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3*
“이 사람 강회강 아냐? 이 정도로 큰 덩치를 지닌 남자는 그밖에 없잖아”
쉰 목소리에 회강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에이, 그의 절친이 이자와 비슷하지 않아? 누구였더라, 최씨인건 확실한데...”
“아니야, 반쪽 얼굴을 봐봐, 강회강이 맞잖아.”
“아, 그러네. 내 쪽은 흉해서 몰라봤어.”
‘누구?’
정신이 멍한 가운데, 흔들리는 시야가 조금씩 명확해졌다.
‘구급차?’
그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사이, 그의 양옆에서 앉아있던 두 명의 구급대원이 대화를 이어갔다.
왼쪽 눈 밑에 큰 점이 있는 사내가 고개를 젓는다.
“쯧쯧. 아무튼 안 됐어. 사람 구하고 떨어진 것 보니, 인성도 TV에서 보던 것처럼 올바른 사람 같은데...”
그러자 맞은편에 있던 사내가 자신의 대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면서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뭐해.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병신 짓 한 거지.”
“아니, 김재생, 너는 진급 누락 된 것을 왜 이분에게 푸는데. 전에도 너의 그 투덜거림 때문에 나까지 징계 먹은 것 잊어먹었어? 그만 지껄여 이번에도 문제되면 난 외면할 거야.”
“쳇. 알았어. 근데 근악이 너 돈 좀 있냐?”
김재생의 말에 오른쪽 가슴에 양근악이라는 이름이 달린 사내가 얼굴을 크게 찌푸렸다.
“야. 너 저번 주에 집에 큰일이 생겼다고 돈 빌려 갔잖아.”
“아. 그랬지... 미안.”
그가 상체를 김재생 쪽으로 기울인다. 잠시 운전석 쪽을 바라본 그가, 김재생에게 작게 속삭였다.
“도대체 뭔 일인데 그래? 불안하게 이리저리 돈 빌리러 다니지만 말고 속사정을 내게 털어놓아 봐. 그래야 모두 십시일반 모아서 너에게 주지. 안 그럼, 나나 빌려주지 누가 너에게 빌려줘? 전에 공금 빼돌린 놈인데.”
“아, 안 빌리면 될 거 아냐. 갑자기 과거 이야기 꺼내는데.”
“이 자식이 돌았나. 갑자기 성질은 왜 내.”
“그럼, 이미 지나간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데, 화가 안 나냐!”
‘둘이 싸우지만 말고... 나 좀...’
그들이 멱살을 잡는 모습을 끝으로 회강의 의식은 어둠 속으로 잠겼다.
*4*
메케한 연기 냄새에 회강이 눈을 뜬다.
‘이곳은...’
잠시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회강.
그의 시야엔 허름한 방에 다닥다닥 붙어서 누워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꿈이었구나. 가만, 그 사람들 어디서 본 사람들이었는데.’
한참을 머리 굴리며 생각하던 그는, 두 사내의 인상착의가 TS 화재 사건 때 자신을 데려간 구급대원들과 같은 인물임을 알게 된다.
‘그럼 그게 꿈이 아니라, 내 기억 중 일부란 건가?’
회강은 눈을 번뜩인다.
‘분명히 그 둘의 이름은 김재생과 양근악이었어. 김재생 양근악 김재생 양근악’
잊지 않기 위해, 그들의 이름을 곱씹던 그는 아직은 어두운 바깥으로 나간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추워할까 봐, 재빨리 문을 닫은 그에게 김산수와 최성국이 다가왔다. 그들의 얼굴엔 검댕이 조금씩 묻어 있었다.
“회강님 오늘 첫 접속 날 아니십니까?”
“맞아. 맞아. 설마 우리를 믿지 못했나?”
그들의 말에 회강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오늘은 보상이 너무 많이 적용되어서, 내일부터 시작하라고 하더군.-
“아 그러시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김산수와 다르게, 최성국은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렸다.
“쳇. 얼마나 보상을 많이 받았으면 게임을 시작 못 해.”
그의 말에 김산수가 갑자기 목에 핏대를 세우곤 소리쳤다.
“아니, 생명의 은인이 잘 되면 좋은 거 아닌가. 어디서 그따위 못된 버릇을 배워먹은 거야.”
“뭐! 못된 버릇! 그럼, 당신처럼 속마음을 숨기고 쓰레기들에게 헤헤거리는 건 어떤 건데!”
최성국의 말에 김산수가 크게 움찔했다.
“이... 이 자식이.”
자신의 거짓말로 인해서 싸움이 벌어지자, 회강은 황급히 두 사람을 갈랐다.
-그만. 밤중이라 불도 맘 편히 때지 못하는데, 큰소리를 지르면 안 되지. 진정들 하고, 내가 불을 볼 테니까,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가서 좀 쉬어라. 물론 또 싸우면 화낸다.-
회강의 메시지를 읽은 두 사람이 입을 다물고는, 서로를 노려보며 안으로 들어갔다. 서로 어깨를 밀치며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 모습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짓는다.
“훗.”
‘저 두 사람, 잘 어울린단 말이야.’
처음 몇 시간은 크게 싸워서 갈라놨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두 사람이 붙어 다니더니, 이제는 같이 불침번까지 서는 사이가 된 것이다.
‘사람 일은 모른다더니.’
최성국은 항상 진실 된 말만 내뱉고, 김산수는 능글맞게 거짓말에 능수능란했다. 완전 상극이기에 걱정을 제일 많이 했던 두 사람이었는데 저리 친해질 줄은 몰랐다.
‘어쩌면 서로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가진 상대에게 끌린 것일지도... 아무튼, 잘 된 거지 뭐.’
그는 아궁이로 다가가 불을 살펴보았다.
불타오르는 나뭇가지들을 보며 회강은, TS 사건 때 자신을 데리고 간 구급대원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노인이 아니라 그들을 먼저 찾았어야 했는데... 제일 중요한 걸 잊다니...’
아무리 여러 일에 휘말렸다지만, 그동안 회강은 자신의 복수에 너무 무신경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매번 회강의 발목을 잡은 것이 주변 사람이 아닌, 그의 과거였다.
TS 화재 사건으로 인해서 회강에게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혀버렸다. 그것은 옳은 일을 할 때마다 그의 공을 깎아내리고, 자신의 공으로 돌리려는 사람들에게 있어 매우 유용한 도구였다.
특히, 회강의 영교로 쳐들어간 것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는 박철순과 최변인의 모습을 어제 방송에서 보고 나선, 화보단 자신의 제일 큰 잘못을 깨닫게 된다.
‘상처를 치료할 생각도 안 하고 적과 싸우려고 했어.’
그동안, 회강은 속죄하고 성실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사람들이 알아봐 줄 거라 믿은 것이다.
‘몰랐던 거지... 가장 중요한 인간의 본성이 뭔지를 말이야.’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전신 마비 생활을 하는 동안, 회강이 여러 일을 되짚어 보다가, 그가 만난 사람 중에는 자신보다 똑똑한 이들이 생각 외로 아주 많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자 그는 한 가지 강한 의구심이 마음속으로 생겨났다.
‘그런 자들의 내 TS 사건에 대해서 의구심이 없을까?’
고작 제대로 된 기억이 사 년 정도밖에는 되지 않은 회강도 오광민에 말에 의구심을 가졌다. 그런데, 회강보다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기억하는 사람 중에서 단 한 명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것은 단 하나를 의미했다.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다.]
병원생활 할 때, 탈출 후 이필상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이후 여러 일들 등등, 회강은 싸움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병원에서는 정말이지 끔찍했다. 만약 남을 위해 다시 한 번 더 그 일을 겪어야 한다면...’
회강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나라도 자신이 없어.’
자신의 안위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회강은 병원에서의 일과 남연희가 다른 이들을 위해 그의 위치를 발설한 사실을 들었을 때, 여실히 깨달았다.
그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일행이 자는 곳을 향했다.
‘그래서 봐준 거다. 하지만, 다음에 한 번 더 그러면, 너희들은 나보다 자신들을 위할 테니 그때는...’
회강은 장작을 아궁이 속에다 집어넣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을 보면서 그는 아침을 맞이했다.
같은 날. 서울 시내.
올림픽 도로가 교통체증으로 꽉 막힌 가운데, 강회강과 김산수가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김산수가 회강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정말로 거기로 가실 겁니까?”
그의 말에 회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TS 본사로 너랑 같이 들어갈 예정이다.-
“하지만, 바로 들키지 않을까요? 최변인이 아무리 막무가내라도 TS 본사에서 저를 어떻게 하진 않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난 너를 걱정한 적이 없는데.-
그의 말에 눈물까지 글썽거리던 김산수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아하하. 그렇군요. 그럼 무슨 일로 안으로 들어가시려고 그러시는데요.”
-그걸 알아서 뭐하게. 설마, 배신을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김산수는 순간 크게 발끈했다.
“강회강님! 제가 아무리 쓰레기라도 은인에게 해코지는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원수는 잊어도 은혜는 갚자는 것이 제 신조라고요.”
회강은 그의 어깨를 왼손으로 툭툭 친다.
-농담이야 농담. 왜 이리 민감하게 반응해.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설마 진짜로 그럴 생각은 아니겠지?-
그의 메시지를 읽은 김산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노... 농담이시라니 다행입니다. 절대로 은인에겐 배신 안 하니, 믿어주세요.”
-그래, 알았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내가 가려는 목적은 유의명과 만나서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다.-
김산수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확실히, 그의 집이나 병원 근처에는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으니, TS에서 만나는 것이 맞겠군요. 근데 어디서 만나시게요. 죄다 카메라가 깔려 있어서, 저도 최변인을 만날 때, 청소부 복장을 하고 만나는데- 설마... 변장하시게요?”
그가 동그란 눈으로 쳐다보자, 회강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처음엔 그 생각을 해봤지만, 오히려 눈에 띄겠더군. 그러다 어제 방송을 보다가 놈이 TS 본사에서 다큐를 찍겠다고 그러더군. 그걸 보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올랐어.-
“어떤 생각이요.”
-최변인 너는 과연 어떨까?-
“네? 갑자기 유의명에 대한 얘기하시다가, 뜬금없이 최변인에게 할 질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회강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그 일도 같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의 제목이랄까? 아무튼, 이일에는 네 힘이 필요해, 당연히 도와주겠지?-
그의 말에 김산수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당연히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떤 일이든 맡겨주세요.”
-고맙군. 그럼 거기 도착할 때쯤 말해주도록 하지. 상황에 따라 계획이 변경될 수도 있어서 말이야.-
“알겠습니다.”
-나는 잠시 눈 좀 붙일 테니, 도착할 즈음에 불러줘.-
“예. 걱정하지 마세요. 근데, 그렇게 도끼를 쥐고 있으면 편합니까.”
김산수가 흘깃 쳐다본 곳에는, 오늘 만든 주먹도끼를 회강의 오른손으로 잡고 있었다.
*5*
TS 본사 14층. 최변인 전용실.
휴대폰을 바라보던 최변인은 잘 정리된 자신의 손톱을 깨물기 시작한다.
오도독오도독.
옆에서 스타일리스트가 그를 보고는 잽싸게 장갑을 근처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가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놓더니, 앞에 서 있는 매니저에게 말했다.
“PD에게 잠시 쉬자고 전해.”
“예.”
“그럼 다들 나가봐.”
사람들을 내보낸 그는 몰래 만들어놓은 뒷문을 연다.
그러자, 청소 복장을 한 김산수가 황급히 들어왔다.
“문자에 써진 내용이 사실이야?”
최변인의 질문에,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한 김산수가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예. 실패했습니다. 느낌이 좋지 않아 말렸는데, 그들이 무작정 들어가는 바람에- 컥.”
말하던 김산수가 배를 움켜잡고 주저앉았다.
최변인이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본다.
“그러게, 그냥 네가 고용한 사람을 먼저 집어넣으랬잖아.”
“그... 그건 전에 제가 최변인님에게 말을 했– 억”
김산수가 자신의 이마를 부여잡고 뒤로 넘어졌다. 최변인은 피가 묻은 새하얀 구두를 보더니 손수건을 꺼내 닦았다.
“내가 한 말이 그렇다면 그냥 수긍하고 넘어갈 것이지. 어디서 개 주제에 주인을 물려고 그래. 돈 받기 싫어! 앙!”
그가 윽박지르자, 김산수가 벌떡 상체를 일으키더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무조건 제 잘못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최변인은 그런 그를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 시발 어떡할 거야. 만약 회강이 몸뿐만 아니라 기억까지 회복하면 너나 나나 뒤지는 건 시간문제야. 곧 녀석이 기억을 회복하면 우리는-”
언성을 높이는 그에게 김산수가 무릎 발로 황급히 다가섰다.
“밖에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다 우리가 강회강이 기억을 회복하는 것보다 먼저 걸리겠습니다.”
그의 말에 최변인이 움찔하자, 김산수가 잽싸게 품에서 칩을 하나 꺼냈다.
“이걸 보시면, 병원 측이 우리에게 거짓말했다는 걸 아실 겁니다. 동시에 빠져나갈 방도도 떠오르실 거고요.”
“그래?”
“예. 그러니 한 번 보세요.”
김산수가 그에게 칩을 건네자, 그가 그것을 약간의 피가 흐르는 손가락으로 집었다.
그러곤 자신의 태블릿에다 꽂아서 확인한다.
동영상을 최변인이 보는 동안, 김산수는 긴장한 얼굴로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요것들 봐라. 네 말대로 거짓말을 했구나. 병원 쪽에선 영상엔 내가 직접 말하는 것도 찍혔다고 했는데 여기엔 없네. 이거 확실한 거야?”
“예. 제가 남연희라는 여자의 뒤를 쫓다가, 그녀의 품에서 떨어진 칩을 제가 주운 겁니다. 사실, 최변인님도 저번 동영상 사고 때문에 상대가 녹취를 못 하도록 매번 조처를 하시지 않습니까.”
“음...”
그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동안, 김산수의 말은 계속됐다.
“그러니 이번 일은 그냥 발을 빼시면 됩니다. 저들이 이 영상을 복사해 뒀다면, 그들이 도망치는 데 성공한 이상, 곧 언론에 이것을 폭로할 테니까요.”
김산수의 말에 최변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 그거야. 내가 방금 그 말 하려고 했다니깐. 그 방법대로 하도록 하지. 어서 가봐.”
“저기... 돈은...”
그의 말에 최변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자, 김산수가 뒤로 잽싸게 물러났다.
그것을 보던 최변인이 웃음을 터뜨린다.
“하하하하. 그래 주마. 네 녀석도 상처가 있는 걸 보니, 산으로 가서 고생 꽤 한 것 같은데, 잠시만 기다려라. 최 매니저. 그래 나야. 전에 보낸 계좌에다 이천 보내. 그래 이천.”
“감사합니다.”
그가 고개를 넙죽 숙이자, 최변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사래 친다.
“그럼 어서 가봐. 다음번에도 실패하면 그땐 돈 없어.”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다큐 잘 찍으십시오.”
“오냐~ 잘 가라.”
김산수가 나가자 최변인은 짙은 미소를 짓는다.
“그래도 부하 하나는 잘 둬서, 이번에도 무사히 넘어가겠군. 그럼 잠시 누워볼까.”
그는 창가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깊은 잠에 빠져든다.
TS본사 13층.
직원용 화장실 천장을 덮은 패널 중 하나가 움직였다.
검은 동공이 생기고, 그 안에서 김산수의 머리가 나타났다.
“이 짓도 못 해 먹겠네.”
그는 변기 위로 발을 내린 뒤, 패널을 제자리로 옮겼다.
화장실 바닥에 발을 딛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김산수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김대식도 힘들겠어. 우리 회강님 대역으로 집어넣은 놈인데, 아직 기억도 제대로 돌아오지 않으신 분보다 못하다니... 쯧쯧.”
그는 이동식 청소도구함에서 플라스틱병을 꺼내 들었다.
병 안에는 옅은 갈색의 액체가 가득 담겨 있었다.
“회강님은 그냥 촬영 중에 소방 벨만 울리라고 하셨지만, 연기까지 나와 줘야 그들이 당황하지 않겠어. 크크.”
김산수는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도 궁금하단 말이야. 초심을 잃은 자의 선택이 어떨지.”
다시 병을 안에다 집어넣은 그가 화장실 문을 열었다.
“이제 그 답을 알아보러 가볼까.”
콧노래와 함께, 그는 복도에서 사라졌다.
TS 본사 15층.
회장실에서 김대식은 오랜만에 한국으로 들어온 딸을 바라보았다. 퉁명스러운 표정과 함께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자식의 모습의 그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린다.
“삼 년만이구나.”
그녀의 작은 머리가 살짝 흔들렸다.
“아니요. 사 년만이에요.”
“그... 그렇구나. 그래 미국은 살기 좋지?”
“네.”
“남자친구는 있고?”
“아니요.”
“직장 내에서 맘에 드는 사람이 없어? 걸출한 사내들이 많이 있던데, 그러지 말고-”
“직장 옮겼어요.”
그녀의 말에 김대식의 눈이 커진다.
“어디로.”
“한국이요.”
“한국? 그럼, 이 아비를 용서했단 말이냐.”
그의 말에, 그녀가 눈을 치켜뜬다.
“제가 전에 말했을 텐데요. 모든 죄를 고백하고, 회강오빠에게 이곳 물려주면 용서한다고.”
“미령아! TS가 네 아비에게 어떤 회산지 모르는 거냐! 그 사갈 같은 년에게서 너와 내가 벗어날 수 있었던 곳이야.”
“알아요. 하지만, 아버지가 더럽혔죠. 추악한 배신의 기억만이 남은 곳으로...”
“그건-”
“닥쳐요. 당신이 엄마보다 나은 건 뭔데! 당신도 똑같아!”
“뭐! 야 이년이-”
그가 두꺼운 책을 잡고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런데도 김미령은 여전히 노려보면서 소리 질렀다.
“때려 때리라고! 미친 엄마처럼 때리라고!”
김대식은 그녀의 고함을 듣자마자 가슴을 움켜쥐었다.
“크윽.”
휘청거리는 그의 모습에, 눈을 부릅뜬 김미령이 두 팔을 책상 위로 내밀어 김대식의 비대한 몸을 받치려 했다.
그러나, 김대식이 다가온 그녀의 팔을 민다.
“됐다. 나는 괜찮아. 잠시 현기증이 난 것뿐이야.”
그의 말에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이지... 더러운 짓을 해가며 돈을 벌었으면, 잘 좀 지내지 그게 무슨 꼴이에요.”
김미령에 눈가에 물기가 어리자, 김대식이 급히 휴지를 꺼내서 딸에게 건넸다.
“미... 미안하다. 나는 괜찮아. 건강하다고. 몸은 이래도 운동을 열심히 해서-”
삐삐. 삐삐. 화재 발생. 화재 발생.
비상음과 함께, 경고 안내음이 들려오자, 김대식은 육중한 몸과 달리, 빠르게 책상에서 나와 딸의 팔을 잡았다.
“어서 가자. 빨리 피해야 해!”
“알았으니 손 좀 놔주세요. 아파요.”
“미안하다.”
김대식이 황급히 그녀를 잡은 손을 뒤로 뺀다. 그녀가 자신의 팔을 주무르며 앞으로 움직인다.
“우선 물티슈라도 둘러라. 연기 조심해야지.”
“네. 알겠어요.”
나갈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은 회장실 문을 열었다.
때마침 나타난 경호원이 두 개의 물에 젖은 손수건을 건네며 빠르게 말했다.
“회장님. 옥상으로 통하는 비상계단은 연기가 심합니다. 내려가야 합니다.”
“알았어. 어서 이동해.”
천장을 뒤덮는 짙은 연기를 피해 상체를 숙인 그들이 중앙계단을 통해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12층에서 김대식은 쓰러져있는 연습생을 발견한다.
“얘야. 정신 차려봐라.”
흔들어보지만, 의식을 되찾지 못하는 십 대 여자아이의 모습에 세 사람의 얼굴이 굳어졌다.
경호원이 다가왔다.
“제가 업겠습니다. 그러니 먼저 내려가십시오.”
“오 그래. 알았네.”
“아빠. 저기에도 있어요.”
“뭐라!”
김미령의 말에 김대식이 뒤뚱거리며 계단에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의 말대로 다리를 잡고 눈물을 흘리는 남자아이가 보였다.
그가 아이에게 다가갔다.
“다리를 다쳤구나. 업혀라.”
그가 자신의 몸을 돌리자, 울고 있던 아이가 김미령의 부축을 받아 업힌다.
김대식이 몸을 일으키자, 경호원이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최변인님이 필요하다고 차출하지만 않았어도, 경호 인원이 충분했을 텐데-”
“아니야. 나도 허락한 일이었다. 우선 빨리 내려가자. 위에서 난 불이 아래로 언제 내려올지 몰라.”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부탁하네.”
그들은 계단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얼마 뒤, 일 층에 도착한 그들에게 사람들이 달려왔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죄송합니다. 주말이라 계신 줄 몰랐습니다.”
“아니야. 어서 이 아이들부터 구급차로 옮기게.”
“예.”
다가온 사람들에게 아이들을 넘긴 그가, 건물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러자 밖에서 사람들을 지휘하고 있던 유의명이 뛰어왔다.
김대식이 유의명이 입을 열기도 전에 말했다.
“불은?”
“다행히 뒤늦게라도 스프링클러가 작동했는지, 번지지 않았습니다.”
“부상자는 몇 명이나 되나.”
“데려오신 두 연습생을 제외하고 세 명이 추가로 있습니다.”
“생각보다 적군.”
“주말이다 보니 사람이 적었습니다.”
“화재 원인은 당연히 모르겠지.”
그의 말에 유의명이 고개를 숙인다.
“예... 죄송합니다.”
“아니다. 성급하게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근데...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큰... 문제라고? 부상자 말고 사망자라도 있는 건가.”
“그건 아닌데... 세 명의 부상자 모두 한 사람 때문에 다쳤습니다. 말을 들어보니, 밀쳤다고...”
그의 말에 김대식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게 어떤 새끼야. 누구냐고!”
유의명은 말없이 한 곳으로 가리킨다.
김대식과 그 뒤에 있던 김미령의 고개가 그의 손끝을 따라 돌아갔다.
거기엔 사람들과 동떨어진 곳에서 유독 한 사람만이 서 있었는데, 체구가 건장한 사내였다. 그는 자신을 보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노려보며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정체를 확인한 두 사람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그 중, 김대식은 몸을 부들거리더니, 밥을 먹을 때보다 더 크게 입을 벌렸다.
“최~변~인!”
그가 뒤뚱거리며 사내에게 달려갔다.
맞은편 거리에서 호랑이 가면을 쓰고 서 있던 사내가 들고 있던 카메라를 내렸다.
“그래... 네늠의 대답 잘 들읏다.”
그의 등 뒤로 김산수가 다가왔다.
“어떻습니까. 제가 잘했- 윽.”
그의 정강이를 걷어찬 사내가, 천천히 멀어졌다.
눈가에 눈물이 맺힌 김산수의 눈앞에 하나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비상벨만 울렸어야지. 연기까지 짙게 피워서 사람들이 세 명이나 다쳤잖아. 다시는 사람이 크게 다칠만한 짓은 하지 마라.-
메시지를 읽은 김산수가 투덜거렸다.
“연기는 내가 한 짓이 아닌데... 호랑이님 같이 가요.”
그는 재빨리 흐트러진 모자를 깊게 눌러쓴 다음, 저 멀리 걸어가고 있는 사내에게 뛰어갔다.
- 작가의말
내일은 약속으로 인해 연재를 못합니다.
다음주 월요일날 제시간에 돌아오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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