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 뜻밖의 재회 (4)
알겠다. 이 느낌은.. 그야말로 순수한 투쟁심이다. 일전에도 느낀 적이 있지만 이젠 확실해졌다.
하지만 아무런 살기도 뿜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투지라니. 그런게 가능하단 말인가?
물론 살기라면 나도 매우 능숙히 다루는 편이지만, 투지라는 건 살기처럼 무형의 실체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살기는 단련된 예민한 감각으로 느낄 수 있지만 투지는 말 그대로 그냥 한 개인이 싸우고자 하는 마음에 불과하다. 나는 분명히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 투쟁심이 다른 사람에게 피부로 전해질 만큼의, 아니 지금의 이런 강력한 마법적인 의념지배조차 밀어낼만큼 늘 들끓고 있단 말인가? 저 조그맣고 평범한 몸 안에?
“이 느낌도 익숙해지면 그럭저럭 견딜만해요.”
카를은 그야말로 태연하게 말했다. 그래, 항상 이런 느낌을 억눌러 참고 있다면 대련을 할 때도 자제할 수 없다는 말도 이해가 된다.
아마도 폭발하는 듯한 기분이겠지? 지금 나만해도 열불이 치밀어 올라서 미친 듯이 발을 구르고 아무렇게나 악을 쓰고 싶은 기분이거든. 간신히 자제하고 있는거지.
“..넌 견딜 만할지 몰라도 난 죽겠다. 그만 가자.”
“아, 저는 안전한 곳이라고 온 건데 다른 사람 생각을 못했네요. 죄송해요. 그래도 형이라면 아마 금세 버텨내실 텐데요.”
“칭찬은 고마운데 그럴 것 같지가 않아. 난 마법이란게 좀 더 불덩이를 던지고 사람을 휙휙 날려버리고 그런 건줄 알았단 말이야. 이런 식으로 머릿속을 헤집는다니 영 기분 나쁘다고.”
난 자꾸만 치솟아 오르는 짜증을 억지로 억누르며 먼저 말위에 올라탔다. 카를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순순히 나를 따라왔다.
“젠장, 프로페릴인지 뭔지는 대마법사쯤 되서 이런 마법은 왜 걸어놓은 거야?”
“그건 폴카도 궁금해 했던 거예요. 대마법사가 왜 하필 이런 마법을 걸어뒀을까? 라는 거.”
나로선 그저 짜증스런 투덜거림이었지만, 카를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긴 하군.
하지만 지금은 기분이 도무지 뭘 제대로 대답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다.
“쳇, 알게 뭐냐. 저 망할 나무에 사람들이 접근하길 원치 않았나 보지.”
“그거 말 되네요. 오래있으면 저주받는다는 전설도 그렇고.”
“뭐야, 카를. 너 보물찾기라도 하고 싶어? 대마법사가 나무 안에 뭐라도 숨겨 놨을까봐?”
자꾸만 거칠어지는 말투를 억누르려 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잔뜩 배배꼬인 말만 튀어나온다. 하지만 카를은 화를 내기보단 싱글거리고 웃었다.
“아하하, 설마요. 세상 사람들이 그 정도 생각도 안 해봤겠어요? 그 폴카란 마법사만 해도 고대 마법사의 흔적을 찾기 위해 저 나무를 샅샅이 조사했다고요. 분명히 할 수 있는 모든 마법은 다 썼을 텐데 뭐가 있더라도 오래전에 발견됐겠죠.”
그래그래. 그러거나 말거나. 난 짜증스레 투덜거리며 그냥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말을 섞다간 악다구니를 쓸 지경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잠시간 큰 의문이 떠올랐다. 카를 녀석은 왜 굳이 이곳에 나를 데려온 건지에 대해서.
단순히 몬스터를 피해 쉬려고? 이상하다. 하지만 그런 의문은 계속해서 차오르는 분노와 짜증에 금방 뒤덮여 사라져갔다.
“세르휀델 시티까진 이제 나흘 남짓이네요.”
대체 짐 안에 사탕을 몇 개나 싸가지고 다니는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연신 입을 오물거리고 있던 카를이 말했다.
녀석과 나는 이제 거의 프로페릴 초원을 벗어나고 있었는데, 중심부에서 잠시 불쾌한 경험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카를과의 동행은 상당히 즐거웠다.
카를은 어쨌든 외견상 늘 온화하고 상냥한 편인데다가 사람 기분을 맞춰줄 줄 아는 성격이어서 말동무 삼기에 최고였다.
그리고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여행에도 매우 익숙한데다가, 사근사근하게 앞장서서 여러 잡다한 일들을 마다하지 않고 처리할 줄 알아서 여행 동료로서도 최고라 할만 했다.
덕분에 나는 여행하는 도중 녀석에게 내가 캬르한 산맥에서 자란 일부터 지금 여행길에 오른 일까지를 대부분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물론 만약에 대비하기 위해 르미엘르 공주나 라이센더 왕자 그리고 이단심판회 건은 대충 넘어가고 견문을 넓히기 위한 여행 중인 걸로 하긴 했지만, 그게 아주 거짓말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카를 녀석도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던 거지소년일 때 도시를 전전하던 일부터 지금의 카를 블레이크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개인적으로 정말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
카를은 음유시인들이 칭송하는 영웅기만큼은 아니더라도 거의 그에 준하는 이야기책 같은 삶을 살아온 것이다.
출신도 모르고 부모도 모르는 채로 북부의 대도시이자 현재 우리가 향하고 있는 세르휀델 시티의 골목가에서 거지로 자라난 카를.
그는 세상에 더없이 잘 알려진 대로 대략 5년 전쯤,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잠잠하다는 야그투들의 마지막 대침략 당시 강제로 끌려간 전장에서의 활약으로 크로아탄의 군부에 발탁되었다.
그 후에 야그투들과의 전쟁터를 일개 부대장으로 전전하기 시작, 눈부신 전공을 세우며 승진에 승진을 거듭했다.
결국 크로아탄 제국은 삼년간에 걸친 전쟁 끝에 야그투들을 다시 완전히 북방으로 밀어내 버렸고, 카를은 그것에 가장 커다란 공적을 세운 사람이었다. 아니, 그가 없었다면 거의 불가능했던 승리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그 시간동안 오로지 전쟁터만 전전했을 뿐 외부와 접촉이 없었다.
그리고 유약해 보이는 외모를 적들은 물론 그를 철썩 같이 의지하는 아군 병사들로부터도 감추기 위해 대개 갑주와 망토로 온몸을 가리고 전장에 참여했다.
그렇기 때문에 정작 외모 등, 카를 본인 그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눈부신 활약이 있었기에 카를 블레이크라는 전사에 대한 풍문은 무서운 기세로 전 대륙에 퍼져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크로아탄 제국에서는 평민들을 중심으로 카를 블레이크를 추종하는 풍조가 일어날만한 지지를 얻었는데, 이는 어느 정도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그야말로 평민 출신으로 구국의 전쟁영웅이 된 이야기 속 전설의 재림과도 같은 존재였으니까.
그리하여 그때를 즈음하여 크로아탄 제국의 황위를 물려받은 델카예프 3세는 황위를 단단히 굳히고, 대중들의 지지를 끌어들일 정치적 목적으로 그런 카를에게 개국공신 ‘블레이크’ 의 성을 하사하고 무려 공작이라는 대직위를 하사했다.
그러나 귀족들의 반대가 엄청났다. 출신도 미천했던 데다가 정치적 감각이 전혀 없는 카를은 그야말로 물어뜯기 딱 좋은 먹잇감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황제 역시 최전방에서 대전공을 세운 군부의 정신적 지주와도 같은 카를을 무시할 수 없었고 또 그를 이용하려는 것이었을 뿐, 카를 자체에 대해서는 애착을 갖고 있지 않았다.
만약 카를이 어느 정도 정치적 수완이나 관심이 있었다면 상황이 나았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 어떤 공식석상이나 황족 혹은 귀족들의 만찬회 등에도 일절 참석하지 않았을 정도로 정치에 무관심했다.
결국 크로아탄 제국은 카를의 직위를 후작으로 낮추고, 직책은 레드 스페츠나츠의 대장이라는 허울은 좋지만 사실상 그 외의 군권과는 거리가 먼 직책에 임명했다.
그러나 그 후부터는 야그투들의 움직임이 굉장히 움츠려 들었기 때문에 카를은 전쟁터를 떠나게 되었고, 수도에서 무료함에 빠져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 그가 시간을 때우는 방법 중 하나가 유명한 기사나 용병 혹은 모험가들을 만나 그 실력을 가늠해 보는 것이었는데, 그러던 와중에 눈에 띄는 나를 만난 것이다.
“그런데 대체 형을 가르쳤다는 사부란 사람은 누구에요? 꼭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요.”
“..싸워보게?”
“그럼요. 형이 꼼짝도 못할 정도라니 너무너무 싸워보고 싶어요.”
난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카를을 바라보며 두 손을 내저었다. 제아무리 카를 블레이크라고해도 그 작자한텐 무리다.. 내가 아직 이 녀석의 실력을 모르긴 하지만.
“아서라. 그건 인간이 아니야. 그리고 이제 두 번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요? 흐음..”
카를은 못내 아쉬움이 남는 듯한 태도로 눈망울을 굴리더니, 이내 다시 품에서 사탕을 꺼내어 물었다.
생각해보니 좀 이상하군. 확실히 카를 블레이크라면 대륙 최강이라 불리는 검사다. 그런데도 그 사부한테 비교할 순 없다는 생각이 들다니. 하여튼 간에 알 수 없는 자라니까.
..근데 저건 무슨 마법 주머닌가? 뭔 놈의 사탕이 끝도 없이 튀어나오지? 나는 그런 의심어린 눈초리로 카를을 바라보며 말을 천천히 몰았다.
어쨌든 한 가지 기쁜 것은 짧은 시기지만 그래도 그새 말을 모는게 약간은 익숙해진 느낌이라는 것.
“쌀쌀한데.”
이상 난기후인 프로페릴 초원을 거의 벗어나고 있는데다가 이제 북쪽으로 한참 더 올라온만큼, 제법 서늘한 칼바람이 피부를 스치고 지나간다.
아무래도 초원을 지나면 세르휀델에서 망토든 뭐든 방한용품을 좀 더 구해야겠다.
그런데 잠시 후, 태평히 사탕을 쪽쪽거리고 있던 카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쪽 손을 들어올렸다.
“..형. 저기 저쪽 좀 봐요. 뭔가 이상한데요.”
“응?”
난 카를의 손가락 끝을 따라 저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온 방향과 그리 다르지 않은 방향. 시력이 비정상적으로 좋은 나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카를이 ‘이상하다’ 고 지적한 부분을 찾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으음.. 흙먼지네?”
“네.”
확실히 저 멀리 뭔가 스멀스멀 움직이는 것이, 흙먼지가 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게 뭐가 이상하단 건지는 모르겠군.
“여행자라도 말을 타고 지나가나보지. 네가 여기가 말을 몰기에 아주 좋다며.”
난 무료한 시선으로 그쪽을 바라보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카를은 여전히 이상하단 투로 대답했다.
“글쎄요.. 형, 어제 밤에 비가 왔었잖아요.”
확실히 어제 늦은 밤에 갑자기 비가 내려서 노숙하다말고 이 초원 한복판에서 비 피할 곳을 찾느라 고생했었지.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아하.
“땅이 습할 테니 어지간해선 흙먼지가 날리지 않겠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이곳은 그렇잖아도 황무지가 아니라 녹색으로 가득한 초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래가 말을 달려도 흙먼지가 많이 나지 않는 편인데다가, 바로 어젯밤 빗물을 한바탕 머금은 대지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런데도 저 정도 흙먼지라면 확실히 이상하네. 혹시 크로아탄의 기마대 아니야?”
약간 흥미가 동한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곳을 바라보며 묻었다. 그러나 카를은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 거예요. 저건 아무리 봐도 말들이 전력질주를 하고 있을 때의 흙먼지인데, 굳이 기마대가 이런 곳에서 전력질주를 할 이유가 없어요. 게다가 정말 기마대라면 저것보다 훨씬 심하게 흙먼지가 날려야 한다고요. 전령이라면 달릴 이유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말이 대여섯은 넘어 보이니 그것도 아니고요.”
우와, 이 거리에서 흙먼지만 보고도 그런 걸 안단 말이야? 난 감탄해서 카를을 돌아보았다가 이내 납득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암만 겉모습이 저래보여도 크로아탄의 기마대를 이끌고 야그투들과의 전선을 수년 동안이나 전전한 녀석이다. 저 정도 구분을 해내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혹시 날 잡으러 오는 걸지도.”
“설마요. 형이 북문으로 빠져나간 걸 모를 텐데요. 혹여나 소문이 돌았다 해도 이제야 쫓아오는 건 이상하잖아요.”
쩝, 내가 말한 추격대는 그게 아니라 이단심판회를 말하는 거지만.. 난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점차 선명해지는 흙먼지들을 노려보았다.
정말 이단심판회면 어쩌지? 카를까지 말려들게 하고 싶지도 않고, 또 이미 날 여기까지 추격해올 정도라면 뿌리쳐내는 것도 만만찮을 텐데. 아니 만만찮은 정도가 아니라 살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도망쳐야 한다.
“저쪽에서 우리가 보일까? 혹시 우릴 쫓아오는 것 같아?”
난 이제는 저 멀리 검은 점으로 보이는 그 정체불명의 질주자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무 멀어서 마치 멈춰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 정도면 정말 대단한 속력이다.
“글쎄요.. 방향을 대충 우리쪽이지만 어차피 이 방향이 수도에서 세르휀델로 향하는 길이니까요. 그리고 아마 보통 시력으로 우리를 보는 건 무리겠죠?”
“그럼 일단 좀 거리를 둬보는게.. 음?”
난 일단 도망치고 보자는 마음을 먹고 제안하다가 움찔했다. 뭔가 들은 것 같은데.. 카를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난 조용히 하란 신호를 보내고 청각을 집중했다.
분명 저 달리는 말들의 방향에서 뭔가 소리가 들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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