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무의식
만약 전쟁 전이었다면 이런 훌륭한 작품들의 진가를, 인터넷 등을 통해서 알려줄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 다만 아쉬울 따름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 언젠가 나를 위해 꽃다발을 전해주던 그 소녀~’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 두리는 계속해서 마음속으로 노래만을 불렀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그 소녀가 보고 싶을까~’
두리가 말하는 그 소녀가, 왠지 더 이상 만나볼 수 없는 이런 전쟁전의 영화나, 음악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면 기분 탓이었을까.
일행은 천천히 걸어서 어느새 대학교의 중심지에 도착했다.
핵폭탄으로부터 직격을 맞은 것은 아니었지만, 세월의 풍파가 흐르고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서 각 건물들은 담쟁이덩굴과 각종 잡초들로 무성하게 둘러싸여있었다.
기본적으로 건물이란 것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순식간에 낡아빠지는 것이다.
그래서 오래 이용하려면 사람의 손길이 필수적이었는데, 온 건물 벽에는 이러한 관리가 되지 않아 담쟁이덩굴과 새똥으로 뒤범벅이 되어있었고, 그러한 담쟁이덩굴들도 방사능에 의한 영향인지 왠지 돌연변이가 되어 비대화돼있는 것 같았다.
방사능에 의한 돌연변이에서 이러한 식물이나 동물의 비대화는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었던 것이다. 아니면 아예 반대로 완전히 작아지든지.
아무튼 이런 담쟁이덩굴만 무성한 풍경에서 일행은 을씨년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는데, 그와 동시에 뭔가 평온한 듯한 느낌도 드는 아이러니가 발생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 발자취가 닿지 않아 폐허가 된 건물에선, 이렇게 몹시 스산한 느낌과 더불어 밝고 평화로운 느낌마저 들었던 것이다.
인간의 손길이 끊겼다는 점에선 뭔가 공포스러웠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이 사라졌기에 느낄 수 있는 평화로움이 있었다.
이러한 느낌을 네 명은 모두 다 공유하며, 실로 뭐라 설명하지 못할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인간이 사라진 곳에서 평화를 느끼다니······. 모순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러한 감정들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은 속여도 자기 자신의 감정은 잘 속이지 못하는 편이었다.
더군다나 남을 잘 속이는 사람일수록. 아무튼 그러한 감정을 떨쳐내기 위해서인지, 두리는 갑자기 뜬금없이 씩씩한 목소리로 밝게 말했다.
“자, 그럼 빨리빨리 수색을 끝내고 다시 본거지인 병원으로 돌아가자구. 아니면 오늘은 이곳에서 머무르든가.”
“그래.”
“그게 좋겠다.
찝찝한 느낌을 떨치기 위해서인지 서이와 너이 역시 애써 밝은 목소리로 동의했고, 하나가 마지막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네 사람은 탐색에 나섰다.
네 사람은 천천히 이 대학교 건물의 탐색을 나섰다. 이 대학교는 부지가 꽤 넓고 건물도 한두 채가 아닌데다가 뒤로는 산까지 이어져있어서 상당히 수색하기가 까다로웠다.
아마 이 건물들을 일일이 돌아보는 데에만 해도 한참이 걸릴 것이다.
건물 하나하나마다 층이 한두 개씩 있는 것도 아니고, 그 강의실이나 화장실, 여러 가지 목적의 방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니 일일이 둘러보려면 그야말로 하루 종일이 걸려도 부족한 것이다.
네 사람은 먼저 대학교 정문에서부터 시작해 쭉 올라가면서 횃불을 들고 말을 탄 사람의 동상을 발견했다.
그 뒤를 지나면 공대 건물이 두 채 있었는데, 사실 이 대학은 처음에 공대로 시작했고 그 후에 인문대나 사회과학계열 학부가 추가됐으므로 아무래도 이런 공대 쪽 건물들이 많았다.
전쟁 전에야 로스쿨도 있고 의대나 기타 다양한 학부들이 있었지만 원래 그 시작은 공대였었던 것이다.
아마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잘하면 이 대학을 내년 즈음에 다닐 수도 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하며 두리는 첫 번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1층은 보통 강의실이 없고 대강당이나 화장실, 매점, 학교 사무실 등이 있는 것이 보통이었기에 방이 적어서 크게 수색에 걸릴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2층부터는 달라져서, 각각 화장실이나 교수 연구실, 사무실 등이 있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아무래도 강당이나 기타 방들의 비중이 줄고 비교적 작은 강의실들이 줄줄이 이어 있기 때문에 수색에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두리 일행은 전쟁으로 인해 고등학교는커녕 중학교,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낯선 대학 강의실의 느낌에 어색한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대학교를 다녀본 사람이야 그냥 그 강의실이 그 강의실이지만 대학교를 안다녀본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대학교와 초, 중, 고등학교의 건물은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런데 두리 일행은 전쟁이 안 일어났어도 지금쯤 고3에 해당하는 나이라 대학교를 다녀본 경험이 없어서 이런 대학교 강의실은 상당히 낯선 곳이었다.
어차피 중, 고등학교야 안 가봤다지만 사실상 초등학교 교실과 크게 다를 게 없으므로 큰 상관이 없지만, 이러한 새로운 곳에 와보니 상당히 신선한 충격이었던 것이다.
강의실 앞에는 빔 프로젝터와 거기서 나오는 영상을 투영하기 위한 스크린 같은 것이 천장에 달려있었고, 컴퓨터 책상과 칠판, 혹은 화이트보드가 있는 곳도 있었다.
화이트보드든 칠판이든 으레 그렇듯이 제때제때 지우지 않아 분필이나 펜 자국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는데, 이러한 자국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었다.
이렇게 전쟁이 일어나고 몇 년이 지났는데도 손대는 사람이 없으므로 당연히 그대로였던 것이다.
개중에는 강의 중에 갑자기 전쟁이 일어나서 그런지, 미처 지우지도 못하고 써진 수식이나 설명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두리 일행은 왠지 마음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들 역시 그렇게 수업을 받다가 전쟁을 맞이했으므로.
근거리에서 핵폭탄이 터지지는 않았지만 그 충격으로 사방의 건물에 있는 유리들이 다 깨졌고 그것은 두리 일행이 있던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그로 인해 자외선에 노출되어 대부분의 아이들이 핵이 터지자마자 실명했던 것이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두리 일행은 본능적으로 핵폭발의 섬광과 반대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에 반해 무의식적으로 폭발을 쳐다본 아이들은 모두 실명했다.
원래 얇은 유리창 하나만 있어도 실명의 원인이 되는 자외선을 막을 수 있는데, 폭발의 충격으로 인해 유리창이 모두 박살난 것이 문제였다.
그런 아비규환 속에서 친구들을 돕지도 못하고 완전히 전쟁터가 된 거리에서 셋이 손을 꼭 붙잡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각자의 부모님들은 없었고 이후에도 영원히 만나지 못했다.
아마 분명히 돌아가셨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아마 하나도 마찬가지일 텐데, 그래서 그때의 기억이 생각났는지 네 사람은 줄곧 이런 대학 건물들을 돌아보면서 아무런 말들도 없었던 것이다.
가지 못했던 대학교란 곳에 대한 기묘한 감정, 그리고 예전 전쟁이 터졌을 때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뭔가 아픈 감정들이 새록새록 다시 한 번 올라오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실제로 서이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눈가에 물기가 맺혀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루 종일을 걸려 한 건물을 둘러보고, 두 건물을 둘러보고 하는 식으로 겨우 네 사람은 모든 학교 건물들을 돌았다.
몇 년 만에 이렇게 돌아다니려니 다리에 힘이 빠질 지경이었는데, 아마 내공이 없었으면 진작에 지쳐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힘든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강의실을 돈다고 해도 평지의 건물들만 도는 게 아니라, 건물들마다 지형의 고 저차에 의해 높낮이가 달랐고, 같은 건물에도 여러 층이 있어서 계속해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반복을 해야 했다. 그러니 지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헉, 헉!”
“하나야, 우리 좀 쉬었다 가면 안 돼?”
결국 지친 서이와 너이가 먼저 손을 들었는데, 사실 두리 역시 오랜만에 이렇게 오래 걸었더니 발바닥이 따끔따끔하고 죽을 맛이었다.
하지만 거의 다 끝난 것 같아서 내색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마침 이렇게 두 사람이 먼저 나와주니 매우 반가웠던 것이다.
하지만 왠지 약한 척을 하고 싶지 않아서, 두리는 오히려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있었다.
“거의 다 왔어요. 조금만 힘내세요.”
“하지만 죽을 것 같단 말이야! 내공을 써도 죽을 것 같애!”
“계속해 봐요. 그렇게 내공을 쓰는 것은 좋은 단련이 되니까. 어떻게 보면 이렇게 걸으면서 내공을 단련하는 방법이 제일 좋은 방법이에요. 가만히 앉거나 누워서 수련을 하면 졸리거나 지루해서 오히려 집중이 안 될 수도 있거든요. 예나 지금이나 걷기는 제일 좋은 운동이죠.”
“안 돼!!! 발 냄새 엄청 날 것 같단 말이야!!!”
“하긴 니 발 냄새가 좀 끝내주긴 하지, 낄낄!”
“뭐라고! 너 말다했어!!!”
갑자기 자신의 발 냄새를 지적하는 너이에 의해, 서이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부아를 냈다.
아무리 너이는 자신의 친남매고 두리 역시 알고 지낸지 오래됐다지만 그렇게 남들 앞에서 발 냄새가 엄청 날 것 같다고 하니까 당연히 부끄러웠던 것이다.
원래 사람은 자신이 말할 수 있어도 남들에게 그런 얘기를 듣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공부 못하는 학생이 자학 식으로 ‘아, 난 왜 이렇게 공부를 못하지?’라고 할 순 있어도 그걸 옆에서 들은 친구가 ‘ㅋㅋㅋ 그래 이 공부 못하는 새끼 ㅋㅋㅋ’라고 하면 순식간에 ‘뭐야, 이 새끼? 싸울래?’ 이런 식으로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보통 친구라 해도 싸울 때는 정말 어이없는 걸로 싸우는 경우가 많아서, 이렇게 싸운 경우 그 갈등이 풀릴 때까지 무려 몇 개월에서 몇 년이 걸릴 수도 있었다.
보통 그 시작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만 나중에는 완전히 다른 그냥 자존심 싸움이 되어서 서로 사과하기 전까지는 화해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나오는 경우도 흔한 것이다.
그게 과연 친구일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와 동시에 현실에서 매우 흔한 광경이었다.
친구끼리 사소한 약속이라든지 얼마 안 되는 돈 문제 때문에 서로 갈라지고 반목하는 것은 매우 흔한 사례였던 것이다.
아무튼 그러한 일들이 많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 두리나 서이, 너이의 관계가 그런 찌질한 관계는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친구라고 해도 그냥 서로 적당히 이용하거나 타산적인 관계도 많은데 두리와 서이, 너이는 정말로 전쟁을 함께 거치고 죽음의 위기를 몇 번이나 극복했기 때문에 그 끈끈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서로 정말 먹을 것이 없는 상황 속에서도 과장이 아니라 콩 한쪽도 나눠먹을 정도였는데 이런 걸로 싸울 리가 만무했다.
얼마 전 같은 지상으로 두리가 말도 없이 멋대로 나오느냐 마느냐의 문제 정도가 아니면 싸울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애들을 두고 나 멋대로 나오려고 했으니······.’
서로 아웅다웅하고 있는 서이와 너이를 보려니 다시 한 번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서 두리는 스스로 반성했다. 그리고 이제부터 결심했던 것이다. 죽더라도 살더라도 그것은 함께라고.
그것은 하나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만약 자신이 희생해서 대신 하나를 구해줄 수 있다면 자신은 얼마든지 그렇게 할 것이었다.
이미 그렇게 하나에게 목숨을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 때문에 서이와 너이가 다시 한 번 슬퍼할지라도······.
그렇게 하나가 두 사람을 어르고 달래며 간신히 네 사람은 학교 건물을 다 돌았다.
네 사람은 기숙사 건물까지 다 파악한 상황이었는데, 기숙사가 무려 다섯 개에 달했고 그 층도 4층에서 9층까지 매우 다양했다.
게다가 거의 항상 열려있는 강의실들과 달리 이런 기숙사 방들은 대부분 잠겨있는 경우가 많아서, 일일이 열쇠로 여느라 번거로움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열쇠는 1층 관리실에서 조달했지만 한두 개가 아니라 수십 개에 달하다보니 상당히 귀찮았다. 1층 관리실 역시 잠겨있어서 유리를 깨고 들어갔고.
네 사람이 이렇게 철저하게 수색을 한 이유에는 당연히 돌연변이들의 문제가 있었는데, 야생동물이 거기에 들어가 있을 리는 없었고 인간이야 거기 들어가 있어도 대화의 여지가 존재하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가 되는 것은 돌연변이로, 일부 돌연변이들은 변이된 상태에서도 어느 정도 지능이 있었고, 막 지상에 나오기 전 숨이 끊어져가던 전대 지상요원의 증언을 통해 돌연변이들이 어느 정도 무리를 이루고 지능 역시 회복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있었다.
돌연변이들은 변이된 상태에서도 평소의 습관들을 그저 반복하는 경우가 있어서, 회사에 출근하려 한다든지 마트에 장보러가는 것 같은 활동들을 할 때가 있었다.
최소 수년에서 수십 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인생에서 살면서 그와 같은 행동을 반복했으므로 뇌에 그러한 것들이 완전히 각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억이란 단순히 뇌뿐만 아니라 근육에도 저장된다는 말도 있었다.
그래서 살인범의 심장을 이식받은 환자가 회복 후 살인이나 범죄를 저질렀다는 말도 있고······.
아무튼 그러한 것들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운동선수들이나 격투기 선수들의 경우 하도 같은 훈련을 반복하다보니 의식하지 않아도 몸에 밴 기술들이 무의식적으로 세포 레벨에서 나가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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