싸우느라 지친 호돌이 들이, 쉬는 게 더 나아 보입니다.”
김산수의 대답을 들은 회강의 눈동자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예전엔 체력이 부족해서 항상 헉헉댔는데, 요즘엔 잘 버티고 계시는군요. 온몸에 근육 양도 전보다 늘어난 것 같고요.-
“회강님 조언에 따라서 현실에서도 운동했더니, 확실히 요소 단계도 더 빨리 오르고 몸도 많이 좋아졌습니다.”
회강은 밝은 그의 표정에 미소 지었다.
-꾸준히 하신다면 나중에 강한 존재들이 나타나도 자신의 가족은 지키는 데 무리는 없을 겁니다.-
“예... 그렇죠. 근데, 저놈 잘 걸어 다닙니다. 혹시 다른 꽃들도 저럴 수 있지 않을까요?”
미간을 좁히며 하는 말에, 회강은 고개를 저었다.
-녀석들의 뿌리는 저 녀석보다 훨씬 크고 길었습니다. 기생충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꽃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연한 사고에 의해 만들어진 괴물이 아닐까 예상해 봅니다.-
“음... 우리가 죽였다면 정말 억울했겠군요.”
-하지만, 리장수님의 의견으로 싸놓은 저것 때문에 아직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으니, 방심은 금물입니다. 불러도 멀찍이 서서 대화를 나누세요.-
“예. 명심하겠습니다.”
둘이서 대화를 하는 사이, 앞에 있던 리장수가 다가왔다.
-김산수 동무가 아주 꼼꼼하게 일을 처리해서 곤혹스러울 정도였다고 부하가 말하더군요. 혹시, 나중에 통일이 된 후, 저희 남포시에 오시면 좋은 자리 하나 줄 텐데, 오실 의향은 있으십니까?-
그의 말에 김산수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말씀은 정말 고맙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역시 회강님 때문에?-
“큰 은혜를 입어서, 평생을 갚아도 모자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만 권유해 주세요.”
-그렇군요. 회강님 부럽습니다. 싸움도 어느 정도 잘하는 데다가 임기응변도 능하고, 추가로 꼼꼼한 사람인 자는 구하기 힘든데, 혹시 추천할만한 사람이 있으면,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중에 찾게 되면 알려드리죠. 그나저나 생각보다 미로로 만든 곳이 너무 큽니다. 큰 방도 세 군데나 지났는데, 아직도 헤매고 있으니 답답하네요.-
“근데 원래 미로라면 이리저리 헷갈리게 가도록 하는 곳을 말하는 게 아닙니까?”
-저도 그게 맘에 걸려서 이익훈 동무에게 물어봤지만, 분명히 자신은 미로라고 들었답니다.-
“음... 연구원들이 미로의 뜻을 모를 리는 없고, 아직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쿵.
이때, 맨 앞쪽에서 큰 소리와 함께, 먼지구름이 피어나왔다.
순식간에 앞으로 뛰쳐나간 회강은 바닥에 떨어진 넓은 판자를 잡고 휘두른다.
훙훙.
그가 만든 바람에 먼지구름이 흩어지고, 기침하는 군인들과 막힌 통로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를 지나쳐 달려간 리장수가 돌도끼를 벽을 향해 휘둘렀다.
쿵쿵.
몇 번 내려찍던 그가 물러나더니 고개를 젓는다.
-통과는 못 할 것 같습니다.-
“이래서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되는데, 죄송합니다.”
-어차피 내려올 벽이었습니다. 죽거나 다친 사람이 없으면 된 거니 괘념치 마세요.-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산수의 어깨를 두드려준 회강이 앞으로 걸어갔다.
벽 앞에 선 회강의 주먹에 빛이 생겨나더니, 주먹을 내지른다.
쾅.
회강이 친 곳을 중심으로 대각선으로 길게 균열이 나게 된다.
그그그. 쿵.
천천히 뒤로 미끄러지더니 사람들이 통과고도 남을 만큼의 공간이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본 리장수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오십 센티는 넘어 보이는데... 대단하십니다.-
-꾸준히 노력하신다면 나중에 저처럼 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때는 회강님은 더욱 강해져 있겠지요?-
리장수가 웃으며 하는 말에 살짝 미소 지은 회강. 그들 옆으로 김산수가 다가왔다.
“이게 우연이 아니라면 우리를 보고 누군가 버튼을 내렸다는 건데, 혹시...”
그가 말을 흐리자, 회강이 고개를 저었다.
-녀석은 아닙니다. 제가 쭉 보고 있었는데, 무리 가운데서 걷기만 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연구원이 일부러 내렸거나, 괴물들의 난동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고, 상황을 나눠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의 말에 회강과 리장수의 얼굴이 굳어졌다.
-여길 부수느라 제힘도 어느 정도 소비했고, 다른 일행들도 이제 많이 지친 상황 아닙니까. 우선, 여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 어떤 이유에서든 한 자리에 계속 있으면 위험하니 움직이죠.”
-저도 동의합니다. 군인들에게 넘어가라고 말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리장수가 군인들에게 다가가 말을 하기 했고, 그사이, 그들 가운데 있던 꽃이 회강에게 다가왔다.
“회강아저씨.”
-왜. 그러냐.-
“저기 위에 이상한 선이 하나 있어요.”
꽃의 말을 들은 김산수가 고개를 위로 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아니에요. 검은색 선이 보인단 말이에요.”
꽃의 말을 듣자마자 회강이 위를 쳐다보았다.
“음...”
회강의 신음에 김산수의 얼굴이 굳어진다.
“회강님은 보이시는 겁니까?”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은 회강. 그는 꽃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메시지를 허공에 띄웠다.
-너는 저 선이 보이는 거냐.-
“네...”
말을 흐리는 꽃.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김산수가 회강을 바라본다.
“회강님과 꽃만 볼 수 있는 겁니까?”
-사실, 팔이 여러 개 달린 괴물을 죽일 수 있었던 것도, 검은색 선을 봐서 그런 겁니다.-
“그걸, 왜 이제야 말씀하신...”
김산수가 리장수가 다가오자마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회강과 김산수를 보고 있던 꽃도 입을 다문다.
-회강님 저희가 먼저 넘을까요? 아니면 먼저 넘으시겠습니까?-
그의 물음에 회강은 미소 짓더니,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섰다.
-먼저 넘으세요. 저랑 김산수가 뒤를 지키겠습니다.-
-그래도...-
-꽃을 감시하려면 제가 뒤에 있는 게 좋습니다.-
리장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군인들에게 손짓한다.
-동무들 먼저 넘겠습니다. 빨리 움직이세요.-
군인들이 움직이고, 리장수를 필두로 군인들이 모두 넘어갔다.
모두 넘어가자마자, 회강이 메시지를 띄웠다.
-너 몇 시간밖에 기억이 없다는 거 거짓말이지?-
꽃의 몸체가 크게 움찔했다.
“...아니에요.”
-더는 거짓말 하지 마라. 마지막 경고다.-
그의 선언에 꽃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와 동시에 놈이 다리 한 짝을 벌리더니 덜덜 떨기 시작한다.
“아 놔. 병신같이 걸려버렸네. 꼰대, 어떻게 안 거야?”
-검은 선은 내뿜는 팔 여러 개 달린 놈이 허술하게 선 관리를 하다 죽었지. 그렇다는 건 방금 만들어진 괴물은 자신이 생각한 선은 보지 못했다는 거고, 그렇다면 너도 그래야 하는데, 지금 그걸 봤다고 네가 시인했잖아. 그리고 또-
그가 메시지를 다 적기도 전에, 꽃이 땅바닥에 침을 뱉는 시늉을 했다.
“젠장. 눈알 뽑고 다니는 놈을 내가 잊고 있었네. 그나저나 왜 나를 죽이지 않은 거지? 꼰대 성격이라면 나 같은 존재는 즉참 아닌가?”
-안 죽일 테니 뻗대지 마라. 그러다 나한테 맞는다.-
“거짓말하지 마, 내가 어른들에게 한두 번 속는 줄 알아? 나 놀릴 생각하지 말고, 어서 죽여!”
꽃의 강한 외침에 김산수가 무기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꽃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맺혔다.
“거봐,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죽여! 어서 죽이라고!”
잎사귀가 달린 줄기를 내미는 모습에 김산수가 얼굴이 일그러지자, 회강이 손으로 그의 앞을 막았다.
-진정하세요. 이 녀석이 함정을 발동시키지 않은 건 제가 보장합니다.-
“하지만. 회강님 이 녀석은-”
-거기서 누군가 외쳤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리장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김산수가 입을 다물었다.
-괜찮다고 전하세요.-
그의 말에 김산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꽃이 아기처럼 엄살을 부려서 그런 겁니다. 먼저 앞으로 이동하세요. 뒤따라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저희가 먼저 정찰을 하고 있겠습니다.-
그사이, 회강이 무릎 한쪽을 꿇더니, 꽃과 눈을 맞추고는 싱긋 웃었다. 그의 모습에 꽃은 한 걸음 물러섰다.
“왜. 왜 그래.”
-네가 물었지. 너를 왜 죽이지 않았냐고? 나는 처음에는 혹여 네가 피해자가 아닐까 생각했다.-
“피해자? 하지만 나는 괴물이 됐잖아. 그러면 그냥 죽여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런 식의 논리라면 전 세계의 사형제도는 모두 시행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완벽하지 않아서 억울한 사람이 죄인이 될 수 있고, 그 한 명의 억울한 인간을 위해서 사형제도는 시행돼서는 안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신이 아닌 불안정한 인간이라서, 네가 처음부터 괴물이었는지, 아니면 피해자인지 판별할 수 없어. 결국, 네가 인간에게 해가 되는 행위를 하는 것을 목격하지 않은 이상, 너를 살려 둘 수밖에 없다.-
그의 말에 순간 멍하니 서 있던 녀석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딴, 장황한 말로 나를 속이려 하지 마. 나를 꼬여낸 녀석도 너와같이 화려한 말로 나를 속였어. 그리고 이 꼴이 됐단 말이야. 그리고 북한 녀석들이랑 같이 다닌다는 건 탈북자들이나 가능한 거잖아. 이 쓰레기들아.”
“이 녀석! 너 강회강 님도 모르냐. 그냥 사실대로 말했으면-”
“알아. 하지만 얼굴을 보지 못했어. 그러니 당신이 정말 강회강이라면 증거를 보여줘.”
-증거라면 너도 봤을 텐데. 아닌가? 너도 이건 볼 수 없나?-
그가 손에 힘을 주자, 하얀빛이 뿜어져 나왔다.
김산수는 가만히 있고, 오로지 꽃만이 눈이 휘둥그레진 채 손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진짜야? 당신이 정말로 꼰대가 아니라 강회강이라고?”
-그래, 아 이걸 보여주면 되겠군. 잠시만 기다려라.-
그의 메시지에 꽃은 입을 굳게 다물었고, 김산수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십 초 정도 흘렀을까. 허공에 커다란 메시지가 떠올랐다.
*개인 미션 발동*
*내가 진짜 강회강이라고*
<내용>
-진화가 이분이 강회강이라고 증명합니다.
-단순히 증명하는 것이므로 선택사항도 보상도 없습니다.
-회강님 [업] 20일 잘 먹었습니다. 냠냠 쩝쩝.
“메시지 몇 줄에 업을 이십 일이나 처먹다니...”
김산수의 중얼거림에, 멍한 눈동자로 메시지를 보고 있던 꽃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꽃이 두 개의 잎사귀를 가지런히 가슴에다 모으고선 외쳤다.
“우와. 진짜 강회강이라니. 평생 보지 못할 거로 생각했는데...”
-이제라도 믿으니 다행이구나. 그러면-
“사인 해주세요. 아니지, 여기서 빼내 달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난 업도 없는데, 진화도 딸려서 거래도 못 넣고.”
-저기 우선은-
“아니면 나를 이리 만든 놈들 다 죽여 달라고 해야 하나?”
-꽃아? 내 말은 듣고 있냐?-
“음 아니야. 그건 너무 무리야. 우선은 살아가야.”
자꾸 회강의 메시지를 무시하는 꽃. 그런 꽃을 바라보는 회강의 눈빛이 번뜩였다.
“야!”
고함에 잎사귀로 턱을 괸 채 고민에 빠져있던 꽃이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땐,
“죄송해요. 제가-”
이미 회강이 주먹이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퍽.
꽃은 대자로 뻗은 채 누워 버렸다.
그에게 황급히 고개를 숙인 김산수.
“야. 야. 정신 차려!”
목소리완 달리 비릿한 미소를 지은 김산수가 오른손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철썩철썩.
“정신 차리지 않으면 계속 때려야겠지요?”
-예. 그러도록 하세요.-
“후후. 그렇다면...”
철썩철썩.
그 뒤로도 찰진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 작가의말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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