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
심연
투명한 젤리 같은 것이 옮겨붙었다.
그것은 어찌할 틈도 없이 손을 타고 스며들듯이 흡수되어 버렸다.
상자를 원래대로 돌려놓고 뛰쳐나왔다.
순간 눈앞으로 데오릭스가 나타났다.
"원하는 건 확실히 챙겼지?"
"물론."
"따라와, 탈출로는 한 곳뿐이야."
데오릭스의 뒤를 쫓아 달렸다.
시간이 거의 없다.
물론 천사가 오더라도 두려운 건 크게 없다. 다만 에덴 안에서는 기술을 쓸 수 없으므로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다.
천사들은 에덴에 있는 나를 신용하거나 봐주는 따위의 관용이나 자비는 절대 없을 것이다.
"여기야."
문은 열려 있었다. 뛰어든 순간 깜짝 놀랐다.
처음으로 어둠을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본 에덴은 새하얗게 빛나는 빛무리였다.
그러나 이곳은 정말 시커먼 어둠만 있었다.
내 눈에도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빛을 모조리 흡수해 버리는 어둠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어느새 밝은 빛을 내던 문은 사라지고 없었다.
-사락
창문 같은 것이 열렸다.
직사각형의 네모난 창문에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그쪽으로 움직이려 했다.
생각 보다 공기가 질척했다. 밀도가 점점 높아져 가고 있었다.
"잘 있었어? 꼬맹이?"
순간 내 몸은 마비 화살을 맞은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충격과 공포
가슴이 심하게 뛰기 시작했다.
직사각형의 창문에서 비웃음이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는 녀석은 루시퍼였다.
"네가 어떻게?"
"그야 네 덕분이지. 여섯 네필림을 치워준 것 때문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루시퍼의 얼굴이 미치도록 두렵게 느껴졌다.
"하하, 표정을 보니 괜히 불쌍해지는걸?"
난 루시퍼 옆에 서 있는 또 한 명의 인물을 보았다.
데오릭스.
데오릭스가 왜 루시퍼와 함께 서 있냐?
데오릭스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건 내가 지금까지 봐왔던 데오릭스의 어떤 미소보다 음흉함이 담겨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어디로 숨어야 하지?
여기선 기술을 쓸 수 없다. 그건 루시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전에 여긴 어디지?
영상에서는 단 한 번도 이런 어둠이 있는 곳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데오릭스 저 녀석 설마···.
"내 계획대로 따라와 준 것은 모두 네 덕분이다. 계획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너의 공이다. 하하."
"곧 천사가 몰려올 거다. 너도 무사하지 못할걸?"
루시퍼와 데오릭스가 서로를 쳐다보며 웃는 모습이 보였다.
"아쉽게도 여기에 올 천사는 없어."
"데오릭스 날 속였나? 넌 야훼의 종이 아니냐?"
"아쉽게도 이젠 섬길 주인님이 없어서 말이야."
그때 루시퍼 머리에 쓰고 있는 왕관에 눈길이 갔다.
저건 분명 거짓된 여왕의 티아라다.
벨리알이 구해 달라고 했던 것.
"그 왕관을 왜 네가 쓰고 있지?"
"그야 내가 원했던 거니까."
"그건 벨리알이···."
"이건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제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아이템이지."
뭔가 모든 것이 잘못 되어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제대로 된 대응책이 생각나지 않았다.
"정말 수고했다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어. 넌 기대 이상으로 움직여 줬어. 내가 거의 관여할 필요가 없었어."
"루시퍼···."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변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죽음의 공포 또한 느껴지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 물어봐. 대답해 줄지도 모르지."
"데오릭스 처음부터 다 거짓이었나?"
"계획대로 네가 움직이도록 유도한 거다. 여섯 네필림의 봉인을 해제하고 마릴론의 조각을 찾고 이곳으로 유도하기까지가 내 역할이었다."
"그렇군."
"자, 이제 심연에 잠든 진정한 악마를 깨우는 일만 남았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부활하면 성역을 향한 전쟁의 깃발이 오르게 된다. 그 오랜 염원의 출발점을 알리는 곳에 우리 둘만 있어 서운하군."
-팟, 팟, 팟
목걸이, 팔찌, 반지에서 태고의 악마가 튀어나왔다. 그들은 미친 듯이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 방은 아스트랄계와 연결된 유일한 곳이다. 이곳이 아니면 심연으로 들어갈 수 없지. 녀석들은 진정한 제 주인의 냄새를 맡고 찾아 들어갈 것이다."
"이로써 마지막 퍼즐이 맞춰진 셈이네."
데오릭스의 말이 점점 작아지더니 들리지 않게 되었다.
내 몸이 무한한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저 앞에 움직이는 파동을 느낄 수 있었다. 몸이 강제로 딸려 가고 있음을 느꼈다.
허리를 보니 뭔가 감겨 있었다.
제이가르다. 녀석이 꼬리로 내 허릴 감싸고 있었다.
'언노운?'
이곳은 이미 에덴이 아니었다. 심연 속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몸을 짓누르는 중압감은 수천 킬로 밑 바닷속 수압과 비슷했다.
포른의 몸이 아니라면 압사 했을 거다.
빛이란 아예 없는 나조차 눈앞에 내 손도 볼 수 없었다.
심지어 이어링의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이 심연의 어둠이 주위 발산하는 모든 불빛을 뺏어가 그런 모양이다.
주변에서 가해지는 압력이 너무나 대단하여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덴은 벗어난 것 같은데 스킬이 사용되지 않았다.
권능, 신성력, 차원 에너지 모두 발동되지 않는다. 안구에서 느껴지는 압력이 너무 높아서 눈을 감았다.
아니 나는 너무 어두워서 눈을 감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망각했다.
루시퍼에 살해당할 확률이 99%였다는 사실.
그건 거짓이 아니었다.
이대로 데엑마를 만나면 난 흡수 될 것이고. 정동혁으로 형성된 인격은 소멸하겠지.
갑자기 웃음이 났다.
난 태어난 이후 계속 루시퍼의 손아귀에서 놀아났다.
내가 살아왔던 모든 일련의 과정이 누구에겐 놀이에 지나지 않았다.
허무.
모든 것이 공중으로 붕 뜨는 기분이다.
정아 얼굴이 떠오른다.
부모가 없었기에 떠오른 사람이 정아뿐이다.
온몸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차츰 적응이 되어 간다.
포른의 세포는 초거대 블랙홀 내부에서 만들어졌다.
그래 내가 포른의 몸을 얻지 않았다면 심연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압사 됐을 거다.
그럼, 그것조차 루시퍼의 계획이었나?
에덴으로 나를 보낸 것도 이 심연으로 나를 보내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던 거다.
웃음이 났다.
왜냐고.
결코 그의 뜻대로 되지는 않을 테니까.
비장의 한 수를 생각했었다.
물론 그것이 어떠한 효과를 보일지 모른다.
내가 한 결정에 후회는 없다.
얼마나 가는지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허무의 공간 속을 헤엄치는 기분은 썩 좋은 기분은 아니다.
그동안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스냅스에서 과거 즐거웠던 기억을 영상으로 만들어 재생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만 편집해 떠 올렸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역시 이현희와의 하룻밤. 나에게 있어 가장 충격적인 하룻밤이었던 것 같다.
당시 현희는 날 사랑하거나 좋아해서 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녀는 마인으로서 성적인 행위에 도덕적 수치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임신이나 성병 따위 걱정할 필요 없으니 그냥 상대가 마음에 들면 하룻밤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겠지.
하지만 내겐 엄청난 충격 그 자체였다. 그 기억이 재생되자 쓴웃음을 지었다.
정크 보이 시절 때 우당당 했던 꼴을 보니 진짜 웃겨서 배꼽을 잡았다.
그때 그 시절 아이들 얼굴을 보니 정말 몹쓸 짓을 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이모탈 시티도 큰 죄를 업고 있다.
그렇게 해서 기억이 쭉 이어지다 한 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상하이 원자 폭탄이 터졌을 때 나를 연옥으로 워프시킨 존재.
어머니라고 자신을 소개했지만, 비커 출신인 나는 당연히 어머니가 없다.
그전에 네크로폴리탄 북쪽에서 내 힘을 일깨워 주었던 여인도 있었지.
기억 속 두 여인은 비슷했지만 다른 여성이었다.
그것도 루시퍼의 계획 중 일부였나?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중국에서 네필림의 존재를 처음 알았고 악마의 존재도 알게 되었다.
유럽의 전선에 뛰어들기 전에 언노운의 조언으로 팬더모니엄을 오르게 되었고 유럽과 네오나치를 화해시키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악마와의 대결이 시작되었고 게헤나에 입성했다. 전체적인 흐름을 놓고 보면 분명 변수가 많았었는데 언노운이 모두 제지했다.
어쩌면 언노운이 이 길로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언노운은 루시퍼의 계획에 따라 움직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언노운은 과연 루시퍼와 관계가 없는 존재일까? 미래에서 왔다는 그 말이 진실일까?
나노봇이라는 말을 틀린 말은 아니다. 악마는 절대 할 수 없는 과학적 능력을 보였으니까.
언노운의 목표는 지구 침습을 막고 악마로부터 지구를 해방하는 것인가?
그러고 보니 언노운에 구체적인 목표를 한 번도 물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무한의 침착
끝도 없이 가는 것 같다. 얼마나 갔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어차피 무의미한 것 같아 셈을 하지 않았다.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훑어봤다. 시냅스의 기억 보관소는 작은 내 머리보다 월등하니 한 인간의 인생사 정도를 기억하는 덴 쌀알 수준이다.
물론 나름대로 발버둥 치려고 오만 노력을 다했다. 스냅스에 저장된 기억을 토대로 모든 기술을 다 한 번씩 사용해 봤다.
언노운과 레이는 대답하지 않는다. 태고의 악마에게 강한 사념파를 쉼 없이 쏟아부었다.
그 어떤 방법도 소용없었다.
그렇게 끌려가기를 얼마나 했을까 드뎌 바라지 않는 것이 가까이 있음이 느껴졌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이 태고의 악마 세 마리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가는 길을 열고 있었다. 그 길을 따라 다시 나오면 되니까.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이 심연에서 탈출하는 길잡인 셈이다.
기운이 느껴진다. 칙칙하고 암울한 이 심연보다 더 강한 압박감이 확실히 느껴진다.
거의 다 와 간다.
태고의 악마 세 마리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내 새끼들이 드디어 나를 찾아왔구나.'
엄청난 사념파다.
머리가 울릴 정도였다. 이 정도나 되니 심연에서 통하지 내가 보낸 사념파는 녀석들에 닿지도 않았던 거다.
'크하하하하'
미친 듯한 웃음소리가 한동안 계속됐다.
걸걸한 나이 먹은 중년인이 내는 웃음소리였다.
앞쪽에선 마지 부자간의 상봉이 이뤄진 듯했다.
끝이다. 모든 것이 끝이 났다.
난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데엑마를 벗어날 수 없다.
언노운도 응답하지 않는다.
레이도 반응이 없다.
아마도 이 심연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만 하는 것 같다.
루시퍼에게 직접 죽임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루시퍼로 인해 소멸하는 것은 맞다.
내 회차는 여기까지인 모양이다.
이어링에 찍혔던 99%. 내가 어둠의 방에서 루시퍼를 만났을 때 100%가 찍혔다.
결국 운명은 바꿀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한심하다.
데오릭스에 그 어떤 의심도 하지 않았다.
야훼가 만든 야훼만의 종. 에덴의 관리자. 그런 그가 루시퍼와 한통속인 것을 어찌 짐작이나 했겠는가?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야. 이 운명이란 게 정말 다음 대로 되는 게 아니구나.
운명을 바꾸려고 그렇게 몸부림쳐도 그렇게 발악하고 달렸는데 어찌 제자리걸음만 뛰고 있었던 거다.
세 마리의 태고 악마와 데엑마는 감격의 재회를 만끽하고 있었다.
진짜 억울한 것은 루시퍼를 조지지 못한 거였다.
이 새끼는 정말 약은 녀석이다. 네게 에덴의 위치를 가르쳐 줬을 때 눈치를 챘어야···.
아니 그럴 수도 없는 것이 여섯 네필림의 본체를 구하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이 가야 했었다.
그럼, 뭔가 이상하다. 여섯 네필림은 나를 유혹하기 위한 미끼였는가?
알 수 없다.
아. 그 어전 회의!.
그들이 한 어전 회의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모든 재료를 갖추기 위한 전략을 구상한 것이다.
벨리알이 구해 달라고 했던 아니지 직접적 언급은 없었다. 니베리우스가 내게 접근해 거짓된 여왕의 티아라를 구해 벨리알에 가져다주면 된다고 했지.
결국 그것조차 미끼였다.
에덴에서 루시퍼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제어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
티아라는 천사의 손에 있었기에 루시퍼는 그걸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를 이용해 거짓된 여왕의 티아라를 구해오도록 설계한 것이다.
소름이 끼치도록 영악한 놈이다.
'가자, 밖으로 나가면 전 우주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릴 테다.'
-쑥
몸이 끌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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